모든 사물은 시간에 의해 결국 쓰레기가 된다

모든 사물은 시간에 의해 결국 쓰레기가 된다 [1]
─ 브라이언 딜과의 인터뷰

2016년 2월 | 이언 멀리니
번역 플레이타임 편집부

Waste
1. 부주의하게, 사치스럽게, 아무 목적 없이 사용하거나 지출하다
2. 원하지 않거나 사용할 수 없는 사물, 물질, 혹은 부산물
3. 무언가의 점진적인 상실 혹은 감소

브라이언 딜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면서 글을 쓰고 영문학을 가르친다. 그의 첫 책 «쓰레기»는 우리 세계를 뒤덮고 있는 사물들을, 그리고 우리가 더는 신경 쓰지 않는 이 사물들에 일어나고 있는 일─물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을 포괄적이면서도 아주 개인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우리 바깥의 쇠락해 가는 세계와 우리가 맺는 관계의 곤혹스러움”을 검토하는 시의적절하면서도 통찰력 가득한 이 책은 버려진 대상들,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생각들, 현대의 삶이 배출하는 일상 속 잔해들을 대면하자고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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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멀리니  이 책의 주요 테마 중 하나는 “모든 사물은 시간에 의해 결국 쓰레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렇게 되면 가설적으론 모든 것에 관해 쓸 수 있게 됩니다. 이 주제에 접근하는 범위를 한정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나요? 쓰레기라는 문제에 어떻게 다가갔습니까?

브라이언 딜  제가 쓰레기에 그토록 큰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쓰레기가 어디에나 침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소재들을 골라내면서 부분적으론 특정 소재가 이 책의 다른 부분과 얼마나 잘 이어지는지를 기준으로 삼았고 또 부분적으론 저만의 색다른 관심사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논의는 수없이 많지만, 제 근본적인 관심은 제게 개인적인 울림과 의미를 지니는 쓰레기 풍경들(데드호스만, 디지털 폐기물, 궤도를 선회하는 우주 폐기물, 텔레비전 리얼리티 프로그램 따위)을 거닐어 보고 파헤쳐 보는 데 있었습니다.
제게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은 다른 작업들을 진행할 때보다 훨씬 풍부하고 한층 의미 깊었는데, 하나의 특정한 이론적 틀이나 시각에 입각해 이 과정을 이어 가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이 스스로 말하게 하고자, 이 대상들을 그 고유의 특수성 및 조건과 더불어 설명하고자 최선을 다한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접근법은 (당시) 제 기질과 잘 어울릴 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상호작용하고 만들며 버리는 대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도 유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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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니  쓰레기와 쇠락[한 폐허]decay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 책에서 당신은 폐허와 폐허를 애호하는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그런데 저는 폐허가 정말로 쓰레기가 아니라 쇠락한 사물인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보면 폐허는 쓰레기와 같은 목표에 기여합니다. 폐허를 바라보는 행위와 쓰레기를 바라보는 행위는 둘 다 잃어버린 과거와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죽음을 상기시키죠. 하지만 콜로세움과 아크로폴리스를 쓰레기라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이것들은 공들여 보존되었고, 따라서 완전히 폐기되는 대신 더 이상 쇠락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폐허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제 책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 즉 유기물遺棄物을 다루는 책에 훨씬 더 가까워요. 제가 이해하기로 이 둘은 다음의 사실 때문에 구분됩니다. 유기물은 대상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대상이 얼마나 새롭거나 망가졌는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욕망과 결부된다는 사실 말이죠. 쓰레기를 오래되고 망가지고 깨지고 부식된 어마어마한 양의 사물로 범주화하면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번쩍거리는 새 차나 고가의 빌딩이 쓰레기와 대립한다고, 이것들은 쓰레기와 달리 깨끗하고 새롭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 실수를 범하는 일이죠. 이 사물들의 새로움과 깨끗함은 관건이 아닙니다. 적어도 제게는요. 마찬가지로 빛이 바래고 구겨지고 그을린 어린 시절 토템 사물들, 우리가 수십 년간 보관하곤 하는 이 사물들도 이런 의미에선 관건이 아닙니다. 관건은 욕망입니다.

저는 욕망이 빠져 나간 사물들(얼마나 오래됐고 상태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을 ‘쓰레기’라고 묘사합니다. 그렇기에 폐허─낭만주의적 기질 덕분에 우리 중 아주 많은 이가 여전히 애착을 느끼는─는 결코 진정한 쓰레기가 될 수 없습니다. 아직은요. 당신도 지적했듯 폐허는 사물들과 우리를 소통시키고 그리하여 우리에게서 특정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래서 쓰레기가 아닌 거죠. 그런데 이렇게 가치라고 여겨진 것(많은 사람에게 이는 그들의 욕망과 동의어입니다)이 사라지면 점점 더 팽창하는 쓰레기 영역 바깥에서 영위하던 그 대상의 삶도 끝나게 됩니다. 물론 충분히 시간이 지나면 가장 가치를 누렸고 욕망의 대상이 되었던(개인들에게나 모든 문명에서나) 사물에서도 가치와 욕망이 빠져 나가기 마련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사물이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제 관심사는 우리가 이러한 연대기의 형태를 비틀고자 하는, 특정 유형의 사물들(우리는 커피 컵과 빨대, 뚜껑, 슬리브가 일상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죠)을 거의 즉각적으로 버리고자 하는 모든 정교한 방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삶의 많은 시간을 갖가지 사물을 보존하거나 모아 두는 데 할애합니다. 우리가 이들 한낱 사물과 맺고 있는 정서적 관계가 시간을 속여 더디게 흐르게 해 주리라는(시간을 멈출 수는 없으니까요) 확신에 사로잡혀서요.

멀리니  확실히 욕망이라는 개념이 이 책 전체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흥미롭다고 느끼는 건 새로이 활성화된reactivated 욕망이라는 이 개념입니다. 언젠가부터 더 이상 욕망의 대상이 아니게 된 무언가가, 어떤 이유에서건 다시 한 번 가치를 지녔다고 이해될 수 있는 무언가가 귀환하는 것인 셈인데요. 우리는 딱히 주목하지 않지만 요즘 이런 일이 굉장히 많이 벌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재생된 가구, 빈티지라 불리는 온갖 물건을 찾는 유행(당신이 마지막 장에서 「아메리칸 피커스」를 사례로 살펴본)은 [이 책이 다루는 쓰레기라는] 이야기에서 변곡점으로 작용합니다. 사물들이 쓰레기가 될 뿐 아니라 또한 쓰레기에서 사물들이 생겨날 수 있고 이것들이 한때 쓰레기였기 때문에 가치를 지닐 수 있게 되니까요. 당신이 발견한 어떤 종류의 가치가 이렇게 재생된 물건들에 투입되어 있을까요? 이 물건들이 살아남았고 애초의 맥락에서 벗어났지만 뜻밖의 내구성 덕분에 일정한 호소력을 발휘하기에 이제 ‘영원한’ 대상이 된 걸까요? ‘소비자’ 관점에서 벗어나도 이와 동일한 사례가 있을까요? 예컨대 일정 기간 버려져 있다가 가치를 획득하게 된 풍경처럼 말이죠. 관념이나 이데올로기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 ‘새로이 활성화된’ 욕망이 어째서 우리에게 작용하는 소비자주의 논리의 기능 이상인지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언급한 사례들(‘재생된’ 가구, ‘빈티지’ 물건 등등)의 경우 이 사물들이 종종 우리 앞에서 활기를 띨 수 있는 건 그것들을 처음 우리에게 팔았을 때 사용된 것과 꼭 같은 판촉 활동 덕분이죠. 아이오와의 한 헛간에서 구한 ‘빈티지’ 코카콜라 간판이 개별 수집가들이 코카콜라 관련 물품에 부여하는 가치 혹은 오래된 간판을 거래하는 시장에서 책정된 요금 이상의 ‘가치’를 보유할까요? 뭐라 말하기 어려워요. 사람들은 흔히 쇠락하거나 희귀한 물건을 보고선 향수에 차 감탄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큰 부분은 사실상 시장이 구축하고 부추긴 것이죠. 적어도 오래된 인공물을 직접적인 역사적 용도 외에 모종의 보충적 가치를 보유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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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빈티지 물건을 취급하는 시장을 제쳐 두면, 그리고 낡아서 버려진 대상을 단순히 하나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시장이 이 감정을 부추긴다는 단순한 설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건 일반적으로 말해 오래되고 잃어버리고 망가진 사물들에 모호하고 때로는 정의 불가능한 힘을 부여하는(특히 이 사물들이 개인적이거나 문화적인 기억을 환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면) 우리 모두입니다. 제가 오래된 ‘스피크 앤드 스펠’ 장난감을 발견했다고 치죠. 그때 전 돈이나 가치 따위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겁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이 발견으로 저는 어린 시절이나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저 대상이 유통되던 시절의 세계가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얼마나 달랐는지를 상기하게 되겠죠.
그리고 이런 기분은 그 대상이 한층 더 깊은 울림이나 개인적인(트라우마를 유발하건 즐거움을 주건) 울림을 낳을 때만 증폭됩니다. 모든 대상은 우리를 우리의 과거로 돌려 보내는 이 힘을 보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힙하고 값비싸고 수공업적이고 ‘빈티지’스럽거나 가짜 빈티지스럽거나 ‘낡아 보이게 처리된’ 그렇게나 많은 물건이 현재 우리의 감각과 시장에 넘쳐흐르는 것이겠죠. 시장은 산업 생산 시절의 공예품과 어린 시절에 대한 우리의 낭만화를, 잇따른 유행들에 우리가 보일 게 틀림없는 관심을, 내가 고른 사물로 내 취향과 성격과 브랜드를 확립하고 소통하려는 우리의 욕망을 자본화하는 새롭고도 창조적이며 수익성 있는 방도를 계속 찾으려 할 거예요.
그럼에도 심층적인 역사로 돌아가려 노력하면서 저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느꼈습니다. 꽤 오래된 과거에 생산된 쓰레기들은 이와는 다소 상이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 중 막대한 다수가 진정으로 드물고 아주 옛날에 제작된 물건을 소유하는 데 필요한 물질적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암시장을 논외로 하면 먼 옛날의 대상들은 시장이 아니라 역사의 부추김을 받아 모종의 아우라를 보유하기 시작합니다. 과거의 파편들은 오래되고 드물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출현시킨 세계-체계의 작은 부분을 재현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니죠. 오래된 도기 파편이나 파피루스 조각 혹은 토템 신의 형상을 새긴 사슴뿔 등처럼요. 이것들은 우리 대부분으로선 어떻게 해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생활방식과 문화의 대리물이 됩니다. 아마도 당신이 언급한 다른 것들, 즉 풍경이나 관념, 이데올로기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거예요. 문제는 이것들을 오래전 모습 그대로 소생시키거나 재구축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것들은 그 대상 자체가 아닙니다. 인간 경험(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겪고 쇠약해지고 소멸하는)의 한 측면이죠. 예를 들어 다른 시대와 장소에 모계적이거나 아나키즘적인 사회 혹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소유 관계 관념을 보유하고서 살아남고 번창한 사회가 존재했다면, 그 사회에서는 새로이 활성화된 욕망이 단순히 부활한 ‘가치’(주로 시장이 부추기는)가 아니라 실제로 생산적이며 필수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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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니  이 책에서 당신이 인간의 소비가 한층 묵시적인 기후 변화를 초래했다는 주장을 직접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주제는 당신 책 전반에 출몰합니다. 당신이 책 말미에서 언급했듯 우리의 사물들(즉 우리의 습관과 우리의 애착)에 산 채로 파묻히고 있다는 감각이 이 책을 사로잡고 있는 셈인데요. 당신이 이 주장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적으로 결정하고선 우회적인 방식으로, 어쩌면 더 개인적이고 부분적일 앵글로 이 문제에 접근한 건가요? 저는 많은 경우에 이 방식만이 유일하게 유용한 접근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로서는 기후 변화의 실제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엄청나게 거대한 규모의 세계 종말을, 우리는-모두-죽을-것이며-그것을-막기-위해-아무것도-하지 않았다는 공황 상태를 한 사람의 머리로 생각하고 그 중요성을 감지하기란 불가능한 일처럼 보여요.

 절대적으로 그렇습니다. 이 책에 출몰하는 주연 유령을 지적하신 셈이에요. 지구의 충격적인 변형, 자연과 산업의 대규모 재창안라는 주제가 이 책을 사로잡고 있어요. 이 상황들이 매일매일 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들을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벌여 온 일들의 결과를 우리 머리로는 앞으로도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파악한다 하더라도 이미 너무 늦어 있겠죠. 우리가 대면할 수 있는 가장 불가능한 과업 중 하나는 우리를 역사적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고(많은 경우 그래야만 합니다), 나 자신의 시간, 장소, 상황, 관점 바깥을 사고하고 행위하기란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일입니다. 우리 대부분에게 그럴 능력이 없어서 우리가 이처럼 엄청나게 엉망진창이 된 것이기도 하고요. 우리 문화를 잠식한 수많은 사물이 비체계적이고 비역사적으로 사고하라며, 주도적인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이데올로기들이 내미는 위안을 받아들이라며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 변화를 포함해 전 지구적 위기들이 우리에게 사고와 행위를 요구하는 위치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위할 시간, 에너지, 욕망 혹은 돈을 거의 보유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렇습니다, 그런 인식론적 문제를 배경 어딘가에 얼마간 배치하자고 의식적으로 결정한 게 맞아요. 저 문제를 대면하는 것이 일생 동안 노력을 기울어야 하는 과업 중 하나며 의도적으로 학술적인 양식을 피해 쓴 얇은 책으로는 이 문제를 만족스럽게 고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쓰레기라는 사안에 우회적이고 자서전적이며 색다르게 그리고 종종 불편함을 야기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려 했고, 그럼으로써 우리 행성이 맞닥뜨린 위기에 대한 모종의 시차적 관점(기껏해야 그 정도긴 하지만)을 제시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커피 컵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 병적이라 여겨지는 호더들을 텔레비전에서 보는 걸 우리가 왜 좋아하는지, 우리의 핵폐기물 전체가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세대 동안 살아남으리라는 사실과 더불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등을 사고하는 소박한 방식으로 위기를 들여다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의식적으로 논쟁을 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하듯 가르치는 방식으로는 제가 이 주제에 느끼는 호기심, 의혹, 두려움, 혼란스러움, 분노를 결코 적절히 표현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에요. 때로는 그릇된 방향만이 서투르지만 유일한 전략이 될 수 있어요.

멀리니  이 책에서 당신은 “이미지 앞에서 언어는 쓰레기를 생각하기 위해 불려 나온 가엾은 옹호자처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어쩌면 이미지의 스펙터클한 측면이 이 맥락에서 문제가 될 수도 있음을, 즉 기후 변화(혹은 모든 종류의 재난)에 ‘보면 믿게 될 것이다’ 식으로 접근하는 태도가 그 자체로 문제일 수 있음을 제안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렇기에 당신은 이미지에 대항하는 글쓰기, 이미지를 넘어서서 특정한 유형의 믿음과 확신으로 향하는 글쓰기를 모색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저도 최근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데요. 특히 지중해에서 쓸려 온 난민들을 찍은 이미지를 보면서 그랬고, 언제 어떻게 저 이미지들이 충분한 감정과 스펙터클을 획득하며 위기에 대한 인식이 한층 더 일반화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이 문제를 다룬 글을 쓰면서(큰 소득은 없었지만) 제가 이미지의 간명함과 충격을 선망해 왔음을 인정했습니다. 당신도 이 책을 쓰면서 이런 문제, 즉 한 장의 이미지가 작업을 두 배 편하게 그리고 다섯 배 빠르게 만들어 줄 거라는 문제에 직면한 적이 있나요? 그런 적이 있었다면 그 교착 상태를 어떻게 풀어 나갔나요? 이것이 당신이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것에 관해 무언가 말해 준 바가 있었나요? 감정/스펙터클이라는 이 쟁점에 접근하는 데 있어 당신의 역할을 무엇이었을 수 있을까요?

 처음에 저는 이 책에 이미지를 하나도 수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아래에서 설명할 이유들 때문에요). 하지만 블룸스버리에서 펴내는 오브젝트 레슨스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의 연속성을 어느 정도 지켜야 했어요. 그래서 인접한 페이지들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예증하기보다는 해당 부분의 텍스트를 간접적으로 반향하거나 환기하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사용하기로 했죠.
당신의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글이 이제는 이미지에 비해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렵지 않느냐는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근래엔 분명 말만큼이나 이미지도 포화 상태죠. 그리고 말이든 이미지든 그것에서 사회 정의 프로그램으로 도약하기가 어렵긴 매한가집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더라도 당신이 언급한 종류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정치적이거나 프로파간다적으로 이용되는 방식은 아주 질색입니다. 이로운 대의에 사용되더라도요. 이런 반감을 느끼는 건 부분적으로 사이디야 하트먼, 수전 손택, 일레인 스캐리, 그 외 다른 여러 사람의 작품을 읽고서 얻은 가르침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속의 무대, 스펙터클 체제, 고통받는 신체를 주제로 감동적인 작품을 써 냈죠. 익사한 아이를 찍은 사진이 아무리 정서적인 잠재성을 지니더라도 그 옆에는 비도덕적이고 외설스러운 특성이, 우리가 이 이미지를 퍼뜨릴 때 연루될 수밖에 없는 침투성의 오염된 무언가가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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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그라이브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모욕당한 남성을 찍은 사진이나 여타 수백 가지 사례를 떠올려 볼까요. 한 층위에서 사람들은 세상이 이 이미지들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충격적이고 몸서리쳐지는 이미지가 전달하는 직접성과 진실만이 우리 이름으로 자행되는 매일매일의 참상과 우리를 분리하는 장벽을 뚫을 수 있다면서요.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층위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를 당황케 만들고 우리의 정치와 정치적 행동과 생활양식을 빚는 이 이미지들에 갈수록 더 의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우리 행성의 파괴나 여타 재앙을 포착한 멋들어지거나 감동적이거나 소름끼치는 이미지들을 견디기가 어렵고 또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 그토록 많은 이가 먼저 눈으로 봐야만 이런 파괴나 재앙이 존재함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 먼저 눈으로 봐야만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사실이 한층 더 큰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습니다. [물론] 이 문제에 관심 있는 누구든 지구 온난화 정도를 알려 주는 적나라한 사실과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익사한 아이의 사진이 알려 주듯 우리는 재앙을 찍은 장면들의 아카이브(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에 지나치게 의존한 채로 담론과 행동을 구축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뒤늦게 제시되는 이미지는 아무 쓸모도 없으니 나쁘다거나 잘못됐다고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미지와 스펙터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오용하는 행위는 보다 무해한 우리의 이미지 왕국(텔레비전, 유튜브, 광고, 바인, 밈, GIF, 이모지 등등으로 구성된)과 아주 잘 들어맞기 때문에 가까운 시일 내에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미지보다 글을 선호하는]다른 이유로는 제가 생각하기엔 시간과 관련해선 글이 늘 이미지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이미지가 드러낼 수 없는 차원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글은 할 수 없지만 이미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전의] 우리는 수월하게 구분할 수 있었죠), 한 편의 글에 참여하는 건 이미지에 흡수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시간과 화해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제게 읽기가 선사하는 몰입형 시간관timescape은 사진, 비디오, 스펙터클, 이미지가 결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제가 글에 대한 이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요구하진 않을 테지만, 그래도 전 한층 스펙터클한 대안들보다는 글에서 더 많은 희망을 발견하곤 합니다.

 

[1] 이 글은 https://fallowmedia.com/2016/feb/waste/에 수록된 브라이언 딜과 이언 멀리니의 인터뷰를 브라이언 딜의 허락 하에 번역한 것이다. 첨부된 이미지들 역시 브라이언 딜에게 저작권이 있으며 모두 그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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