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면 할수록 어렵다 디자인. 예전에는 나를 디자이너라고 소개하는 데에 거리낄 것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쩐지 쭈뼛거리게 된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내가 모르는 사람들까지 포함해) 너무나 많은데 내가 그런 사람들과 같은 직업명을 가져도 되는 것일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SNS에만 들어가 봐도 특정 책의 표지 디자인을 혹평하거나 찬양하는 사람들이 널렸고, 또 현재 북디자이너들의 작업이 얼마나 구린지를 단 한 문장으로 평가해 버리는 이들이 내 가슴을 후벼판다. 작업 하나하나를 거칠 때마다 부담과 불안만 커지고 그것들이 나를 못살게 군다. 이번 작업도 중간에 엉엉 울어버릴 만큼 힘이 들었는데, 그냥 이 정도가 내 한계인가 싶어 자포자기하듯 초연해졌다가도 갑자기 스스로에게 벌컥 화가 나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오브젝트 레슨스’ 표지 작업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내게 (그리고 표지가 멋지다고 얘기해 준 몇몇 다른 이들에게) 썩 괜찮은 결과물로 남게 되었고 그래서 이후 작업들은 ‘적어도’ 오브젝트 레슨스 만큼은 만족스러워야 한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생겨 버렸다. 그래서 훨씬 더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게다가 이 책은 미국에서도 아주 인기 있는 책이고 다른 언어로도 번역돼 여러 아름다운 표지들이 이미 공식적인 얼굴로 등록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들과는 다르지만’ 멋진 디자인을 뽑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정말 컸다. 그중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것은 이 책의 스웨덴어판 표지였다.

나는 이 표지만큼 잘 만들 자신이 없었다. 이 표지는 웃프고도 사랑스러운 책의 내용을 귀엽고 예쁘기까지한 그림체로 완벽하게 구현한 것 같았다. 시작부터 너무 겁이 났다. 이 표지를 본 뒤부터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모조리 이 표지와 비슷한 것들이었고, 그것들을 피해서는 달리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스케치를 하는 도중에도, 시안이 완성에 가까운 단계도 아닌데 벌써부터 스웨덴어판 표지와 비교하면서 ‘별로네’ 싶고, 그런 뒤에는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지지부진한 상태로 끼적이기를 몇날며칠 반복하다가 원저작권사에 컨펌용 확정 표지 시안을 보내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그냥 이렇게 가지 뭐’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냥 내 한계를 경험한 셈쳤다.

그러다가 표지 시안 파일을 열어 보고는 다시 또 짜증이 솟구쳤다. 스스로 안일하고 한심한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우울했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빈 도큐를 열고 새로운 표지 시안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남은 시간이 부족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최악의 상황이라고는 한계를 다시 한번 느끼는 것뿐일 테니까, 그게 되게 뼈아프긴 하지만. 그렇게 막판의 막판에 탄생한 것이 이 책의 표지다. 돌이켜 보니 고통의 과정이 떠올라서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음 ㅠㅠ

표지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감을 얻었다. 슬픔의 바다에 외로이 떠 있는 한 척의 배, 그 배는 사랑과 ‘마음에 들어요(트위터)’를 싣고 간다. 배는 외롭지만 사실은 혼자가 아니다. 주변에 함께 우는 이들이 물결치고 있으니까. 이 마지막 부분은 다시 읽어도 감동적이다. 표지를 작업하면서 내가 얼마나 큰 부담과 압박으로 힘들었는지를 줄줄이 써놓고 보니 더욱 뭉클하다. 여기서 말하는 ‘깊고 진실한 차원에서 연결되는 것’, 그게 뭐 별거겠어? 이 뭉클함이 바로 그 연결이지 싶다. 여기저기의 많은 여성들이 함께 읽고 서로 연결되기를, 깊고 진실하게.
“내 안에는 슬픔의 바다가 있고, 나는 평생 그 바다를 막을 댐을 쌓아 왔다. 나를 그 바다에서 구원해 줄 무언가가 있으리라고 상상하면서. 하지만 어쩌면 바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구원일지도 모른다. 직선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감정의 세계에 빠져 보는 것이다. 왜 아무도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을까? “네 슬픔의 바다를 즐겨. 거긴 두려워할 게 아무것도 없어”라고 누군가가 알려 주었더라면 이제껏 그 많은 댐을 쌓을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나와 같은 사람들은 자기 안의 바다를 다루는 능력이 남들보다 부족하거나,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어서 더욱 겁에 질리는 것 같다. 그래서 엿 같은 댐을 쌓는 것이다. 하지만 댐은 아무리 쌓고 또 쌓아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댐은 무너지고 바다가 다시 말을 걸어 온다. “나는 살아 있어. 이건 진짜야.” “나는 죽을 거야. 이건 진짜야.”
‘오늘 너무 슬픔’이라는 제목을 붙였더니 불안과 우울을 주제로 한 완벽한 에세이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다. 하지만 내게 불안과 우울을 몰고 오는 것이 바로 완벽이라는 환상이다. 완벽주의는 미세한 체온 변화를 일으키고, 호흡을 흐트러뜨리고, 급기야 공황 발작을 불러온다. 내 능력을 선보여야 하는 사람들 앞에 있을 때면 특히 그렇다. 공황 발작이 시작되는 징후들—숨이 가쁘고 가슴이 갑갑해지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것—은 그저 감각이다. 내가 거기에 얼마나 겁을 내면서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감각들은 고조될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나는 보통 겁을 냈다.
물론 내 불안과 우울이 순전히 완벽주의 때문만은 아니다. 그 외에도 체내 화학작용, 민감한 감성, 인생 내력, 양육 과정, DNA 등의 원인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실존적이고 신비로운 의문들도 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이게 다 뭐지?’ ‘내가 죽게 되나?’ ‘지금 당장 죽는 걸까?’ ‘지금 당장 죽는다면 그게 끝일까?’ ‘지금 당장 죽지 않는다면 이게 다일까?’
참 희한한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 살아 있다니. 왜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살고, 그 사실을 모른 척하면서 각자의 일을 하러 다닌다니. 다 같이 서로를 마주보면서 “씨발, 이게 뭔 상황이지?” 이러고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완벽주의의 이름으로, 나는 이 글에서 내 불안과 우울의 역사를 최대한 직선적인 서사로 서술하려 노력했다. 사람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는 데는 그 방식이 대다수 사람에게 친숙할 테니까. 그래도 나는 이 글이 직선적인 서사를 조금이나마 초월했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이 내 “씨발 이게 뭐야”스러운 상황에 공감하고, 당신의 상황에 대해서도 마음이 조금 편해질 수 있었기를.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나를 좋아해 주는 것밖에 없다. 물론 이건 겁에 질린 여자의 표현 방식이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내가 아직 지구상에 발 딛고 있는 동안—어쩌면 이 지구를 떠난 뒤에도—당신과 깊고 진실한 차원에서 연결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블로그를 타고 넘어와 을 읽고 이 글까지 보게 됐어요. 많은 고민과 한계의 시간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창작의 과정을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좋은 책이고, 표지는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눈물이 차올라서 고여 있는 듯한 배경에 홀로 떠 있는 배가요. 좋은 책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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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고님!^^ 아직 게시글도 몇 없는 저희 블로그에 들러 따뜻한 댓글 달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T^T 시간이 지날수록 디자인하는 일이 더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이렇게 칭찬과 응원을 받으면 힘들었던 만큼 용기도 생기는 것 같아요! 책도 재밌게 읽으시고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드셨다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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