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될 여유가 없다

오늘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부록으로 수록한 마크 피셔와 조디 딘의 대담을 공개합니다. 2009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출간된 후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느낀 일군의 연구자가 모여 «자본주의 리얼리즘 읽기»라는 편집서를 출간했고, 이 대담을 그 책의 첫 챕터로 수록했습니다.

마크 피셔의 대담 상대자로 나선 조디 딘은 현재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좌파 정치학자 중의 한 명입니다. 딘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주체성을 잠식한 결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마저도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유효한 적대를 구축할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학자입니다. 그리고 이 대담에서 두 사람은 특히 이런 정치적 주체의 등장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일부 내용을 확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담이라는 형식 덕분에 한층 심도 깊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리얼리즘»도 그렇듯 이 대담에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우리의 현실과도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논의를 들여다보는 데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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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될 여유가 없다[1]
─ 마크 피셔와 조디 딘의 대담

조디 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설명하면서 당신은 슬라보예 지젝이 프레드릭 제임슨에게서 가져온 관념을 받아들여 그것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지젝은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젝에게 이 논점은 기본적으로 탈정치화나 탈정치화의 징후를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에 그는 그것을 추인하는 것과 그것을 비판하는 것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당신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비판의 실마리, 비판을 위한 범주로 만듭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업그레이드하고 확장시킨 방식들을 당신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부터 자각하고 있었습니까, 아니면 후에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됐습니까?
나아가 당신이 그 개념을 사용하며 이해했던 방식을 더 말해 줄 수 있으신가요? 저는 제가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그 개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 두 가지 또는 어느 하나에 동의할지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어떤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구성체, 즉 후기 신자유주의의 그것을 가리키는데, 그 안에서는 평등에 대한 온갖 환영과 희망이 발산되어 왔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더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무기, 즉 자본주의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맞서 행사된 어떤 논점을 가리킵니다. 두 해석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보다 당신의 논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마크 피셔  당신이 묘사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두 가지 의미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필연적으로 일반적인 이데올로기 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실패할 때만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특정한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2008년 이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실패하기 시작했을 때처럼 말이죠.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사고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그것을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라고 여기는 하나의 믿음으로, 다시 말해 다른 체계들이 바람직한 것일지는 몰라도 자본주의만이 제대로 작동하는 유일한 체계라고 여기는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은 그것을 이 모든 것과 관련된 어떤 태도로, 가령 투쟁은 의미가 없으며 우리는 그저 적응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할 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체념의 감정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이해하는 이 두 가지 방식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초개인적인 정신적 하부구조와 비슷한 것이지만 이 두 방식은 개인 심리학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지만 그 명제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직접 설득한다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까닭은 오히려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저는 일터에서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러한 업무들 중 어떤 것도 믿지 않아, 이 일은 그저 지금 해야 하는 것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관리자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제 생각에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두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자유주의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선전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자유주의적 지배에 적응하는 것은 실용적인 생존의 문제일 뿐 결코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는 통념을 유포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데올로기는 비정치적으로 보일 때, 그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처럼 보일 때 가장 강력합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가장 강력할 때 그것은 언제나 이런 탈정치화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조디 딘  저는 당신이 여기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정서적 차원을 강조한 것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동시대 좌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시험대 중 하나는 당신이 언급한 그 체념입니다.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거나 다양한 영역에서 장기적인 전투에 참여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데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도 결국에는 이런 활동이 정말로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우리는 흡수될 것이다, 자본은 적응할 것이다(언제나 그렇다), 우리가 이긴다면 그것은 심지어 더 나쁜 일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20세기의 궁극적인 교훈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스탈린과 마오를 검색해 보라 등등.

마크 피셔  당신이 작업에서 아주 잘 보여 주었던 것, 즉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좌파의 후퇴일 뿐 탈정치화 자체는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실종된 것은 우리의 정치지 정치 그 자체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좌파의 병리 현상입니다. 내가 책에서 이야기한 경험의 상당수가 신노동당이 가장 위세를 떨치던 시기 제가 교사로 일하는 동안 일어났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신노동당 프로젝트의 기저를 이루고 있던 것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신노동당과 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시도는 둘 다 어떤 ‘새로운 리얼리즘’과 타협을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그들의 등장은 우익 지배의 종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의 공고화를 시사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신자유주의에 굴복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의 쇠퇴와도 관련됩니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나올 개연성이 낮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은 없다’라는 옛 대처리즘의 관념을 존재론적 주장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 관념은 단순히 신자유주의가 다른 정치 프로그램들보다 더 낫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 다른 정치 프로그램들을 떠올릴 수조차 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특징은 은행 위기 이후 자본에 대한 저항이 구축되면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오큐파이 운동에 직면했을 때 자본의 옹호자들은 지금 설명한 것처럼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그 주장을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평하고 청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전망을 즉각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상상력을 저해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역량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디 딘  좌파의 상상력을 저해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신이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염려스러운 것은 오큐파이 운동에 내재한 무정부주의 경향에서 이처럼 과소평가하는 태도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열려 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국부적인 행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입장들입니다. 이런 입장들은 지금 우리가 언급한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미 피켓을 만들고 시위를 조직하며 팸플릿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한 시험대는 유효한 집단적 행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결집시키는 일입니다. 또는 함께할 수 있고 실제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무언가를 생각해 내는 일입니다. 다른 사례로 최근에 저는 한 활동가가 은행 업무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속한 활동 집단의 과제를 투명하고 지속 가능하며 수익성 있고 매력적인 은행 업무 모델, 즉 소비자들이 원할 것 같은 은행 업무 모델을 찾으려는 시도로 묘사했습니다. 제가 듣기로 그는 책임 있는 자본주의를 원하는 그저 또 한 명의 기업가처럼 말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큐파이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위한 운동이었다는 듯이 말이죠.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그의 주체성을 완전히 구조화한 나머지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대안이라곤 더 나은 소비용 제품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적 상상력의 쇠퇴는 집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역량의 쇠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당신의 논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 즉 자유로운 선택, 개인의 책임, 경쟁 등을 강조하는 경제적・정치적 구성이 표면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자들까지 포함해 주체성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어떻게 그들을 오히려 왜소하고 온순하며 순응하게끔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집단적인 정치적 행동에 많은 희망을 걸지 않도록 만드는지를 보여 주는 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달리 말해 좌파 버전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주체는 자본주의가 불가피하다고 믿고, 자본주의 자체가 활력과 혁신의 근원임을 발견하며,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수용하고, 집단적 행동을 멀리합니다. 이 모두는 이 주체가 어떤 ‘불가피성’을 묵인하는 데서 연유합니다(그리고 당연히 그 역 또한 사실입니다. 즉 불가피성에 대한 이런 감각은 자체로 그러한 믿음, 수용, 멀리함의 효과입니다). 라캉의 용어로 말하면 이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한다고 할 수 있을 테죠.
자본주의와 맺고 있는 특정한 방식의 정서적 애착에 대한 이런 묘사, 즉 전혀 음울하지 않으며, 비난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참신함과 쾌락을 자본주의가 제공하고 있다고 보는 이런 묘사를 당신은 받아들이시나요(덧붙여 말하면 저는 2010년 10월에 런던에서 우리가 가졌던 한 좌담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를 묻는 이유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나오는 자본주의에 대한 당신의 묘사가 그것이 얼마나 음울하고 순응적이며 지루한지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저는 그 비판을 더 강렬한 즐거움을 약속하는 비판으로 읽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신의 논점이 어떤 미학적 비판을 강조하고 있다고 이해한 것이죠. 대조적으로 저는 미국과 영국에 사는 많은 사람이 부채, 압류, 실업, 긴축, 나아가 삶의 전반적인 프롤레타리아화에 직면해 있지만 이들은 여전히 수많은 당과糖菓, 가령 유튜브, 페이스북, 상이한 종류의 무수히 많은 음악,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스포츠, 저렴한 수입 의류, 풍부한 간식거리 등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당과들, 소소한 쾌락들이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에 애착을 갖게 만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희생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당과들은 끊임없이 극단적인 불평등을 정착시키는 근본적으로 야만적인 체계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끔찍한 종류의 협박이며, 우리는 오락과 소통을 제공받는 대가로 평등과 연대를 포기해 왔다”는 생각과 “우리가 이러한 당과들을 원하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체계는 위기에 처해 있고 여기저기서 붕괴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어쨌든 우리는 그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의 결합을 강조하곤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마크 피셔  저는 소소한 쾌락들과 음울함이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둘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동일한 사태라고 생각합니다.

조디 딘  맞아요, 훌륭한 생각입니다.

마크 피셔  ……소소한 쾌락들을 계속 소비한 결과가 어떤 전반적인 음울함입니다. 음악 비평가인 사이먼 레이놀즈는 «레트로 마니아»(2011)[2]에서 지난 10여 년 동안 일상의 삶은 가속화되었지만 문화의 속도는 둔화되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조금씩 끊임없이 주어지는 디지털 자극에 사람들이 언제나 접속해 있다는 사실은 획기적인 문화적 생산을 위한 조건들, 가령 모종의 침잠, 반성을 위한 공간, 몰입하는 능력 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레트로 마니아»에서 레이놀즈는 제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다룬 것과 동일한 시간적 관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회고나 혼성 모방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더 이상 그것들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이 제임슨이 1980년대에 포스트모던 문화를 두고 제시한 예언적 설명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참신함과 혁신에 대한 자본의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점점 더 동질화되고 예상 가능한 것으로 변해 왔다는 점이 이제는 분명해진 상황입니다.
오락과 쾌락에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우울증이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쾌락주의적 우울증을 논의하며 주목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가령 쾌락원칙을 넘어서지 못하는 무능은 끊임없는 쾌락이 아니라 영구적인 불면증을 산출합니다. 소셜 네트워크나 유튜브에서 클릭하며 밤을 보내는 우리의 경험은 정확히 쾌락과 권태의 동시성에 대한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포드주의 시대와 연관된 권태는 끝났습니다. 이제 그런 권태를 위한 공간은 없습니다. 스마트폰은 그런 권태가 자라날 수 있는 모든 간극을 메웁니다. 그러나 링크를 따라다니며 클릭하고자 하는 불면증적인 욕구가 곧바로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디지털 세상을 표류하는 이런 경험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분위기는 매혹과 권태의 혼합물입니다. 우리는 열광하는 동시에 권태로워합니다. 저는 당신이 소통 자본주의communicative capitalism를 논의하면서 제시한 충동에 대한 분석이 설득력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령 소통 자본주의의 쾌락들은 우리가 계속해서 그와 같은 충동에 매달리도록 잡아끄는 미끼입니다. 그런 충동은 이런저런 쾌락을 겨냥하지 않고, 특수한 내용에 대한 애착을 통해 표명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충동은 클릭하려는 욕구 그 자체와 더 관련됩니다. 달래기 어려운 이러한 충동의 맹목성과 비교해 보면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욕망조차 다소 예스러워 보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충동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제 초점이라면 당신은 충동을 전적으로 우회해야 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조디 딘  맞아요, 아마도 어느 정도는 그럴 겁니다. ‘어느 정도는’이라고 말한 건 이것이 어느 한쪽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억제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우세함 내지 정도의 문제입니다. ‘소셜 링크’나 더 일반적인 담론적-물질적 환경의 특징이 충동에 있다고 하더라도 소통 자본주의에는 여전히 욕망이 존재합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욕망에 필수적인 간극 또는 결여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는 충동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파열시키는 문제죠.
알랭 바디우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즉각 반사적으로 ‘이름들’과 ‘명명하기’에 눈이 갔습니다. 제 반응은 “지독하군, 새로운 주인을 요청하고 있잖아” 어쩌고저쩌고였습니다. 하지만 그 뒤 시간이 지나면서 (부분적으로는 지젝을 읽으면서, 부분적으로는 브루노 보스틸스와 피터 홀워드를 읽고 그들과 대화한 덕분에) 어떤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즉 제 반응은 이름들이나 이름들이 구조화하는 담론들이 의미 작용의 끝없는 놀이를 멈추고, 충동의 반복 순환에 특유한 의미의 끊임없는 지연과 가능성의 분산을 멈추는 데 있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의 용어, 이름, 개념, 담론이 완전히 의미를 고정시키거나 가능성들을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고의 방향을 정하고 행동에 활기를 부여하는 순간적이고 임시적인 형태는 제공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이런 종류의 일시적 안정화stabilization의 사례들을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좌파는 안정화로 인해 무언가가 배제될지도 몰라 전전긍긍하고 우파는 의식적이고 고의적이며 간악한 방식으로 그런 안정화의 사례들을 반복한다는 그리고/또는 왜곡한다는 것이죠. 이는 복잡한 미디어 환경에서 벌어지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 전투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현 상황에 부재하는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이름들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이는 그저 충동의 상황을 일종의 상실의 힘 또는 힘으로서의 상실 자체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방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상실을 단순히 끊임없이 고집하고 되풀이해 반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욕망에 구성적인 결여로 사고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요? 바로 누락된 것이 공통적이고 집합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저는 «블로그 이론»[2010][3]에서 스펙터클과 스펙터클이 모종의 집합성을 전도된 형태로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방식에 대한 기 드보르와 조르조 아감벤의 논의를 경유해 이런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충동의 순환을 따라 소소한 즐거움에서 다른 즐거움으로, 이슈에서 이슈로, 트렌드에서 트렌드로, 프로그램에서 프로그램으로 떠돌아다니는 것은 공통의 의미, 공통의 목표, 공통의 자원, 공통의 기획 차원에서 집합성이 부재한 결과입니다. 저는 «공산주의적 지평»(2012)[4]에서 이런 생각을 도입했지만, 이는 자본주의적 충동의 타자이자 이 충동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공산주의적 욕망에 기반을 둔 더 커다란 기획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울증이란 충동이 보여 주는 미친 듯한 조증의 비활성적 이면이라는 당신의 묘사는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으며 어떤 결핍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제 생각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여기서 누락되어 있는 것은 욕망에 필수적인 그 간극입니다. 그렇다면 더 나은 좌파 정치를 위한 결정적인 요소는 이러한 간극을 분명히 하고, 감지할 수 있도록, 부인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을 점거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크 피셔  저는 욕망을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자본에 맞세우는 움직임을 거부하는 편입니다. 한편에 평등과 연대가 있고 다른 한편에 욕망과 오락이 있어 이 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리얼리즘 자체의 한 단면에 속합니다. 가령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욕망이 오직 자본주의와만 어울리는 것이며 결국엔 모든 비자본주의 체계를 파괴하고 말 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제가 후기 자본주의 문화의 음울함을 계속 역설하려는 이유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미학적 비판이 그토록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우리는 대중적이지 않은 포퓰리즘과 더불어 정말로 즐겁지는 않은 오락을 만나게 되죠.

조디 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설득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둘 모두 욕망을 통해 자본주의를 설명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자본주의가 욕망의 자극과 배양, 획정을 독점하는 것을 분쇄하고 돌파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얻는 당과들이 실제로 즐거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가령 <사우스 파크> 제작진이 연출한 브로드웨이 쇼인 <모르몬교의 책>(저는 보지 않았습니다) 또는 플래시몹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은행 및 휴대폰 광고—수백 명의 사람이 기차역에서 노래하고 춤추는—는 전적으로 경이롭죠.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저는 탄성을 지릅니다. 마찬가지로 포퓰리즘은 실제적입니다. 물론 포퓰리즘을 조작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미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는 자본가가 자신의 미래를 가져가는 것보다 정부가 자기 돈을 가져갈까 봐 끝없이 전전긍긍하는 우매한 인종주의적 호모포비아입니다. 그래서 제게는 욕망과 충동을 분리하는 일이 중요해 보입니다(다시 말해 사적인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을 되찾아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집합성에 대한 욕망을 자극할 수 있도록 누락되어 있는 것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해 보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오락을 제공하지만 불평등하게(누가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가), 부당하게(착취를 통해), 너무 많은 것(삶, 미래, 환경, 욕망 자체 등)을 희생시키며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겁니다.

마크 피셔  실제로 존재하는 사이버공간의 모든 특징이 자본주의와 필연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유튜브 같은 것이 내재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는 않죠. 사실 유튜브는 자본이 본질적으로 기생적이라는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주장을 입증해 주지 않습니까? 유튜브의 배후에 있는 욕구는 협동적인 것입니다. 자본은 유튜브를 위한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전제 조건이라 해도 오직 우연적인 방식으로만 그럴 뿐입니다. 사이버공간에서 상품화나 자본주의적 주체성이 강화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탈상품화 및 새로운 집합성 양식으로 나아가려는 거대한 경향 또한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현행의 리비도적 순환으로부터의 모종의 물러섬withdrawal이 필수적이며 당신이 말하듯이 체계가 이런 종류의 당과를 오래도록 던져 줄 수는 없을 것임을 고려하면 불가피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임슨은 «변증법의 원자가들»(2009)에서 이를 훌륭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5] 그는 “상품에 대한 절제”(384)를 예견하면서 “우리가 현재를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해 발전시켜 온 보상적인 욕망과 도취 상태를 포기하기가 아주 어려울 수도 있다”(384)고 경고합니다. 그럼에도 다시 저는 상품에 대한 이런 절제를 물러섬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상이한 종류의 욕망이 출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기를 더 선호합니다. 당신의 입장은 우리가 그와 같은 절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가요?

조디 딘  물러섬의 정치에 대한 당신의 회의에 공감합니다. 저는 미국의 ‘러스트 벨트’ 지역, 즉 자본 철수withdrawal가 결국은 빈곤과 실업의 증가 및 인구 감소를 야기해 온 지역의 외곽에 살고 있습니다. 금융・경제 위기에 직면한 수많은 사람 또한 자신의 예전 소비 습관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이는 상품에 대한 절제가 정치적으로 즉각 해방적인 것은 아님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당신이 제임슨과 탈상품화를 참고하며 주장하는 것처럼 현재의 자본주의는 상품을 통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경쟁과 지대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유튜브는 자본가의 머리를 자르고 생산 인구를 먹여 살리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지만 이 순간에도 제가 계속해서 그것이 자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아니, 저는 절제보다는 오히려 훈육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집단들로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훈육 말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유토피아주의로 가는 훌륭한 이음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2009)[6]에서 지젝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안에 어떤 유토피아적인 핵심, 즉 이것이 최고의 체계라는 관념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이런 관념이 당신의 한층 더 디스토피아적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이면이라고 혹은 그 자본가적인 면모나 지배 계급적인 면모라고 생각하십니까?

마크 피셔  다소 복잡한 문제입니다. 표면적으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모든 유토피아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부가 바로 ‘리얼리즘’[현실주의]을 이룹니다. 우리는 의회의 좌파가 유토피아적이라고 이해될 여지가 있는 것을 포기하고, 협소하게 구상된 가능한 것의 모델에 따라 실용적인 적응을 내세우는 수사를 구사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안에 근절할 수 없는 유토피아적 핵심이 있다면 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신자유주의의 차이를 보여 줄 겁니다. 신자유주의는 좌파를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종속시킬 수 있었기에 성공해 왔지만 두 경향이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반유토피아적인 곳에서 신자유주의가 유토피아적 차원을 담지하고 있기도 합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과 관련해 곤혹스러운 점 중 하나는 그들이 실제로 어느 정도까지 이러한 유토피아주의를 믿고 있느냐는 문제, 혹은 유토피아주의가 지배 계급의 자기 이해관계를 감추기 위한 가면에 불과한 것은 아니냐는 의심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토니 블레어 같은 사람은 진정 수수께끼였어요.
우리가 유토피아적인 것의 존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순수하게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정치가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자본이 가면을 벗고는 아무 단서도 달지 않은 채 “좋아,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착취적이고 탐욕스러워, 언제나 그렇지”라고 말하는 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는 이처럼 말하는 측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측면은 신자유주의의 유토피아적 주장들에 의해 상쇄됩니다.

조디 딘  실제로 저는 자본이 그처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부인할 수 없고 탐욕스러운 이 핵심이 신자유주의의 현재적 붕괴 속에서 노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럽 관료가 유럽 국가들이 이제껏 지내 왔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예산 삭감과 긴축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노동 계급 투쟁이 거둔 성과와 복지국가의 기본적인 혜택이 더욱 쇠퇴함을 의미합니다. 2008년과 2012년 선거를 위한 공화당 대선 후보 지명 캠페인에서 명백해졌듯이 미국은 누가 가장 냉혹하고 가장 마초적이고 가장 현실주의적인지, 누가 의료비를 납부할 수 없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죽어 가도록 기꺼이 내버려 둘 의향이 있는지를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미국과 영국에서 겪었던 신자유주의는 거의 ‘친절하고 온화한’ 것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서 봤던 그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판본들에 도달하게 될 겁니다.

마크 피셔  맞아요, 그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냉혹한 현실주의에 대한 저 호소들은 자본주의에도 좋은 어떤 것이 있다는 믿음에 의해서만 혹은 적어도 자본주의가 가장 덜 나쁜 체계며 그 외에 다른 모든 체계는 더 나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의 ‘사실성’reality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며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하는’ 반면에 다른 체계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죠. 그러나 자본주의가 다른 대안들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식의 주장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가 다른 어떤 체계도 능가할 것이라는 승리주의적 의기양양함의 문제는 아닙니다.

조디 딘  저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수반되는 민주주의 리얼리즘이 있는지가 항상 궁금했습니다. 민주주의가 더 나은 정치를 위한 유일한 용어(민주주의가 우리가 가진 정치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는 하지만)인 것처럼 일을 진행하는 민주주의 리얼리즘 말이죠. 민주주의 리얼리즘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불가피성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행동을 개인의 행동으로 환원하고 가치 및 가치판단을 제한된 방식으로 구성하는 것을 긍정하고 뒷받침합니다. [이에 반해] 직접 행동은 특별히 수많은 사람의 활동을 조직화할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의 제약 중 얼마간을 분쇄할 수 있는 방법처럼 보입니다. 즉 다른 방식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죠.

마크 피셔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적인 것을 해석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민주주의적인 것에 대한 지배적인 모델의 한계를 폭로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접 행동을 민주주의적인 것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의회주의’의 고도로 제한된 채널들이 민주주의적으로 적절하게 확장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는 노동 운동의 쇠퇴와 더불어 의회 정치가 비즈니스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모습을 봐 왔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이른바 민주주의 체계들이 언제나 귀결하게 될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니면 민주주의의 어떤 도착perversion—말하자면 체계 자체의 측면에서는 대응할 수 없고 그 순간에 발생하는 여러 종류의 대중 행동으로만 대응할 수 있는 도착—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민주주의를 적에게 내주는 것은 전략적 실수입니다. 그러면 좌파가 전체주의의 옹호자라고 비난받기가 쉬워집니다. 제 생각에는 오직 포스트자본주의만이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리는 진보와 계몽의 편에 있지만 자본은 야만의 편에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직접 행동은 양가적입니다. 여전히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힘에 대한 증거처럼 보이는 직접 행동 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직접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비-직접 행동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치란 비-직접 행동과,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원거리 행동”action at a distance이라 부른 것과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체계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직접 행동을 취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역설은 직접 행동이 취해질 때만 체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직접 행동이 지닌 중요성의 상당 부분이 그것의 직접적인 효과 너머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직접 행동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청원이라는 양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대타자로서의 자본에 호소하는지 아니면 그러한 대타자의 부적절함을 증명해 주는지가 문제겠죠. 우리는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항 세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조디 딘  당신은 왜 공산주의가 아니라 포스트자본주의라고 말합니까? 왜 당신은 적이 우리를 비난하는 방식에 신경 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계속 비난할 겁니다. 왜 공산주의가 진보와 계몽의 편에 있다고, 공동의 자원과 책임을 향한 집합적인 접근만이 자본주의적 야만을 종식시킬 유일한 대안이라고 단언하지 않습니까?

마크 피셔  우리를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태를 손쉽게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거둔 성공 중 하나는 비자본주의적인 것을 전체주의적인 것과 결합시켰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싫으면 북한에나 가서 살아라” 같은 논점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산주의’보다 ‘포스트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수한 용어들의 자기 복제적인 잠재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한 용어가 지닌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전파할 수 있는 그것의 힘입니다. 우리는 브랜드 컨설턴트나 광고업자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산주의’ 같은 단어를 거부할 텐데, 이 단어가 뒤집어쓴 오명을 벗겨 내는 개념적 세탁 작업에 너무 많은 노력이 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우리는 이 용어를 위한 새로운 맥락을, 그것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적 성좌를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무거운 유산이 되어 버린 나쁜 연상들을 대동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와는 반대로 ‘포스트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비어 있으며, 나아가 그 내용을 채우라고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용어는 또한 원시주의의 유혹을 피해 갑니다. 우리는 전자본주의적 농경 사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어떤 것, 자본주의가 구축하고 동시에 좌절시킨 모더니티 위에서 건설할 수 있는 어떤 것의 출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이 용어를 선호하는 또 다른 까닭은 그 용어가 우리의 승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자본주의가 무엇일지 묻는 일은 우리가 승리했을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1]  이 대담은 Jodi Dean and Mark Fisher, “We Can’t Afford to Be Realists: A Conversation”, Alison Shonkwiler and Leigh Claire La Berge eds., Reading Capitalist Realism, University of Iowa Press, 2014, pp.26~38을 옮긴 것이다. 조디 딘은 뉴욕주에 있는 호바트 앤드 윌리엄 스미스 대학교에서 정치 및 미디어 이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민주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환상들»Democracy and Other Neoliberal Fantasies, 2009, «블로그 이론»Blog Theory, 2010, «공산주의적 지평»The Communist Horizon, 2012, «군중과 당»Crowds and Party, 2016 등의 저작을 발표했다.
[2]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과거에 중독된 대중문화»(개정판), 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7.
[3]  Jodi Dean, Blog Theory: Feedback and Capture in the Circuits of Drive, Polity, 2010.
[4]  Dean, The Communist Horizon, Verso, 2012.
[5]  Fredric Jameson, Valences of the Dialectic, Verso, 2010.
[6]  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김성호 옮김, 창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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