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심문하기: 마크 피셔 인터뷰

마크 피셔가 2009년 12월에 «먼슬리리뷰 진» 지면에서 매슈 풀러와 가졌던 인터뷰를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원문은 https://goo.gl/WaQqrT). 여기서 두 사람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강조했던 교육을 포함한 공공서비스의 시장화, 대타자와 권위, 관료주의, 유효한 정치 투쟁의 가능성 등의 사안을 다시 한 번 토론하고 논의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주장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께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고 더 활발한 논의가 벌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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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심문하기
: 마크 피셔 인터뷰

2009년 12월 27일 | 매슈 풀러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옮김

마크 피셔는 최근 제로북스에서 출간한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의 지은이다. K-Punk라는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유럽의 해안에서 외떨어진 작은 섬[영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동시대 정치를 매우 예리하게 진단한다. 이 책은 만물의 시장화, 스트레스의 개인화, 주된 통치 원리로 기능하는 우둔한 관료제 지상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 다음 새로운 정치‧문화 형식을 가늠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육, 영화, 사회주의를 논하고, 품질 관리 메커니즘의 필연적인 어리석음을 생생하게 논증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몇몇 주제를 따라 가는 이 인터뷰는 2009년 12월 둘째 주에 이메일로 진행됐다.

매슈 풀러  당신이 구축한 형상 중 제가 특히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건 비즈니스 존재론이라는 발상입니다. 책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죠. 이 존재론을 존재론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 방식과 컴퓨터 존재론에서 볼 수 있는 관계들의 질서에 대한 한층 기술적인 묘사를 결합한 무엇이라고 상상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전자가 후자로 평면화된 거죠.

마크 피셔  음, ‘비즈니스 존재론’이라는 발상을 아주 정교하게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이 개념이 어떻게 컴퓨터 존재론과 연결될 수 있는지 더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제가 생각한 비즈니스 존재론은 단순히 모든 것이 하나의 비즈니스 현실 체계 내부로 접혀 들어간다는 것이었어요. 이 존재론에선 모든 목표와 목적이 비즈니스 관점으로 번역될 수 있죠. 문제는 비즈니스 존재론에 ‘공적인 것’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위한 자리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지금은 공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재창안해야 할 시점입니다. 공공서비스 부문의 노동자들은 비즈니스 모델을 따르는 이해관계나 방법을 몰아내야 해요. 신용 위기 전까지 우리는 비즈니스 피플이 어떻든 나머지 우리보다는 현실을 더 잘 관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용 위기 이후엔 그런 생각을 옹호할 수 없게 됐죠. 제가 책에서 말했듯 비즈니스조차 비즈니스로 운영될 수 없는 마당에 대체 왜 공공서비스가 비즈니스가 되어야 하는 걸까요?

매슈 풀러  당신의 설명에 따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교육에서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의사pseudo 시장이 도입되어 어마어마한 구조조정이 시행되는 동시에 끝없는 감사audit와 경쟁에 따른 극심한 압력에 시달리는 영역이죠.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삶의 형태와 기회는 정신적 충격을 야기할 만큼 극도로 축소되어 있는데, 교육은 이처럼 냉정하고 어리석은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은신처 중 하나를 제공합니다. 이렇게 이해된 교육은 사회의 수많은 문제를 완화하리라는 기대를 받죠. 교육이 더는 극도의 편협함으로 욕망을 억압하지 않지만, 어리석음을 양산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계속 붙잡고 있기만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크 피셔 맞습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겨우 감지되는 수준의 영역들―예를 들어 공공서비스―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비즈니스의 명령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영역이죠. 반면 다른 곳들은 여러 면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기정사실로 여깁니다! 그런데 ‘의사 시장화’라는 표현이 결정적이에요. 우리가 공공서비스 영역에서 보고 있는 건 시장으로서의 시장이 아니라 시장 메커니즘의 우스꽝스러운 모사simulation거든요. 이건 최악의 상황이에요. 시장의 모사물이 국가의 지속적인 감시 및 관찰과 병존하고 있으니까요(그와 동시에 시장을 악마화하지 않는 것 혹은 자신을 시장화와 동일시하는 자본주의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자본주의가 실제론 반反시장이라는 마누엘 데란다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런 사고방식이 커다란 정치적 잠재력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온전히 저 스스로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왜 우리가 여전히 점검 체제나 실적표 등을 필요로 하겠어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관료제가 축소되었다고 우리가 믿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실은 단순히 형태가 변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교사나 강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관료제적 요식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업무는 ‘필수적’이지도 ‘성과를 증진’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런 요식 업무는 순수하게 텅 빈 활동, 케케묵은 의례입니다. 좋게 보면 무용하고 나쁘게 보면 정말로 생산을 저해하죠. 제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뜻하는 바는 부분적으로 이런 메커니즘들―이처럼 의례화된 층위에서 이데올로기적 순응을 보증하는 것이 그것들의 진짜 중요성일 수도 있을―이 부과되고 노동자들(과 관리자들)이 그것을 수용하는 상황입니다. 노동자들은 이 메커니즘을 따르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을 여전히 종종 교육을 상아탑이라 생각합니다. 교사와 강사조차 그래요. 한때 저는 연장 교육 대학에서 강의했는데 그곳 경영진은 비즈니스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대학에서 일하는 이들은 이렇게 주장할지도 모르겠네요. 자기는 어찌 됐든 운이 좋아 서로 먹고 먹히는 비즈니스 세계(실적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해고당하는)에서 벗어나 있다고요. 이건 우스운 주장이에요. 은행 긴급 구제 이후에는 특히나 부조리한 주장이 되었죠. 은행 긴급 구제는 교육이 상아탑 본연의 공공서비스가 아니라 거대 비즈니스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교육은 재앙에 가까운 수준으로 제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처벌받기는커녕 계속해서 재정 지원을 받는 영역이에요. 만약 그쪽 사람들이 해고당한다면 이들은 후한 퇴직금을 챙길 겁니다.
교육은 상아탑과는 거리가 멀며 지난 30년간 일어난 모든 사회 변화의 핵심에 있었습니다. 부모들이 과도한 노동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가족이 와해되면서(그런데 이 순간에도 가족은 고도의 정상성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교육은 점점 더 사회화와 사목적 돌봄의 임무를 떠맡으라고, 아직 초기 단계인 불만―확실히 정치의 차원에선 표현되고 있지 않은―을 억제하고 관리하라고 요구받고 있습니다. 16세 이후의 교육 과정은 거대하게 팽창했으나 자원은 그에 비례해 증대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강사들이 상대해야 하는 건 정말로 학문에 매진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어 학교에 남아 있는 점점 더 많은 학생입니다. 교사나 강사는 자신들이 불가능한 위치에 붙들려 있다고 느낍니다. 권위자라는 훈육적 역할과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 제공자’라는 역할 모두를 끝없이 충족시켜야 하니까요.

매슈 풀러  이런 상황에서 시장의 명령(자유 경쟁과 합리적 행위자의 선택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과부하 상태의 제도들의 용어로 번역되고 거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 부를 만한 것들 대부분을 제공하는 국가에 의해 매개되는데, 이는 상황에 대한 이해―전치되고 위장되어 있으며 해결할 수 없는―를 개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 변화가 개인들을 미치게 만들죠.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상황에서 지식은 질병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중심에는 스트레스의 개인화가 있습니다. 과부하 상태의 제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스트레스’로 고통스러워하면 업무량에 불평하지 말고 업무 감사를 받으라고 권고가 내려집니다. 감사가 노동자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첫째 원인인데도요. “일의 어떤 점 때문에 아프게 된 거죠?”라는 질문은 더 이상 제기되지 않습니다.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당신의 문제는 뭐죠?”라고 묻죠. 스트레스에 대한 개인적-치료적 모델은 스트레스의 발생 원인을 구조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도록 막습니다. 정신 질환을 뇌의 화학적 불균형으로 이해하는 정신의학 경향이 이를 강화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는 스트레스를 순순하게 사적인 사안으로 만들죠.
교육 문제로 돌아가면 우리는 우울한 학생들을 마주한 우울한 강사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이런 우울은 많은 부분 정치가 실패한 징후죠. 불만과 적개심이 배출구를 찾지 못해 내면화되고 애초에 이런 불만과 적개심을 일으켰던 바로 그 조건들을 강화하게 됩니다. 특별히 악순환인 거죠.

매슈 풀러  이를 고려할 때 ‘교육받고 있지도 않고 취업해 있지도 않으며 직업 훈련 상태에 있지도 않은’ 청년들에 관한 최근의 도덕적 공황 상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마크 피셔  그런 개인들은 ‘통제 사회’의 회로 바깥에 있는 듯 보일 겁니다. 하지만 구조적 실업이 오랫동안 후기 자본주의에 본질적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와 동시에 ‘교육, 취업, 직업 훈련’의 여러 형태가 단순히 실업이 위장된 형태며, 청년들을 부채에 빠뜨리고 그리고/또는 공식적으로는 실업 상태가 아니게 만드는 수단인 것도 분명합니다.

매슈 풀러  이 책의 흥미로운 하위 서사는 사회적‧문화적‧정치적‧경제적 권위의 변이와 이동을 추적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권위는 때로는 저항해야 하는 것이고 또 때로는 확보하거나 창안해야 하는 것일까요?

마크 피셔  저는 우리가 권위와 권위주의의 대립을 통해 사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8 이후의 좌파 다수는 권위와 권위주의를 동의어로 여겼지만 지금 우리가 여러 면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권위의 표준적 형식들이 해체되는 동시에 관료주의적 권위주의의 지배가 만연한 현실입니다. 옛 노동 패턴에 향수를 느껴선 안 되듯 옛 권위 형식에도 향수를 느껴선 안 됩니다. 하지만 모종의 권위 구조 없이는 문화와 정치가 전개될 수 없음도 분명합니다. 저는 대타자가 필연적인 사회적 허구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주장이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가 대타자에 가한 공격―‘사회 같은 건 없다’ 등등―은 대타자를 제거하지도 못했고 변화시키거나 위장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날 대타자는 무엇보다 관료주의와 홍보를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대타자가 필요할지, 평등주의적인 목표들을 침식하는 것이 아니라 활성화할 수 있는 권위 및 제도적 구조가 무엇일지 사고할 때입니다.

매슈 풀러  저는 지젝이 보호 명목으로 돈을 갈취하는 폭력단의 행위와 비슷한 무언가를 옹호하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보다 신의 죽음이 인간에게 최대치의 공포를 야기했다는, 자기 인식의 가능성이 그 공포를 야기했다는 니체의 관찰을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공통성을 활성화하는 수단으로 신, 스탈린 혹은 여타 대타자를 창안하는 것은 영국이 케케묵은 ‘블리츠 정신’Blitz Spirit[나치의 대공습에도 공포와 좌절을 이겨 낸 영국의 공동체 정신]을 갱신해야 한다고 끝없이 목청을 높이는 태도와 유사하지 않나요? 평등주의적인 것은 언제나 외부의 전능자를 내포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런 전능자를 상기시킬지 모르지만 그것에 의존하지는 않는 척도를 확보해야 하는 걸까요?

마크 피셔  지젝이 대타자 논의에서 끌어내는 정치적 결론들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는 그의 결론들이 무엇인지 혹은 우리가 그것들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지가 아주 명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타자를 단순히 제거할 순 없다는 생각은 정확하다고 봐요. 대타자는 필연적이에요. 모든 사회 집단이 전제하고 또 그 집단들에 전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당신이 니체를 언급한 것이 매우 적절해 보이지만, 그렇더라도 니체가 제시한 신의 죽음 테제에 대한 라캉적 비판은 절대적으로 근본적이라 생각합니다. 신이 정확히 죽은 채로 존속한다는 테제 말이죠. 이와 동일하게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경험적 사실성 층위에서)이 대타자가 유효한 잠재성으로 기능하는 것을 막지는 않습니다. 역으로 경험적 비실존 덕분에 대타자가 기능할 수 있는 거니까요.
대타자의 비실존을 직접적으로 단언하는 사람은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의 위치에 서게 됩니다. 현실을 구조화하는 상징적 허구의 실존을 부인하는 ‘바보’의 위치 말이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언급했듯 대타자의 힘을 과소평가한 인물로 제럴드 래트너를 들 수 있습니다. 래트너는 본인이 자기 보석 매장들에서 쓰레기 같은 보석들을 판다고 말했을 뿐이며 그 말은 아무 효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는 걸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대타자는 그 사실을 몰랐고 다들 알고 있듯 그 뒤 래트너의 사업은 파국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자본주의적 대타자는 경험적인 개인들은 누구도 믿지 않을 때조차 기업 광고와 홍보를 믿는다고 간주되는 가상의 존재입니다. 저는 좌파가 경험적 현실을 초과하는 ‘상징적 허구’라는 관념, 실제의 개인은 아닌 어떤 대타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 이는 대타자가 ‘사회 같은 건 없다’는 대처리즘의 주장에 일정한 대안들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좌파가 대타자를 탈인격화 혹은 ‘비인격화’하지 못한 탓에 실패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대타자를 경험적 개인에게 직접 구현하려는 지속적인 경향을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같은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죠. 대타자가 ‘빅 대디’가 돼선 안 됩니다. 좌파 대타자는 공공서비스가 봉사해야 하는 무언가일 겁니다. 개인화된 ‘소비자’가 아니라 낡은 듯 보이는 용어를 사용하면 ‘공익’ 말이죠. 이것이 루소의 ‘일반의지’가 뜻하는 바입니다. 개별 의지의 총합이 아니라 특정한 추상 수준에서만 실존할 수 있는 무언가 말이에요. 그런데 일반의지가 유효한 추상으로 기능하려면 특정한 제도적 대리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대타자 자체와 조우할 순 없으며 그 대리물만을 조우할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해요. 우리에겐 일반의지의 대리물이 필요합니다. 집합적 이해관계를 대표할 대리 기관들이 말이죠. 노동조합이 목표를 변경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명확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자생성 등등에 대한 온갖 믿음 때문에) 것을 진술하려면 조직과 제도를 진지하게 취급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과 관련해 제가 주장하고 싶은 바는 68 이후 사유의 특정 가닥이 효과 면에서 완전히 재난에 가까웠다는 겁니다. 제도‧조직에 대한 68 이후의 포스트구조주의적 회의주의는 스탈린주의가 분명하고 현재적인 위험인 양 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제도와 조직을 진지하게 취급한 우파(비록 이들이 ‘공식적으론’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라는 미명하에 이것들을 몰아냈지만)에게만 득이 됐죠. 우파는 제 의제를 앞세워 제도들을 장악하고 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건 대항 서사를 부과할 수 있는 그 어떤 조직적인 대립도 맞닥뜨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디 딘의 책 «민주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환상들»은 좌파가 어떻게 조직화를 멀리했으며 확고한 강령을 부과하기를 주저했는지를 훌륭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조디가 주장하듯 우파는 민주주의의 개방성을 도구화해 자신의 강령을 부과했습니다. 반면 좌파는 너무나 자주 개방성을 가치 자체로 받아들였죠. 제 생각엔 그 어떤 확고한 정치 강령도 ‘억압적’이거나 스탈린주의적이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것이 결정적입니다. 또 거리에서 투쟁하는 이들이 ‘정치적’이라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도 긴요합니다. 40년 전에 68에 참여했던 이들에게는 당시의 사건들이 좋아 보이겠지만 그것은 정치적 실패며, 좌파는 실패의 로맨스를 끝내고 다시 한 번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매슈 풀러  앞서 논의한 논점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영국에서 교육이나 건강 같은 공공서비스의 감사화는 노동당 집권기에 정착됐고, 수사적으로 보면 사회주의의 기괴한 침전물과 기독교(여타 요소가 섞인)의 결합으로 구성됐습니다. 통치 양식은 갈수록 더 통계가 강요한 평균의 지배로 이동했는데, 평균의 지배는 균등함, 심지어는 평등주의라고 선포된 것을 달성하는 수단이죠. 하지만 실제로 이는 강제적인 미디오크러시mediocracy[평범한 사람들의 지배]에 따른 평면화였고, 자연스럽게 체계를 ‘오용’하거나 체계에 기생하는 이들에게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당신은 체계의 실패를 책임 지울 수 있는 수단을 요청합니다. 감사 문화도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죠. 이 문화는 모든 인구 성원이 실패하거나 부정행위를 저지를 것이라 전제하며, 우리의 잘못을 들춰내려 합니다. 어떻게 하면 체계가 책임을 지게 만들 수 있을까요?

마크 피셔  저는 감사 문화가, 적어도 제가 말하고 있는 감사 문화가 체계적 실패를 책임지게 만들 의도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와 반대로 감사 문화는 그 자체로 책임을 질 수 없는 체계의 실패입니다. 요는 그것이 실패와 부정행위를 전제할 뿐 아니라 실제로는 그것들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감사―실적 평가 따위의―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체계에 관한 그 어떤 질문도 막습니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런 식의 관료주의는 무용할 뿐 아니라 정말이지 엄청난 시간 낭비입니다. 막대한 ‘데이터’가 수집되지만 그것이 감시한다고 여겨지는 그 어떤 업무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전혀 주지 못합니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누구도 감사 데이터를 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집합적 이해관계를 위해 행동하는 대리 기관들이 책임을 지는 전체 체계입니다. 이렇게 보면 노동조합들이 결정적입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노조들의 목표와 전술을 재조정해야 하며, 바로 이곳이 싸움을 벌여야 하는 영역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한층 전체적인 수준에서 저는 자본의 고삐를 죌 규제 기관을 상상하고 창안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은 그런 기관을 상상하기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은행 위기 이래 자본주의가 지난 30년간 취해 온 형식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른바 현 상황까지 포함해서요.

매슈 풀러  당신은 공공서비스 부문의 파업이 자기 패배적인 전술이라 주장합니다. 확실히 우리는 성적 입력 거부, 점거, 감사 업무 반대, 대학의 개방이나 의료 서비스 지원, ‘소비자’로 재정립된 시민들의 집단적 불매 운동 등을 대안적인 해결책으로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역겨운 ‘점수 기반 이민 허가 체계’를 빌미로 국경 당국이 학생들의 정보를 수집하려 하자 대학들의 교직원이 그것을 거부한 운동이 그런 사례죠. 그 외에 다른 ‘생산적인’ 저항 형태나 정치적 행동 형태 중 무엇이 효과적이거나 현재의 상황에서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그것들을 평가하는 주된 기준은 무엇이라 보시나요?

마크 피셔  파업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일 파업은 반생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일 파업은 공중을 소외시키며 파업 참여자들을 빈곤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관리에는 매우 제한된 불편만을 야기하죠(어느 경우든 이는 종종 임금 지출을 절약해 줍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일터 자체에서 지속 가능한 적대입니다. 관리주의자들에게 청원해선 안 됩니다. 이들의 무용함을 입증해야 해요. 노동자들, 특히 공공서비스 부문의 노동자들이 점점 더 심한 압력에 시달릴 때, 바로 그 순간이 그로부터 벗어나 명백한 사실을 발언할 때입니다. 비생산적인 기생체는 노동자가 아니라 관리주의자라고 말이에요. 70년대에 확립된 선전 구호를 뒤집을 시간입니다. 그땐 우파들이 공공 서비스 노동자 다섯 명분의 일을 한 명이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곤 했죠. 지금은 다섯 명의 컨설턴트가 하는 일이라곤 없다고 주장할 때입니다. 많은 조직이 임금은 과도하게 높지만 서비스 제공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관리자층을 제거할 수 있었다는 걸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효율성’을 증대하려면 노동자를 잘라야 한다는 생각이 지혜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실제론 관리자 수를 줄이면 훨씬 더 효율적일 거예요. 은행가와 하원의원 들이 지출한 경비에 관한 포퓰리즘적 격분은 분위기가 변했음을 시사합니다. 대중매체들조차 이 변화를 이용할 수 있었죠. 격렬한 선전 전투를 치러야 합니다. 관리주의자들을 위한 파티를 끝내야 하지만 누구도 순순히 부와 권력을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강제로 이들에게서 부와 권력을 빼앗아 와야 해요. 한 층위에서 이는 단순히 행동심리학의 문제입니다. 중간 관리자와 정치인은 복고restoration라는 의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자신에게 기대는 하나의 압력 집단(조직된 슈퍼 부자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들에겐 그게 가장 쉬운 길이에요. 하지만 만약 아래에서 위를 향해 압력을 가할 수 있다면 ‘현실’을 바꾸게 될 겁니다.
당신의 질문에 더 구체적으로 답해 보겠습니다. 지금은 한층 대담해질 시기입니다. 교사와 강사는 교육의 통제를 둘러싼 싸움을 밀어붙여야 합니다. 점검 혹은 감사 체제를 완전히 거부하는 건 어떨까요? 물론 그런 캠페인은 적절한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노동조합이 관여해야겠죠.
제 생각에는 대학 점거도 긍정적인 또 하나의 경향입니다. 엄포를 늘어놓지만 무기력할 따름인 ‘자본주의에 저항하자’와 달리 이런 점거에는 확실히 정의된 분명한 목표들―학비 감축 등의―이 있어요. 그런데 이런 목표들은 훨씬 더 광범위한 함의를 지닙니다. 온갖 종류의 예측 불가한 방식으로 폭발할 수 있는 함의들을요.

매슈 풀러  당신이 제안한 또 다른 활동 형태는 문화적 진지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여러 사례가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감독 애덤 커티스의 작업이죠. 그런데 커티스는 블로그들을 상호 수동성과 동일화하는 손쉬운 덫에 걸려 버렸습니다. 당신의 블로그 K-Punk는 당신이 음악이나 다른 영역을 대상으로 그런 발상을 밀어붙이는 또 하나의 공간입니다. 당신을 비롯해 여러 블로그가 대담하고 체계적인 사고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외에 내실을 갖추고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대항을 촉진하고 있는 또 다른 경향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마크 피셔  제 블로그가 중요하다면 그건 혼자서 영웅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네트워크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버공간의 여러 영역을 과거의 미디어나 교육 제도 부문과 연결하는 네트워크 말이죠.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출간했고 저도 편집 위원으로 관여 중인 제로북스는 이 생태계의 핵심 부분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오언 해덜리, 니나 파워, 도미니크 폭스 같은 네트워트 일원의 책을 여기서 펴냈죠. 이 네트워크와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하나의 유사 공간para-space을 구성했다는 점입니다. 이 네트워크는 미디어나 음악 비평, 학계에 속하지 않지만 그것들 사이의 공간에서 작동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건 영국의 아트 스쿨, 음악 잡지, 공영 방송에서 존재했던 유사 공간을 재수립한 거예요. 저나 사이먼 레이놀즈 같은 이가 ‘유령론’이라 불렀던 문화적 감성 역시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한 부분입니다. 부분적으로 그 감성이 과거 유사 공간들의 유령을 환기하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고스트박스Ghost Box 같은 레이블은 제가 전후 영국의 공적 공간을 다시 꿈꾸기라 일컬었던 것을 제공하고 있어요. 단순히 향수에 젖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잃어버린 미래를 재발견하기를 요청하면서요. 제가 보기엔 단연 지난 십 년을 대표하는 뮤지션인 베리얼Burial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생산한 실의를 기록하는 동시에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침식한 집합적 엑스터시를 상기시키는 두 장의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올해 채널 4에서 멋지게 각색하기도 한 데이비드 피스의 소설 역시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대안으로 기능하고 있어요. 여러 면에서 이런 작품들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역사적 전개가 낳은 산물이지만, 아니 그 산물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거죠. 신자유주의의 몰락과 더불어―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완전히 죽지는 않은 관성 때문에 여전히 정치 문화를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몰락했습니다―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더 큰 압력이 행사되기를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30년간의 현실 체계가 막 붕괴했고, 우리는 일종의 현실 부재 시기 와중에 있어요. 1929년의 대공황 이후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죠. 그렇기 때문에 [현재]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세력이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데올로기적 잔해가 흩뿌려져 있는 거기서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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