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 디자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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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커버)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영국의 문화 비평가 마크 피셔의 첫 책으로 자본주의의 실패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읽기 전엔 자본주의나 대안 어쩌구 하는 딱딱한 표현들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뛰어난 문화 비평가로 소문난 지은이의 글답게 논의를 영화나 음악 등 대중적인 소재들과 잘 엮어놓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른 학술서들에 비해 내용이 어렵지 않고 또 문장력도 더없이 훌륭하게 느껴졌는데, 지은이가 분명 마음 따뜻한 사람일 거라 확신하게 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고 곳곳에서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표현을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나는 이 책을 아주 감정적으로 읽고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피셔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재작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이 책은 떠올리면 가슴 한 켠이 저린, 아픈 손가락 같은 텍스트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해당 작품을 찾아보곤 했는데 이것도 재밌고 유익한 경험이었다. 첫 장은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배경을 묘사하면서 시작하는데, 아주 강렬하고 매력적인 도입부라는 인상을 받았다. 덕분에 <칠드런 오브 맨>과 <자본주의 리얼리즘> 텍스트를 함께 감상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누군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을 계획이라면 그 전에 꼭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보라고, 이 책 서두의 매력을 마음껏 누리라고 얘기하고 싶다…!)

상상력과 견문이 부족한 탓에 처음 이 책의 원고를 읽었을 때는 추상적이고 어두컴컴한, 그러면서 디지털스러운 느낌으로 찢어지고 깨져 있는, 그런 와중에 희망적인 기운도 풍기는(…) 그런 막연하고 파편적인 이미지들만 떠올랐다. 구체적인 컨셉을 정하지 못해 작업에 돌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작업 도중에도 뻔하거나 매력 없는 결과물들만 이어져 고생도 많이 했다. 그렇게 시행착오가 쌓여 가던 중에 우연히 아주 마음에 드는 일러스트를 발견했다! 우주 공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과 기계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보자마자 대안적인 세계를 상상하는 책의 내용과 꽤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귀여운 그림체가 책의 어조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도 재밌는 결과물로 나올 수도 있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일러스트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커버를 제작하기로 마음먹었다(또 정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표지가 아니라 꼭 ‘커버’에 이 그림을 싣고 싶었다).

한편으론 표지에 이 일러스트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 확신이 서지 않아 망설여지기도 했다. 이 책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우주 공간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자칫 생뚱맞아 보이거나 단순히 ‘예쁜’ 그림을 가져다 쓴 것처럼 비칠 수도 있겠다 싶어서였다. 다른 한편, 이 일러스트는 1965년 구소련에서 출간된 파벨 클루샨체프Pavel Klushantsev의 어린이용 그림책 <‘달’ 정거장>Stantsiia ‘Luna’에 수록된 그림이다. 자본주의 사회뿐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우주에 대한 상상력을 펼치고 있었고, 나(와 우리)는 잘 모르지만 많은 SF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상상한 우주와 SF는 자본주의의 상상과 얼마나 비슷하고 또 달랐을까? 마크 피셔는 현실 사회주의를 많이 그리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몇몇 측면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대안의 가능성을 제시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더불어 ‘어린이용 그림책’이야말로 새로운 상상력을 북돋아 줘야 하는 임무가 있는 영역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이 일러스트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언급되지는 않더라도 이 책의 메시지를 다르게 표현하기에 꽤나 적절한 듯이 보였고, 마음속의 불안감도 얼마간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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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속표지

커버는 섬유와 비슷한 결을 가진 레자크지에 인쇄했다. 왜 그러고 싶었는지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처음부터 이 종이가 잘 어울릴 거라는 직감이 왔다. 그리고 속표지에는 처음 구상했던 어둡고 추상적인, 그러면서도 약간의 빛이 비치는 느낌을 최대한 단순한 형식으로 디자인했다. 커버와 속표지가 디자인 형식 면에서도, 분위기 면에서도 매우 대조적인데, 우리는 이 대비가 <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 디자인의 최고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독자들이 이 구성과 커버 이미지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었고, 책의 내용을 전달하는 데 실패한 디자인이라는 혹평을 받을까 봐 출간되기 직전까지도 계속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책이 나온 후 옮긴이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독자께서 표지가 마음에 든다는 얘기를 들려 주셨다. 표지를 구상하고 디자인하면서 우리가 의도했던 바를 표지 이미지 자체가 온전히 전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의 여지를 조금이나마 남겨 둔 표지를 만들었다는 것이 즐겁고 디자인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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