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화하는 사회»의 2장 ‹이야기 노동론› 일부를 공유합니다. 이 책의 기본 문제 의식과 사회의 감정화를 초래한 동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지은이는 인터넷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무상 노동 문제를 다룹니다. 플랫폼이 내세우는 소위 ‘공유 경제’ 노동자들의 처우가 얼마 전부터 사회 문제로 대두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은이는 이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를 포함하면서도 구분되는 ‘새로운 노동 문제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인터넷 플랫폼은 흔히 개방된 ‘자기 표현’의 장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콘텐츠 게시라는 우리의 무상 노동을 통해 수익을 얻는 비즈니스 모델로 운영됩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소비 행위 및 우리의 감정 표현 자체가 자본에 의해 무상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의 자기 표현은 자유와 기회뿐 아니라 억압으로도 작용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말할 거리가 없을 때도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그렇기에 인터넷상의 ‘자기 표출’은 “지극히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로 귀결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윤으로 회수하는 것은 인터넷 플랫폼 자본입니다.
1989년 지은이는 일본 서브컬처 비평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이야기 소비론»을 발표해 ‘창작하는 소비자’의 등장이라는 사회 현상을 선구적으로 짚어 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소비자들의 ‘창작’이 일종의 무상 노동 콘텐츠가 되는 사회적 체제가 성립하리라는 것은 예감하지 못했습니다. «감정화하는 사회»는 변화된 사회에 대한 진단인 동시에 자신의 과거 입장을 반성하고 극복하려는 시도입니다. 아래 발췌한 <이야기 노동론>을 읽으면 현재를 설명하고 비판할 언어를 모색하는 지은이의 절박함을 뚜렷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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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과 무상 노동
인터넷, 그중에서도 플랫폼이 사람의 행동 자체를 ‘노동’으로 착취하는 구조라는 이야기는 2000년대에 접어들어, 예컨대 북미에서 AOL 채팅에 취미로 참가하는 행위가 기실 ‘무상 노동’이라는 논의가 일어나면서 퍼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본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2채널’에 자발적으로 쓰인 글들은 동시에 그것을 콘텐츠로 열람하려는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그런 2채널의 창시자가 같은 기획을 ‘동영상’ 분야로 옮겨 놓은(그런 속설이 떠돈다) ‘니코니코동화’는 플랫폼이라는 명목하에 ‘개방된 투고의 장場’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유저에게 무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게 하는 동시에 그 콘텐츠를 보러 오는 열람자에게 ‘회비’(그 실상은 콘텐츠에 대한 대가)를 받아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이다. 또 한편 무상 투고 사이트 대부분의 비즈니스 모델은 ‘광고’ 수익을 중심으로 한다. 이는 구미디어의 수익 모델과 ‘무상 노동 창작자가 만든 콘텐츠’를 접속시킨 것인데, 동시에 콘텐츠 제작에 대한 대가를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픽시브 및 ‘소설가가 되자’ 등의 창작 투고 사이트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자발적 운영인지 기업 주도인지와는 별개로 ‘투고’라는 무상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콘텐츠가 낳는 수익을 플랫폼이 챙기는 생태계는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저작권을 관리하는 운영자 측에서 직접 2차 창작을 투고받는 KADOKAWA형 생태계 역시 그중 한 유형일 뿐이다.
그나마 ‘만화’나 ‘소설’ 혹은 ‘동영상’ 등과 같이 외견상 제작 콘텐츠에 가까운 것들은 그래도 그 콘텐츠 제작이 ‘노동’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저작권은 작가에게 귀속된다는 ‘근대’의 규범이, 유튜브나 니코니코동화로 하여금 투고자에게 제한적으로나마 이익을 배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억압’으로 간신히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투고자에게 재생 횟수에 따라 로열티를 지급하다가는 플랫폼이 파탄 날 것이 분명하다. 엄밀히 말해 지급 자체는 가능하겠으나, 인터넷 기업들은 무상 노동으로 발생한 ‘제작자들에게 환원되지 않는 잉여’로 투자와 인수・합병을 행하며 기업 규모를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극히 교과서적인 ‘자본의 노동자 착취’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현 시점에서 플랫폼의 존속과 팽창에는 무상 콘텐츠 투고가 필수라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무상 노동’에 의한 플랫폼상의 콘텐츠 제작은 물론 ‘창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비평’ 역시도 마찬가지다. ‘타베로그’[일본의 음식점 정보 사이트]의 투고, 아마존의 리뷰, 야후 뉴스의 댓글 등은 전부 일종의 ‘비평’인 셈이고 이들 플랫폼에서는 콘텐츠의 일부다. 당연히 이것들도 전부 무상으로 투고되고 있다. 일례로 수준 높은 저널리즘을 제공한다고 알려진 북미의 거대 뉴스 사이트 『미디엄』조차 투고 칼럼의 ‘무상 사용권’을 플랫폼 측이 갖게 되어 있다.
또한 개인이 운영하는 사이트 중에는 인터넷 광고로 수입을 얻는 곳이 적지 않은데, 자작 콘텐츠가 아니라 2채널 게시물이나(그 때문에 2채널 운영자와 마찰이 생기기도 한다) 트위터의 트윗을 무상 콘텐츠처럼 가져다 쓰는 ‘마토메[정리] 사이트’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처럼 인터넷에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콘텐츠 생산을 무상 노동에 의존하는 일이 지극히 일반적이다.
무상 노동 ‘콘텐츠’ 중에는 ‘사회적 일탈 행위의 콘텐츠화’라는 양태를 띠는 것도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아르바이트생이 가게 냉장고에서 장난치는 모습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다가 염상炎上이 일어났던 사건도 수준이 낮다는 점을 차치하면 일찍이 현대 미술에서 유행한 ‘퍼포먼스’의 지극히 퇴화된 버전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지메’나 공갈 등 범죄를 저지른 본인이 직접 동영상 사이트에 투고하는 ‘범죄의 콘텐츠화’ 사례도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현대 미술’에는 실제로 이런 수준의 아트가 적지 않다(예를 들어 최근 미술관에 출장 마사지 여성을 호출해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아트’를 계획해 물의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그리고 그렇게 염상이 일어난 트윗이나 게시물이 ‘마토메 사이트’ 등을 통해 간단히 콘텐츠화되는 것이다.
즉 인터넷에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투고’ 행위 자체가 그 내용의 수준을 떠나 ‘콘텐츠’의 창출이기는 하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만 한다. 여기서 굳이 ‘콘텐츠’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투고자’ 이외의 누군가를 위한 경제적 가치를 낳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무상으로 노동하는 것일까. 근대 일본에서 문예지가 결국 ‘투고 미디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표현’은 근대적 자아와 한 몸이다. 인터넷은 작가라는 특권 계급만이 아니라 만인에게 자기 표현의 기회를 개방했다. 문학가나 예술가 쪽에서 자신을 인터넷 투고자와 똑같이 취급하지 말라고 한다면 ‘자기 표현’이라는 말을 ‘자기 표출’로 바꾸어도 상관없다. 그래 봤자 본질은 동일하다. 자기 표출의 민주화는 동시에 자기 표출을 고스란히 무상 노동에 의한 콘텐츠 제작으로 전환시키는 플랫폼이 성립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만큼 ‘나’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강력하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콘텐츠’가 무상 노동에 의존하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파생된다. 하나는 ‘콘텐츠’ 자체의 무상화・저가격화라는 ‘억압’(라인에서 음원을 시험 기간 동안 무상 제공하다가 유료화한 순간 일부 유저의 빈축을 샀던 것처럼)이고, 또 하나는 크라우드 워커crowd worker 등으로 불리는 인터넷 블랙 기업 노동자를 낳게 되는 ‘인터넷 노동 문제’다.
인터넷에는 소위 ‘상업성’을 배격한다며 창작 행위나 활동에서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무상 봉사의 미덕이 존재한다. 이런 미덕 뒤에는 숭고한 예술과 표현을 위해 창작자는 청빈을 지켜야 한다는, 그야말로 근대 문학과 예술이 낳은 ‘판타지’가 작용하고 있다. 그 미덕이 기묘한 윤리와도 같이 인터넷에 도입될 때 무상 노동은 ‘예술’과 ‘문학’이라는 ‘신’이 아니라 플랫폼 기업에 봉사하도록 강제된다. 블랙 기업이 숭고한 이념을 내걸고 그에 대한 충성심을 노동의 동기로 뒤바꾸려고 하는 것과 똑같지 않은가. 이는 자원 봉사나 NGO의 ‘노동’에도 내포되어 있는 문제다.
더불어 문예지가 사라져도 ‘순문학’이 ‘문학’이라는 ‘신’을 위해 무상으로 소설을 계속 쓸 수 있겠느냐가 「불량 채권으로서의 ‘문학’」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유미리의 원고료 미수령 문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직접적 답변으로 여겨졌다. ‘무상’으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투고 플랫폼’으로 이행되어 버린 ‘출판’ 생태계는 ‘문학’이라는 기득권 집단을 더 이상 기생시켜 줄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의 무상 노동이 이미 이런 콘텐츠 제작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짚어 두고자 한다. ‘자기 표출’의 테크닉이나 깊이와 무관하게 지금은 인터넷에 무언가를 투고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무상 노동 콘텐츠가 되어 버린다. 즉 우리는 ‘일상적 행동 그 자체가 콘텐츠화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인터넷에서의 일상적 행동을 굳이 콘텐츠화하지 않더라도 이미 ‘노동’ 아니냐고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플랫폼에 참가할 때 제공하도록 요구받는 개인 정보 또는 유저가 인터넷에서 행동함으로써 플랫폼이 수집하게 되는 데이터는 효과적인 광고 판매 도구로서 ‘가치’를 갖기에 그 자체 ‘빅데이터’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광고주에게 판매된다. 즉 인터넷에서의 행동이 가치를 낳으므로 ‘노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광고 대행사 등이 시행하는 대면형 마케팅 조사에 협력하면 형식적으로나마 참가자에게 사례가 지불된다. 광고 대행사는 그 리서치 정보를 집약해 ‘상품’으로 기업에 판매하거나 마케팅 툴로 사용한다. 그러나 매일같이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유저’는 이와 같은 ‘빅데이터’의 수집에 참가당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며 대가도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하면 항상 ‘빅데이터’를 생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논의에서 다루어지는 행위를 ‘노동’으로 볼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당연히 나올 것이다. 실제로 이는 블루 칼라든 화이트 칼라든 기업에 고용되어 하루 중 일정 시간을 잘라서 파는 형태의 ‘노동’과는 외견이 다르다.
그렇지만 구체적인 ‘사물’(생산물)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가치의 창출을 ‘무형 노동’으로 간주하는 관점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잘 알려진 ‘비물질 노동’ 개념을 논하면서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상품 속에 내재된 정보나 문화의 내실을 만들어 내는 노동을 ‘무형 노동’이라 불렀다. 거기에는 ‘문화’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창작 활동(즉 ‘콘텐츠’의 창출) 및 1980년대에 많았던 기호 조작을 통한 가치 창출(차이화 게임)도 포함된다. 인터넷의 출현으로 이러한 콘텐츠 중 상당수가 책, 시디, 비디오 등과 같은 패키지, 즉 ‘물질’적인 외형에서 해방된 결과 ‘가치’만이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사물’이라는 외형을 갖추지 않기 때문에 이 또한 ‘노동’의 성과물이라는 사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참고로 라자라토는 형태 없는 노동을 통한 가치 창출에는 콘텐츠나 디자인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에 대한 소비자의 심미적 규범, 즉 ‘유저’들이 무엇을 ‘재밌다’, ‘맛있다’, ‘아름답다’고 느끼고 그것을 원하게 되는지에 관한 ‘규준’ 자체의 창출도 포함된다고 보았다. 즉 ‘공중의 의견’ 자체가 ‘무형 노동’이 생성하는 가치라는 관점이다. 이와 같이 한편에서는 ‘집합지’集合知라 불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유저의 의견’이라 불리며 최종적으로는 ‘빅데이터’라는 이름의 ‘상품’이 되기도 하는 ‘가치’의 창출 역시 ‘무형 노동’이다.
이와 같은 ‘무형 노동’의 정의를 참고하면 과거와 같은 특권적 지식인이나 작가만이 아니라 인터넷 유저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신적 활동이 ‘노동’ 과정이 되고 있음은 자명하다 할 수 있다.
라자라토는 이때 이러한 ‘무형의 가치’를 창출하는 ‘무형 노동’에 사람들을 ‘무상 노동자’로 참가시키기 위해 ‘주체성’이나 ‘자기 표출’이 동기 부여의 수사로 활용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즉 근대적 개인의 욕구 그 자체가 이런 순환적 생태계에 무상 노동으로 참가하는 동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플랫폼들이 어이없을 만큼 ‘유저’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냉정히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유저’는 ‘주체성’을 갖춘 소비자로서 ‘의견’을 말하도록, 언제나 ‘자기 표출’의 방향을 향하도록 유도되고 있다. 인터넷은 ‘주체가 된다’, ‘자기 표출한다’라는 근대의 욕구를 만인에게 개방했고, 또 그것이 드러나기 쉽도록 갖가지 ‘장치’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당연히 그 허들은 대담할 만큼 낮아지게 된다. 얼마 전 트위터의 글자 수 제한이 140자에서 10,000자로 확대된다는 소문이 흘러 큰 반발이 일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140자를 그리 불편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증거겠다. 장문의 ‘자기 표출’ 따위는 과거의 소년 A나 오보카타 하루코가 아니고서야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인터넷은 긴 문장을 쓰는 수고를 유저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KADOKAWA의 소설 투고 사이트에서 규정된 글자 수에 미치지 못하는 투고(예를 들어 각 장마다 ‘후기’를 달아 억지로 분량을 늘린)를 묵인하고 신인상 예선을 통과시킨 사실이 투고자들에게 비판받기도 했지만, 어떻게 보다 간편한 ‘자기 표출’ 공간을 제공할 것인지는 플랫폼들의 중요한 전략적 관심사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기 표출의 요구’를 받지만 사실 대부분은 자기 표출할 거리를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표출하라’고 유도되는 역설적인 ‘근대’가 인터넷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강제되는 감정의 표출
인터넷상의 ‘확산’이나 ‘염상’ 혹은 ‘리벤지 포르노’나 개인 정보 폭로 같은 일들은, ‘자기 표출할 거리’가 없는데 그 도구와 ‘억압’은 존재하기 때문에 상습화된다. 말할 것이 없는데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억압화된 욕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자기 표출’은 지극히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가 될 수밖에 없다. ‘감동’이나 ‘혐오’, 즉 ‘눈물 난다’나 ‘혐××’(이 ‘××’에는 ‘중국’, 요즘이라면 심지어 ‘오키나와’도 들어가곤 한다) 등과 같이 너무나도 척수 반사적인 감정 토로가 파블로프의 개만큼이나 인터넷상에 언어화되어 있다. ‘감정’의 표출에 논거나 묘사 따위는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의 서플리먼트화, 즉 ‘눈물 난다’, ‘무섭다’, ‘감동적이다’, ‘참고가 된다’는 식의 ‘즉효성’을 마치 기능성 식품마냥 요구받는 것과도 병렬적인 관계가 아닐까 싶다. 즉 소설의 ‘감정화’인 셈이다. ‘기능성 문학’의 어떤 부분은 ‘감정 소설’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역사 또한 감정화된다. 중국이나 한국 때문에 ‘명예가 더럽혀졌다’며 일본을 무조건 ‘자랑스러워하는’ 감정 표출이 인터넷에서 ‘집합지’가 되어 ‘역사’를 대하는 ‘가치’, 즉 역사 인식을 형성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역사 인식 자체가 과거를 철저히 부인하고 스스로에게 기분 좋은 감정적 역사를 만들어 내는 ‘역사의 감정화’임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듯 ‘국가상’ 자체가 ‘감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베 신조는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에 걸맞은 인물이다. 정치 역시도 당연히 ‘감정’화되는 것이다.
반면 ‘감정’을 표출하면서 굳이 문학적 레토릭을 많이 활용하는 등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인 소년 A의 소설은 ‘서플리먼트’로 기능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오보카타 하루코가 STAP세포 작성법을 인터넷에 공개했지만 그에 대한 검증보다는 그녀의 ‘감정’이 표출된 ‘수기’에 더 관심이 쏠렸고, 이어진 반응 역시 그녀의 ‘감정’에 대한 말하자면 ‘감정 비판’이었다.
정치 뉴스, 탤런트의 불륜, 인스타그램 사진, 고양이 동영상에 이르기까지, 또한 갖가지 상품에 대한 반응까지 포함해, 우리는 ‘감정’을 순식간에 표출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이렇게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감정 표출’이라는 형태로 ‘노동’하도록 항상 요구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사람들은 온갖 형태로 자신의 ‘삶’을 플랫폼에 무상 콘텐츠로 제공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받는다. 인터넷에 연결되는 순간 ‘창작’이나 ‘소비’만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상 노동화되는 셈이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2000년 전후 시점에 등장했으나 결국 ‘현대 사상’ 속 유행으로 끝났고, 오히려 표현의 민주화나 집합지에 대한 기대 같은 낙관적인 관점의, 굳이 이름 붙이면 ‘포스트포드주의적인 코뮤니즘’론(현재 이 나라는 신자유주의적 공산주의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라 할 만한 것에 흡수되었다.
이 유토피아를 환대하는 이들은 아무에게도 강제받지 않고 인터넷이나 2차 창작을 통해 ‘자유’롭게 자기 표출을 하고 있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반론할 것 같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노동자’가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동자들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듯 노동에서의 소외란 원래 알아보기 어려운 법이다. 포스트포드주의하의 ‘감정 노동’ 및 기호를 조작하는 ‘정보 노동’, 심지어 인터넷상의 행동 자체가 ‘노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비평이나 사회 이론 없이는 실감하기 힘든 것이다.
그러나 실감하지 못하는 것과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실감하기 어렵도록 ‘구조’가 짜여 있기 때문이다. 자주 나오는 이야기지만 노숙인을 공원에서 내쫓으려면 굳이 물리적인 힘으로 배제할 필요가 없다. 벤치 가운데에 팔걸이 하나만 만들어도 벤치에 눕기가 어려워져 그들은 모습을 감추게 된다. 이 경우 언뜻 보면 노숙인은 ‘자발적’으로 떠난 셈 아닌가. 물론 유쾌한 마음으로 떠난 것은 아니겠지만.
이와 같이 요즘 사회에서는 ‘관리’처럼 보이지 않는 관리를 하는 테크닉이 여러 분야에 걸쳐 진화하고 있다. 인터넷도 예외가 아니다. 굳이 하나하나 검증하지는 않겠으나 인터넷이 항상 유저에게 최적화된 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포스트포드주의적인 무상 노동은 소비나 자기 표출 같은 쾌락을 동반하며, (사려 깊은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지적 부하’를 가능한 한 억제해 준다는 점에서 더더욱 쉽지 않은 문제가 된다. 즉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마음 편한’ 상태라는 말이다. 방금 언급한 ‘자발적’으로 떠나는 노숙인과 달리 ‘불쾌함’조차도 느끼지 않게 된다. 반지성주의 비판자들은 ‘반지성의 쾌락’과 그런 쾌락을 유발하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반지성’은 ‘지성’ 이상의 쾌락인 것이다.
내가 『쿠로코의 농구』 사건의 와타나베에게 흥미를 가졌던 이유는 그가 예외적으로 이런 시스템 속에 있는 것이 ‘불쾌하다’고 느꼈다는 점, 그리고 ‘시스템’ 자체를 싸구려 테러리즘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때문이다. 마침 그의 앞에 『쿠로코의 농구』와 그것을 둘러싼 미디어믹스 시스템이 있었던 것뿐이지만, 십수 년 전에 활발히 논의되었던 이런 포스트포드주의 문제는 플랫폼과 ‘유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간신히 ‘보이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만들어지고 있는 ‘노동’의 쾌적한 전인격화, ‘소비’의 ‘무상 노동’화가 현실 사회의 ‘노동’으로 반전되어 피드백되면서 ‘노동관’을 형성하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으면, ‘블랙 기업’이나 ‘개호 노동’ 문제도 ‘낡은 노동 문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터넷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 자체가 무상 노동인 삶을 살기를 전인격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요구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