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감정화하는 사회»의 지은이 오쓰카 에이지를 간단히 소개해 보려 합니다. «감정화하는 사회»가 한국에 처음 번역되는 지은이의 책이 아니고, 또 일본 현대 사상서나 서브컬처 비평서 독자들은 인용이나 참조의 형태로 그의 이름을 종종 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지은이의 작업 중 비평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책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지은이가 벌인 활동 전반을 아우르며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부족하게나마 오쓰카 에이지라는 인물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면 좋겠다 판단했습니다. «감정화하는 사회» 옮긴이 선정우 선생님께 도움을 받아 아래 그의 이력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쓰카 에이지는 1958년 도쿄도 다니시시 열악한 주택(침수가 잦았다고 합니다)에서 태어나 대학 입학 때까지 살았습니다. 이 주택은 패전 이후 만주에서 귀환한 일본인들을 위해 지어진 곳으로, 그의 아버지가 만주 귀환자이자 전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에 집에서 마오쩌둥 어록이나 초상을 익숙하게 접했다 합니다. 유년기에 <철완 아톰>을, 중학교 시절에 하기오 모토 등의 만화를 만났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만화가로 데뷔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첫 연재 제안을 받은 시기에 야나기타 구니오의 민속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연재를 포기하고 수험에 집중해 쓰쿠바 대학에 진학하게 됩니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도쿠마쇼텐(이후 지브리 스튜디오의 산실이 되기도 한 곳이죠)에서 80년대 초부터 편집자 일을 시작하며 1981년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1983년부터는 에로 만화 잡지 «만화 부릿코» 편집장도 겸업하게 되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창간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휴간이 결정된 잡지의 ‘패전 처리’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오쓰카는 ‘어차피 휴간할 잡지’라는 생각에 표지 일러스트를 소녀 만화 스타일로 교체하고 당시 10대였던 오카자키 교코, 시라쿠라 유미(훗날 배우자가 되는) 같은 여성 만화가를 포함한 신진 작가를 다수 기용했는데, 해당 호가 매진을 기록하며 잡지의 수명을 연장시킨 것이 만화사의 한 사건으로 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만화 부릿코» 시기에 오쓰카가 논객으로 주목받게 되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오타쿠’라는 용어를 일반화했다고 알려진 나카모리 아키오가 연재 칼럼 <‘오타쿠’ 연구>(1983)에서 ‘오타쿠’를 비하 표현으로 사용하자 이에 격노해 연재를 취소하고 반박 칼럼을 실은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이후 오타쿠 문화의 부상과 함께 오쓰카는 일종의 오타쿠 전문가로 통하게 됩니다.
1980년대 중반 오쓰카는 대형 출판사 가도카와쇼텐의 차남 가도카와 쓰구히코가 설립한 ‘가도카와 미디어오피스’(현 ‘아스키 미디어웍스’)로 이직해 하나의 원작을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상품화하는 비즈니스 모델인 ‘미디어믹스’ 업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이 시기 미디어믹스를 위해 집필한 원작 «망량전기 마다라»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작가로도 유명세를 얻기 시작하고요.
1989년은 오쓰카 에이지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한 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창작하는 소비자’의 등장이나 ‘2차 창작’ 유행을 배경으로 한 미디어믹스 이론인 «이야기 소비론»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 출간을 계기로 마케팅 업계에서는 ‘이야기 마케팅’에 큰 관심을 두고 고액의 강연료로 오쓰카를 초빙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대로 성공 가도를 달릴 것 같던 그에게 전환기가 찾아옵니다. 미야자키 쓰토무의 ‘연속 유아 유괴 살인 사건’과 이후 이어진 여론의 오타쿠 낙인화가 그것입니다(이 사건에 관해서는 «감정화하는 사회» 206쪽 각주 8 참조). 미야자키가 용의자로 체포된 직후 오타쿠 전문가로 알려진 그에게 당혹스러울 정도로 많은 인터뷰와 원고 요청이 쇄도했고, 급기야는 83년에 악연을 맺은 나카모리 아키오와 관련 대담을 하게 됩니다. 대담에서 그는 ‘미야자키가 오타쿠기 때문에 여론의 심판을 받는다면 나는 그를 변호하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그의 특별 변호인을 맡기에 이릅니다(그리고 2006년 사형 판결의 자리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건조차 ‘기획’의 소재로만 접근하는 당대의 흐름에 깊은 회의감을 품고 출판업계 일선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됩니다.
오쓰카는 80년대의 경험을 통해 얻은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90년대부터 민속학 연구를 재개해 이를 서브컬처와 접목시킨 저서를 펴내기 시작했고, 또 전후 민주주의론자로서 만화와 정치를 다룬 작업을 속속 발표하며 비평가로서 입지를 다져 나갔습니다(책에서도 얼핏 언급되는 소설가 나카가미 겐지와의 인연도 이 시기 시작됐다고 합니다). 특히 1994년 발표한 «전후 만화의 표현 공간»은 학술 영역에서 경시되던 서브컬처 연구서로서는 이례적으로 권위 있는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00년대 초에 걸쳐 오쓰카는 소설가 쇼노 요리코와 ‘순문학’을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에 대한 그의 입장은 <불량 채권으로서의 ‘문학’>(2002)에 개진되어 있고 이 글은 국내 웹에 번역되기도 했습니다(링크). 당시에는 주로 순문학을 ‘팔리지 않는 문학’이라며 평가 절하하는 오쓰카와 예술 지상주의적인 문단 간의 대결 구도로 받아들여졌으나, 실제로 그는 이 글을 문학에 도래할 신자유주의화, 출판 생태계의 플랫폼화에 대한 예감으로 썼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00년대에 오쓰카는 다수의 작법서를 펴내는데, 이는 기성 문학을 향한 그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즉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일련의 테크닉으로 분해함으로써 문학을 향해 ‘정말 환원 불가능한 무엇을 가졌는가’라고 질문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터넷 시대와 함께 다가올 포스트모던을 예감하며 ‘근대의 재실행’을 제안한 비평서 «갱신기의 문학»(2005), 과거 «이야기 소비론»을 돌아보며 미디어믹스에 대한 비판론을 전개한 «이야기 소비론 개(改)»(2012), «미디어믹스화하는 일본»(2014) 등의 저작을 차례로 펴냈습니다.
현재 그는 아시아 각국을 오가며 일본 미디어믹스 시스템의 기원이 일본 파시즘의 전시 동원 체제에 있다는 가설을 검증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고 합니다.
«감정화하는 사회»에는 이런 오쓰카의 문제 의식이 전반적으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전후 민주주의론과 덴노제론, 플랫폼화하는 콘텐츠 생태계의 노동, 인터넷이 초래한 문학의 구전화와 기능성 문학화 등 현대 일본 사회의 문제를 비평하는 이 책에서 그는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를 참조하며 근대의 재실행과 새로운 공공성의 창안을 요청합니다. 또 그는 20세기 일본을 대표하는 문예 비평가 중 한 명인 에토 준에게 의지해 감정화에 무기력하게 삼켜져 사회와 불화하지 않게 된 일본 문학이 ‘불꽃’을 잃었음을 통렬히 비판합니다. ‘패자의 문학’의 계보가 끊긴 결과가 불꽃으로 타오르지 못한 감정들의 콘텐츠화라는 것입니다.
그가 파악한 일본의 양상 중 일부가 한국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사회 전체가 감정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진단은 우리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걸어온 독특한 길과 이제껏 말하고 써 온 것들을 살펴볼 때 오쓰카 에이지라는 비평가가 지닌 사유의 힘과 일관성, 변화를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