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의 철학» 1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관광객의 철학»은 ‘관광객의 철학'(1~4장)과 ‘가족의 철학'(5~7장)이라는 2부 구성을 가진 책입니다.

이 글에서는 1부의 내용을 각 장 순서에 따라 간단히 소개하며, 또 아즈마 히로키라는 매력적인 사상가의 진지하고도 경쾌한 철학 스타일을 소개하고자 중간중간 본문 인용을 곁들였습니다.

1장 <관광>

“20세기가 전쟁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관광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 «관광객의 철학» 일본어판이 출판된 2017년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었을 이 명제는, 올해 전 세계적인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과 함께 복잡미묘한 뉘앙스를 띄게 되었습니다.

«관광객의 철학»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주의의 확산과 그것이 불러올 내셔널리즘의 반동, 그리고 점점 더 심화될 세계의 단절을 전망했다는 점에서 전염병의 유행은 이 책의 전망을 뒤집기보다는 오히려 가속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책이 2016년에서 2017년에 걸친 시기, 즉 영국이 유럽연합을 탈퇴했고 미국에서 ‘미국 우선’을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일본에서는 혐오 발화가 만연해진 그런 시대에 쓰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2017년 현재 전 세계 사람들은 ‘타자와 함께하는 데 지쳤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우선하고 싶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더는 누구도 타자가 소중하다는 진보적 주장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15쪽.

«관광객의 철학» 1장에서 지은이는 ‘관광객’이 현대 정치철학에서 중요한 주제였던 ‘타자’를 갱신하는 개념임을 밝힙니다. ‘타자를 소중히 하자’ 같은 진보적 명제에 피로감을 느끼고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많아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관광객이라는 개념에 착안했다는 것입니다.

타자 대신 관광객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타자와 함께하는 데 지쳤다, 동지만 있으면 된다,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말은 지겹다’는 이들에게 ‘그래도 관광은 좋아하지 않습니까?’라고 되묻고 이 물음을 계기 삼아 ‘타자를 소중히 하라’는 진보적 명제로 말하자면 뒷문을 통해 다시 들어가게 하고 싶은 것이다. 16쪽.

관광은 너무나 친숙한 현상이지만 뿌리를 탐색해 보면 완전히 근대적인 현상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산업 혁명은 노동 계급에 처음으로 여가를 부여했고 이로부터 대중 소비 사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원래는 특권층의 전유물이던 여행이 대중을 위한 관광으로 상품화되었다고 합니다.

관광업자이자 계몽주의자였던 토머스 쿡은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16만 명의 관광객을 보내 기득권층에게 비난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질서한 대중이 몰려다니며 소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지은이는 여기에 오늘날의 단체 관광객을 바라보는 시선을 포개기도 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관광객은 항상 환영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또 ‘진짜와 만나는’ 여행과 ‘가짜 이벤트’ 관광의 대립은 통념을 넘어 오늘날의 인문학 속에서도 발견되는 경향입니다. 앞서 참조한 『관광객의 시선』도 21세기의 관광이 생태계 파괴와 결부되는 등 변질의 위험성을 가졌다고 지적합니다.

즉 오늘날의 인문학에서 관광객은 아예 진지한 고찰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지구화의 그림자(‘역사의 종언’)를 곳곳에 드리우는 불길한 전령처럼 여겨집니다. 지은이는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관광(객)이 지구화가 낳은 단절을 넘어설 실마리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쓰면 ‘자본의 폭력을 긍정하는 거냐’며 화내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끝까지 읽으면 알 수 있듯이 나는 소박하게 자본주의를 긍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관광객에 관한 사유가 어떻게 ‘저항’의 주춧돌이 될 수 있을지, 앞으로의 내용을 읽어 주기 바란다. 36쪽

지은이는 1장을 마무리하며 ‘관광객의 철학’의 목적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 지구화를 사유하는 새로운 틀을 만든다. 둘째, 인간과 사회를 필연(필요)이 아니라 우연(불필요)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틀을 만든다. 셋째, 진지함과 경박함의 경계를 넘는 새로운 지적 담론을 구축한다.

그야말로 야심 찬 목적들입니다. 지은이는 이 책이 아직은 ‘준비 작업’에 그친다고 말하지만, 그런 한에서는 결과물에 자신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1장에서 제기된 흥미로운 논점들이 아직 많지만 이것들은 앞으로 소개를 이어 나가며 다루어 보려 합니다.

2장 <정치와 그 외부>

«관광객의 철학»은 IS 테러가 세계적 화두로 떠오른 시기에 집필되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테러의 양상은 21세기 테러리즘이 외부로부터의 침입(‘문명의 충돌’)에서 자생적 테러리즘으로 변화했음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를 설명할 언어가 요청되기 시작했습니다.

국민과 세계 시민,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을 표상하는 두 범주 어디에도 포함될 수 없는 존재들을 설명할 언어를 찾는 것은 «관광객의 철학»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2장은 그 사전 작업으로서 기존 정치철학의 틀이 가진 한계를 점검합니다.

지은이의 전작 가운데 정치철학과 관련되는 저술로는 2011년의 «일반 의지 2.0»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근대 초창기의 정치사상가 루소를 다루는데, 문학적 저술에서는 극도의 개인주의자였던 루소가 정치철학적인 저술에서는 전체주의에 가까운 면모를 보인다는 역설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인간 개개인은 반사회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사회를 만든다.’ 이 역설에 대한 문제 의식은 «관광객의 철학»에도 계승되어 있습니다. 19~20세기를 거치며 주류 정치사상은 이 역설을 배척해 개인이 사회에 이르는 단선적 서사를 구축했고, 그 모델의 설명력이 이제 시효를 다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현실에서 사회를 만든다. 달리 말해 누구도 공공성 따위를 갖고 싶어 하지 않지만 누구나 공공성을 갖는다. 나는 이 역설이 모든 인문학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63~64쪽

2장의 전반부는 근대 초창기에 이 역설을 각자의 방식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두 사상가인 볼테르와 칸트를 다룹니다. 즉 이들의 사유에 관광객이라는 개념을 접속시켜 단선화된 서사를 다시 복선화할 실마리를 얻는 것이 2장의 첫 번째 목표입니다.

볼테르는 철학자 라이프니츠를 논적 삼아 그의 ‘최선설’을 반박하는 소설 «캉디드»를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여러 사고에 떠밀려 세계를 여행해 최선설로 결코 설명될 수 없는 세계의 비참을 고발하는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이때의 여행은 실제 여행이 아니며 일종의 사고 실험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 실험을 통해 “세계에는 항상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비참한 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관광의 탄생 이전에 관광의 의의를 선취했다고 지은이는 평가합니다.

그는 최선설을 부정하면서 비참한 개개의 현실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그런 사례를 열거해 봤자 쉽사리 최선설로 환원되고 말 테니까) 오히려 세계 여행이라는 사고 실험을 도입해 세계에는 항상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비참한 현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일반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현대의 다크 투어리즘에 가까운 문제 의식을 읽어 낼 수 있다고 본다. 74쪽

한편 칸트가 저술한 «영원한 평화를 위해»라는 짧은 책자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중요도가 덜하게 여겨졌으나 양차 대전의 경험, 유엔 설립 등의 계기를 거치며 새롭게 주목받게 된 이 책에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한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첫째로는 세계의 국가들이 공화주의를 채택할 것, 둘째로는 각국이 모여 상위의 국가 연합(통일 정부가 아닌)을 만들 것, 셋째로는 “보편적인 우호를 가져오는 제반 조건”을 포함하는 세계시민법을 갖출 것을 조건으로 걸었습니다.

첫째와 둘째 조건은 ‘한 개인이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 시민이 되고 또 국민이 되며 나아가서는 세계 시민이 된다’는 단선적 서사와 부합하며,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은이는 셋째 조건을 재해석해 ‘영원한 평화’의 길을 복선화하고자 합니다.

셋째 조건을 상술하며 칸트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권리’를 말했습니다. 당시라면 외교관이나 상업 목적 정도를 염두에 두었겠지만 그 연장선상에 관광객을 위치시키는 것도 가능하며 오히려 칸트의 논의를 현대화하는 길이 된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입니다.

관광객들이 꼭 ‘공화국’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중국, 러시아, 중동 국가들도 서양의 기준에서는 성숙한 국가라고 할 수 없을지 모르며, 이로 인해 국가 차원에서는 영원한 평화를 위한 국가 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시민은 관광객으로서 전 세계를 활보하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조국의 체제와는 상관없이 평화에 공헌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과 한국, 일본과 중국은 항상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서로를 오가는 많은 수의 관광객 덕분에 관계 악화가 상당히 억제되고 있다. 84-85쪽

성숙의 서사를 통과하지 않은 관광객들이 실제로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서 ‘관광객의 철학’은 시작됩니다. 관광의 출현 이전을 살았던 두 사상가에게는 이렇듯 관광과 접속이 가능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2장 후반부는 20세기 정치철학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세 사상가(카를 슈미트, 한나 아렌트, 알렉상드르 코제브)를 검토해 이러한 ‘복선적 서사’의 가능성이 어떻게 배제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광객의 철학’이 대결해야 할 철학적 패러다임의 정체를 선명히 드러냅니다.

«관광객의 철학»은 ‘개인이 시민이자 국민이 된 후 세계 시민으로 나아간다’라는 성숙의 신화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세계 시민이라는 이상에 도달하는 길이 시민/국민의 길뿐은 아님을 보이고자 하며, 다른 길의 가능성을 우선 18세기 사상가인 볼테르와 칸트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정치철학에서 이 ‘다른 길’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진지한’ 정치철학이 제시하는 엄격한 인간관, 성숙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미성숙한 존재는 공론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캉디드» 같은 문학적 사고 실험은 정치철학이라 하기엔 ‘경박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19세기 이후의 인문계 사회 사상은 이 역설을 사유의 중심에 두지 않았다. 그 대신 인간은 원래 인간을 좋아하고 사회=국가를 만드는 존재, 사회=국가 안에서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개선해 가는 존재며, 그렇지 않은 인간은 ‘인간’이라는 호칭에 걸맞지 않다는 부자연스러운 도그마가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앞으로 다룰 이른바 헤겔주의의 문제, 내셔널리즘의 문제다. 64쪽

이기적인 개인(특수성)이 어떻게 사회(보편성)를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 19세기 이후 정치사상의 방향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헤겔은 ‘국가 의지’에 의한 특수성과 보편성의 통합을 말했습니다. 개인-국가-사회의 3항 관계를 설정하고 국가가 통합의 매개항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헤겔은 국가를 시민 사회의 ‘이성’에 해당하는 존재로 보았다.……국가는 그 구성원이 같은 땅에 살고 역사를 공유하며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는 단일한 민족의 일원으로서 자기 의식을 가졌을 때(헤겔의 말로 표현하면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 자기 자신을 알며,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완전히 성취”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이것이 헤겔의 생각이었다. 즉 국가는 사실의 산물이기에 앞서 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이 규정은 근대 정치 사상의 기초를 이룬다. 92쪽

헤겔은 “개개인의 최고 의무는 국가의 성원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한, 그야말로 근대 내셔널리즘의 초석을 놓은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이 헤겔 패러다임은 나치와의 관계성이 문제된 카를 슈미트부터 좌파로 여겨지는 한나 아렌트에 이르는 20세기 정치사상가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친구/적 이론으로 유명한 슈미트의 논리는 일견 단순합니다. 정치의 본질은 친구와 적을 공적으로 나누고 그럼으로써 국가의 윤곽을 명확히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미학, 윤리학, 경제학이 결코 간섭할 수 없는 정치 고유의 영역을 강력히 주장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는 1930년대 유럽을 뒤덮었던 자유주의와 경제 통합의 기운 속에서 ‘인간’의 위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국가 간의 투쟁이 사라진 ‘국경 없는 세계’에서는 인간의 성숙도 사라지고 그저 소비자 대중만이 남으리라는 음울한 예견이 그의 친구/적 이론에 절박한 뉘앙스를 더했습니다.

슈미트는 국가의 소멸을 기도하는 글로벌리즘은 설혹 그것이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오더라도 또는 자국 문화의 확대를 가져오더라도 거부해야 한다고 본다. 국가 없이는 정치도 존재할 수 없다. 정치 없이는 인간이 인간일 수 없게 된다. 슈미트는 인간의 인간됨을 위해 글로벌리즘을 거부한 것이다. 이보다 더 강한 비판의 논리가 있을까? 98쪽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기억하는 독자는 ‘인간의 소멸’ 테제에서 자연히 알렉상드르 코제브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코제브는 특히 2차 대전 후 도래한 소비 사회를 ‘포스트역사’로 규정하며 이 속에서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추고 (소비밖에 모르는) 동물이 되리라고 전망했습니다.

슈미트와 코제브 모두 인간과 인간의 생사를 건 투쟁이 사라지고 국가와 국가의 이념을 건 전쟁이 사라져 세계가 하나가 되고 소비 활동만 존재하게 된 시대의 인간 소멸을 문제 삼고 있다. 슈미트는 이를 정치의 소멸(자유주의화)이라 지칭했고 코제브는 역사의 종언(동물화)이라 지칭했다. 슈미트와 코제브 모두 글로벌리즘에 저항했다. 이들에게 국경을 넘나들며 균질적인 소비 사회로 세계를 뒤덮는 글로벌리즘은 헤겔적 인간관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보였다. 106쪽

슈미트와 코제브에게 국가나 민족을 떠나 개인의 관심에 따라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는 관광객은 정치와 역사의 종언을 알리는 소비자=동물 이상의 무엇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관광객의 철학을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동물의 철학이라 말하는 것도 가능할 듯합니다.

흔히 진보적 사상가로 여겨지는 한나 아렌트(코제브와 동세대) 또한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소멸이라는 주제를 1958년 발표한 『인간의 조건』을 통해 다루었습니다. 단지 생물학적으로 인간인 데 그치지 않고 공공성을 가진 정치적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위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 세계를 뒤덮은 노동의 매매 관계를 말합니다. 임금을 위해 살아가는 노동자는 여가 시간을 소비 활동에 소진할 뿐 공공 의식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노동하는 인간’이 소비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아렌트의 문제 의식은 슈미트나 코제브와 공명합니다.

슈미트는 친구와 적을 구분 짓고 정치를 행하는 자가 바로 인간이라고 답했고, 코제브는 타자의 인정을 추구하며 투쟁하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으며, 아렌트는 광장에서 토론하며 공공성을 만드는 자가 인간이라고 답했다. 언뜻 제각각인 답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인간을 무엇과 대비시켰는지를 보면 공통된 문제 의식이 부각된다. 114쪽

지은이는 오늘날 인문학의 현실을 ‘사상의 패배’라 평가합니다. 20세기 말 포스트모던 철학이 유행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퇴조했습니다. 이제 이론에 기대를 거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런 패배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에 지은이는 ‘관광객의 철학’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20세기의 인문학은 대중 사회의 실현과 동물적 소비자의 출현을 ‘인간이 아닌 것’의 도래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이 거부가 글로벌리즘이 진행된 21세기에 통할 리 없다. 실제로 인문학의 영향력은 이번 세기 들어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문학 자체를 변혁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이 책의 바탕에 있는 위기 의식이다. 116쪽

3장 <2층 구조>

«관광객의 철학» 3장은 지구화(글로벌리즘)가 진행되는 한편 내셔널리즘에 중요한 변형이 일어난 우리 현실에 ‘2층 구조’라는 이름을 붙이고 논의를 전개합니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정치사상이 내셔널리즘의 철학적 토대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사상에는 항상 ‘세계 국가/시민’이라는 보편적 이상의 계기가 포함되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내셔널리즘에서는 이 보편성에 이르는 길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이 지은이의 진단입니다.

과거의 내셔널리즘은 세계 정신으로 향하는 상승의 첫걸음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상승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정신이 세계 시장으로 대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은 이제 영원히 내셔널리즘인 채로, 즉 특정 공동체에 대한 사랑인 채로 머물며 보편화되지 않는다. 137쪽

말이 통하지 않는 타자를 굳이 이해하려 애쓰지 않고 각자의 공동체에 머무르면 된다는, 국민을 넘어서는 성숙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반면 세계의 경제 통합은 급속도로 진행되어 세계 시장이 형성된 것 또한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지은이는 우리 시대를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 사이에서 분열된 시대라 정의하며, 오늘날의 여러 정치적 사건이 이 분열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겉으로는 인권 같은 보편적 가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비합리적 욕망(혐오 발언 등)에 휩쓸리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목격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 글을 2017년에 쓰고 있다. 작년인 2016년에는 세계 각국에서 글로벌리즘에 대한 반발이 현저히 부각됐다. 영국은 유럽연합을 이탈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미국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유럽 여론은 난민 반대로 크게 기울고 있다. 일본에도 최근 공공연히 배외주의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생겨났다. 124쪽

국가와 시민 사회, 정치와 경제, 사고와 욕망이 내셔널리즘과 글로벌리즘이라는 이질적인 두 원리에 따라 각기 다른 질서를 구축해 버린 현실이 바로 ‘2층 구조’의 세계입니다. «관광객의 철학»은 이렇게 분열된 세계를 다시 통합시킬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형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1세기 세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내셔널리즘의 층과 인간이 동물로서 살아가야 하는 글로벌리즘의 층, 이 두 층이 서로 독립된 상태로 포개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계상을 전제로 이 책이 구상하는 관광객의 철학을 ‘헤겔적인 성숙과는 다른 회로를 통해 글로벌리즘의 층과 내셔널리즘의 층을 연결할 수 없을지’, ‘시민이 시민 사회에 머문 채로, 개인이 개인의 욕망에 충실한 채로 공공성이나 보편과 연결되는 또 하나의 회로가 없을지’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로 다시 정의할 수 있다. 131~132쪽

21세기 시작과 함께 등장해 ‘새로운 주체의 형상’으로 주목받은 개념으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제안했던 ‘다중’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은이는 «관광객의 철학» 문제 의식이 이들의 다중론과 맞닿아 있음을 먼저 말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국민 국가 체제’와 ‘제국 체제’를 대치시키고 “국민 국가의 주권 쇠퇴, 그리고 국민 국가가 경제적・문화적인 교환을 점점 규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제국의 도래를 알리는 주요 징후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국민 국가(네이션)는 더 이상 경제와 문화를 자기 관리하에 두지 못하며 이로부터 새로운 질서가 생성된다는 것이 네그리와 하트의 인식인데, 이 책도 같은 인식을 갖고 있다. 140쪽

2장에서 비판적으로 다룬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철저한 구분을 추구했습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이 이 분할을 넘어서는 운동이라고 말하며, 푸코와 들뢰즈를 참고해 ‘생명정치’적 다중론이 구체적 삶에서 시작해 ‘제국’(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한다는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이는 다중론이 ‘인간을 동물로 취급하는’ 권력에 대한 대항 논리라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은이는 이 논의가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현실에서 권력은 개별 인간을 때로 권리의 주체로 대하고, 또 때로 통계적 수치로 환원 가능한 동물로 대합니다.

그러므로 국민 국가 체제에서 제국 체제로의 이행이 아니라 국민 국가와 제국이라는 2층 구조가 오늘날 현실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중론은 내셔널리즘이 변형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고 이해하기 때문에 애매모호함을 안고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장입니다.

특히 구체적 삶에서 출발하는 운동을 강조했음에도 실천론이 그럴듯한 수사로 치장되어 있을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제국’으로 일원화한 지배 질서에 맞서 온갖 투쟁이 ‘다중’의 이름 아래 연대한다는 단순한 논리 탓에 유의미한 사회 변화를 이끌어 내는 데도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각 투쟁의 특수성은 일단 내버려 두고 연대를 중시하자. 어차피 적은 권력이니 평화 운동, 생태 운동, 페미니즘 등 어느 운동이든 연대하자. 이데올로기적인 기둥을 상실한 냉전 후의 운동은 이런 놀라운 전술을 구사하게 되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 없는(더구나 적극적으로 내용이 없는 선택을 한) 연대는 단기적으로 동원을 강화하고 헤게모니를 획득하는 데 성공할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반드시 각 투쟁의 약화와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 158쪽

지은이는 ‘관광객의 철학’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같은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던 다중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4장은 이 극복의 전략을 자신의 과거 데리다 철학 연구서인 «존재론적, 우편적»에서 제기했던 ‘부정신학’과 ‘우편’ 개념 쌍을 도입해 논합니다.

한편 이번 소개에서는 생략했지만 진보적인(좌파적인) 정치철학서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자유지상주의(로버트 노직)와 공동체주의(마이클 샌델), 자유주의(존 롤스)의 관계를 2층 구조론과 연결지어 논한 부분 또한 3장의 백미입니다. 기회가 닿거든 꼭 읽어 보시면 좋겠어요!

4장 <우편적 다중으로>

3장은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론을 바로 이 ‘부정신학’이라는 말로 형용합니다. 그리고 이 부정신학적 다중의 결점을 극복하는 관광객은 말하자면 우편적 다중,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 개념을 우편화한 것과 같다고 설명하고요.

부정신학이란 ‘신은 ○○이 아니다’라는 부정의 중첩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신학 논리를 가리킵니다. 냉전 후 거대 담론이 붕괴한 시대에 급진 정치철학이 제기하게 된 연대의 논리가 이 신학 논리와 닮아 있었고 다중론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중은 각각이 직면하는 문제의 특수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연대하고 투쟁 국면을 확장해 가는 운동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이 경우[다중이 벌이는 투쟁의 경우—아즈마] 중요한 점은 이들 투쟁의 실천과 전략, 목표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서로 결합하고 통합해 다원적으로 공유된 프로젝트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투쟁이 갖는 특수성은 ‘공동’ 토양의 창출을 방해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촉진한다.” 157쪽

‘연대의 근거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현재진행형으로 창출되고 변화하는 연대를 우선 긍정하는 사상’. 지은이는 부정신학이라는 형용을 통해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론을 이렇게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관광객이 다중을 우편화한 것이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우편 개념은 데리다 철학에 뿌리를 둡니다. 지은이는 과거 «존재론적, 우편적»에서 20세기 후반 프랑스 사상의 부정신학적 경향에 반기를 든 철학자로서 데리다를 평가하고 이 대결 지점을 ‘우편’ 개념을 통해 선명히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우편은 간단히 말해 언제나 배송 사고 즉 ‘오배’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오배는 단순한 오류에 그치지 않고 의도하지 않은 소통을 낳기도 합니다. 관광객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찾은 외국에서 우연한 마주침을 겪고 그로부터 새로운 앎을 얻어 자국으로 돌아가는 것처럼요.

우편적이라는 말은 어떤 물건을 지정된 곳에 잘 배달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배’, 즉 배달의 실패나 예기치 않은 소통이 일어날 가능성을 많이 함축한 상태를 뜻한다(현실의 우편 사업 관계자에게는 이 용법이 못마땅할 수 있겠다). 관광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편적’이다. 우리는 관광을 하며 이런저런 대상을 접하고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자국에서는 결코 접할 일이 없는 대상도 있다. 예를 들어 미술에 전혀 흥미가 없는 사람도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가면 미술관을 구경하곤 한다. 164쪽

자국에 머무는 국민은 가던 곳을 가고 만났던 사람을 만나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관광객이 되어 국경을 넘었을 때는 자국에서라면 가지 않았을 장소를 찾고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만나며 세계 시민의 체험을 합니다.

이런 경험들이 모여 2층 구조의 세계가 만들어 내는 배외주의 등의 감정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 속에서 확인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즉 소리 높여 연대를 외치기보다는 관광의 경험에 담긴 연대의 씨앗을 찾는 것이 ‘관광객의 철학’이 꾀하는 변화의 길입니다.

‘우편적 다중’ 논의는 4장의 서두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논의는 의외이게도 네트워크 이론으로 이어집니다. 지은이는 수학의 전문가가 아니지만 ‘관광객의 철학’에 수학적 논리의 뒷받침이 필요한 이유를 조심스럽고도 절실하게 덧붙입니다.

제국과 국민 국가의 2층화 자체가 이미지에 불과하다면 이 둘을 왕복하는 관광객=우편적 다중이라는 이 책의 제안 또한 이미지의 쇄신에 그칠 것이며, 다중에 대한 논의는 다시 신비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자기 만족(‘관광객으로 살아가라!’)으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나는 이 닫힌 회로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수학을 인용하는 것이다. 제국, 국민 국가, 우편적 다중 모두 실체고 이들을 생산적으로 논의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사회 사상과 네트워크 이론의 교차 가능성을 살피려 한다. 188~189쪽

간략히만 설명하면 지은이는 라슬로 바라바시와 레카 앨버트의 ‘무척도’, 던컨 와츠와 스티븐 스트로가츠의 ‘스몰 월드’ 같은 네트워크 이론의 개념들을 빌려 와(“수학적 발견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 글로벌리즘 시대에 걸맞은 존재론 혹은 새로운 사회 계약의 신화를 구축하고자 합니다.

지은이도 인정하듯이 스케치에 가까운 논의지만 그간의 사회 철학적 논의에 존재하던 애매모호함을 불식시키며 전개하는 서술에는 강한 흡입력과 설득력이 있습니다. 인문 사상에 만연해 온 “마법 주문”이 아닌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는지 확인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겠습니다.

새로운 다중은 리좀=제국에서 태어나 그 질서를 내부에서 붕괴시키는 정체불명의 자기 지시적 부정 작용을 가리키는 마법 주문이 아니다. 인문 사상의 세계는 이런 마법 주문으로 가득하다. 나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제안하는 관광객 혹은 우편적 다중은 스몰 월드를 스몰 월드이게 하는 ‘바꿔 연결하기’ 혹은 오배 작용을 그것이 무척도의 질서에 회수되기 직전에 확보하는, 저항의 기억을 실천하는 자가 된다. 196쪽

덧붙이자면 이 책 곳곳에서는 현대 사상을 불신하는 독자들을 향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인문서를 읽던 독자들만이 아닌 새로운 독자들에게도 이 책이 전해져 오배를 일으키기를, 더 많은 철학의 관광객을 만들어 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한 전략이라 해도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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