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라는 병

일본의 문예지 «분게이»(文藝) 2019년 여름호에 수록되었던 아즈마 히로키의 에세이를 안천 선생님이 번역해 주셨습니다. 이 에세이에서 아즈마는 2019년 4월 30일로 끝을 고한 헤이세이 연간과 자신의 경력을 포개며 감회를 풀어냅니다. 일본 사회 전체가 변화를 향한 희망으로 넘실대던 90년대(헤이세이 00년대)에 철학과 비평을 공부하고 문필가로 데뷔했던 그는 헤이세이를 철저한 실패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레이와라는 새 연간에도 거짓 희망으로 들뜬 ‘축제의 시대’가 이어질까 염려합니다.
«관광객의 철학»에서 그는 “나는 이 닫힌 회로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라는 문장을 썼습니다. 책의 문맥에서는 실체성을 잃고 공회전을 거듭하는 현대 사회 사상을 향한 염증의 표현이었으나, 이 에세이를 읽은 후 곱씹어 보니 숨막히는 시대와 작별하겠다는 선언으로 더욱 절실히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사용권은 코믹팝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저작권자와 계약한 리시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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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라는 병

초출 «분게이», 2019 여름호「文藝」2019年夏季号(河出書房新社 発行) | 아즈마 히로키
안천 옮김

쇼와 천황이 죽었을 때 나는 17살이었다. 지금은 47살이다. 헤이세이[1989~2019] 는 이 30년간을 차지한다. 즉 헤이세이는 내 인생에서 지적이고 생산적이었던 기간과 완전히 일치한다. 쇼와 시대에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았고 내 모든 일은 헤이세이 시대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50살이 가까운 나이가 되어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이번 천황 교체로 새 시대가 열려도 꾸준히 일은 하겠지만 이는 헤이세이 시대의 연장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즉 나는 본질적으로 헤이세이의 비평가이고 철학자이며 문필가인 것이다. 헤이세이란 내게 그런 시대이다.

이 사실은 나를 우울하게 한다. 나는 헤이세이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자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TV 브라운관(당시는 브라운관이었다) 너머로 관방장관이 “헤이세이”(平成)라고 적힌 종이를 들어 보였을 때 ‘이렇게 멍청한 연호가 또 있을까’ 생각했던 것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다. 헤이세이는 그 이름처럼 멍청한 시대였다. 헤이세이 시작 직전의 일본은 커다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세계에서 둘째 가는 경제대국이었고, 유럽과 미국이 부러워하는 기술 대국이었으며, 시가 총액이 세계 최고 수준인 기업이 넘쳐났다. 젊은 사람도 많았고 인구도 아직 증가하는 추세였으며 21세기는 일본의 시대가 되리라고 회자되고 새 수도 건설도 진지하게 검토되었다. 그러나 헤이세이의 일본인은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애초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제대로 고민하지 않고 자존심만 커져 헛돌다 자멸했다. 이것을 멍청하다는 말 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헤이세이는 축제의 시대였다. 헤이세이는 모든 것을 축제로 환원해, 축제만 계속해도 사회가 바뀐다는 착각에 빠졌다가 지쳐 자멸한 시대였다.

이와 같은 성격은 정치에 뚜렷이 나타났다. 헤이세이는 사실 활력이 넘치는 시대였다. 헤이세이만큼 ‘변혁’, ‘개혁’을 외친 시대는 없었다. 헤이세이는 모리타 아키오[1]와 이시하라 신타로[2]의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간행과 함께 시작되었다. 쇼와의 끝은 냉전의 끝과 겹쳤다. 헤이세이의 시작은 세계 질서 전환기의 시작이기도 했고 많은 사람이 개혁을 꿈꿀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헤이세이 첫 10년 동안, 즉 (대체로) 1990년대 일본은 얼마간 진지하게 개혁에 힘썼다고 생각한다. 1993년에는 오자와 이치로[3]의 «일본 개조 계획»이 간행되었고, 호소카와 연립 정권이 출범해 55년 체제[4]가 붕괴했다. 다음 해에는 정치개혁 4개법이 성립했다.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도 발표되었다. 내정과 외교 양 방면에서 일본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당시 일본에는 기초 체력이 있었다. 1991년에 버블이 붕괴해 취업난이니 불황이니 시끄러웠지만, 아직 한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뒤처져 있었고 아시아 최강의 경제 대국이라는 지위는 굳건했다. 저출산 고령화를 경고하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단카이 주니어 세대(1971~74년 출생)는 아직 젊은 20대였다. 1990년대는 정보기술혁명의 초창기로 정보 기기, 영상 기기 개발은 일본의 특기였기에 컴퓨터 시대의 도래는 일본의 국력을 강화할 것으로 여겨졌다. 한마디로 당시 일본은 아직 낙관적인 미래를 믿을 수가 있었다. 이를 전제로 정치 개혁 다음에 행정 개혁(하시모토 내각)을 추진했고, 나아가 2000년대에는 구조 개혁(고이즈미 내각)이 뒤를 이음으로써 쇼와 시대의 제도를 해체해 갔다. 그리고 당시에는 그런 해체가 대체로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낙관은 오래가지 않았다. 원래 이런 ‘개혁’은 곧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 1997년을 정점으로 평균 급여가 하락하기 시작했다(국세청 조사). 생활 형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사람들은 장기화되는 불황에 지쳐갔다. 소득 격차가 화두가 되고 니트NEET와 워킹 푸어 같은 말이 유행어가 되었다. 일본의 경쟁력은 내리막길을 굴러 내려가듯 하락해 갔다. 1990년대 중반에 미국의 명목 GDP는 일본의 1.5배 정도였는데 10년 후에 그 차이는 3배 정도로 늘고 말았다(그리고 이 원고 집필 시점에 그 차이는 4배로 늘었다). 일본인은 이제서야 조금씩 어쩌면 이 나라는 가망이 없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2000년대 중반에는 개혁 의지가 조금씩 헛돌기 시작했고 개혁은 그냥 축제 분위기를 내는 슬로건이 되고 말았다. 이런 경향은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한마디一言 정치’에서 감지되었으나 더욱 분명하게 희화화된 형태로 이를 체현한 것은 ‘호리에몽’이라 불리는 호리에 다카후미堀江貴文[5]다. 호리에는 돈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해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다가 체포되었다. 이런 희비극이 반복되면서 시대는 모든 것의 리셋을 바라게 되었다. 이윽고 2009년에 민주당 정권이 탄생했다. 지금 당시 분위기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데, 그 정권 교체극은 헤이세이 최대의 ‘축제’였던 것 같다. 매스컴은 열광했고 지지율은 60%를 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야말로 정말 세상이 바뀐다고 믿었다. 나는 정권 교체 직후에 진보적 인사로 알려진 단카이 세대(1947~49년생) 연예인이 사회를 맡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민주당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말했을 때 느낀 벌레라도 보는 듯한 경멸의 시선은 잊혀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그들의 기대는 무너졌다. 민주당 정권은 출범 직후부터 난항을 겪었고, 하토야마 총리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 문제를 혼란의 극치로 몰아간 후 사임했다. 이어서 2011년에는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가 일어났고 다음 해 말에 다시 자민당 정권이 들어섰다. 20년 가까이 시간을 들인 ‘정계 재편’ 축제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그렇지만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아니, 정치의 축제적 성격은 더욱 강해졌다. 대지진 후에는 ‘데모의 시대’가 도래했다. 금요일 저녁에 국회 앞에 몇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SEALDs[6]가 등장해 진정한 민주주의가 탄생한다고 외쳤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누구도 진심으로 바꾸려 하지 않게 되고 말았다. 선거에서는 포퓰리즘이 돌풍을 일으켰고 도쿄도 지사가 짧은 기간 동안 수 차례 바뀌었으며 2017년에는 결국 최대 야당이 스스로 붕괴했다. 자민당의 정권 기반은 전례 없이 강고해졌다. 아베 신조는 2019년 11월에 가쓰라 다로를 뛰어넘어 헌정사상 가장 오래 재임한 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안정성 속에서 일본의 국력은 더욱 약해졌다. GDP는 중국의 반도 안 된다. 단카이 주니어 세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연령이 되었다. 아무도 일본의 기술이 세계를 바꾼다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빈곤, 아동 학대 뉴스가 매일 보도되고 혐한·혐중 같은 혐오 발언이 눈에 띄게 늘었는데도 많은 일본인은 이런 상황을 고민조차 안 하고 있다. 그런데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주가만은 상승하고 있으며 ‘일본은 대단해’, ‘일본은 바뀔 수 있어’, ‘일본은 아직 괜찮아’ 식의 책만 계속 팔린다.

개혁의 90년대(헤이세이 00년대)에서 리셋의 2000년대(헤이세이 10년대)로, 그리고 축제의 2010년대(헤이세이 20년대)로. 헤이세이 30년을 크게 셋으로 나눈다면 나는 이렇게 나눌 것이다.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인이라고 해서 결코 항상 무기력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진지하게 “고통을 견디고”(이는 고이즈미 내각이 즐겨 사용한 말이다) 있었다. 그랬던 것이 중간에 자포자기 리셋의 바람으로 바뀌고, 마지막에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축제만 반복하는 현실도피뿐이었다.

과거 일본에는 미래가 있었다. 헤이세이 30년은 축제를 거듭해 그 미래를 무너뜨린 30년이었다.

나는 헤이세이의 비평가다. 그래서 이 멍청함의 반은 내 인생의 멍청함이기도 하다. 개혁의 90년대,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배우고 있었다. 현대 사상의 새 영역을 개척하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 성과는 1998년(헤이세이 10년)에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책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로써 평론계·문단은 크게 바뀔 것이라고 20대였던 나는 소박하게 믿었다.

현실에서 그런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책 한 권으로 바뀔 정도로 평론계·문단은 좁지 않았고 사람들은 예상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다. 비평에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고 역설하면 할수록 비웃음만 사는 시기가 계속되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그리고 서서히 비평이나 사상을 개혁할 것이 아니라 이를 지탱하는 권위주의 자체를 뒤엎고 독자층을 포함해 통째로 리셋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윗세대 대학인과의 관계를 끊고, 젊은 세대의 독자를 모아 서브컬처와 인터넷 컬처에서 활로를 찾게 되었다. 이 방침 전환은 2001년(헤이세이 13년)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간행으로 시작되었고, 7년 후(헤이세이 20년) 고단샤 BOX의 주최로 열린 ‘아즈마 히로키의 제로아카 도장’[7]에서 정점을 맞았다. ‘제로아카’라는 이름에는 사실 통렬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이는 ‘00년대 아카데미즘’의 줄임말인 동시에 ‘아카데미즘 제로’의 줄임말이기도 했다. 당시 나는 스스로를 비평가라고 칭하지 않게 되었다. TV에 출연하게 되었고 철학에 전혀 관심 없는 사람들과 교류했다. 소설을 쓰고 애니메이션 원작에도 관여했다. 리셋의 2000년대(헤이세이 10년대), 나는 모든 것에 염증을 느꼈다. 90년대에 필사적으로 손에 넣으려 했던 인문학적 지식과 교양은 모두 버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당시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욕망은 시대와 공명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제로아카 도장을 맡은 1년 동안 실제로 세상에서는 정권이 바뀌었다.

개혁의 90년대와 리셋의 00년대, 나는 시대와 완전히 공명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바꿀 수 없다면 리셋하면 된다고 믿었다. 일본인이 일본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바꿀 수 없다면 리셋하면 된다고 믿었던 것처럼.

이 공명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축제의 10년대에 들어서, 즉 내가 40대가 된 후부터다. 대지진 후 데모가 활발해진 것에 반비례하듯 나는 급속히 정치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을 그만두고, 와세다대학 교수 임기 연장도 거절했다. TV와 주간지에서도 활동하지 않게 되었다. 서브컬처와 인터넷컬처에도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원전 사고만큼은 계속 고민하려 했으나 2013년(헤이세이 25년)의 «후쿠시마 제1원전 관광지화 계획» 출판이 실패로 끝난 후에는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 실패는 단지 매출 차원에서 저조했을 뿐만 아니라 반응이 좋지 않은 걸 안 공저자 사회학자가 태도를 180도 바꿔 나를 비판하기 시작해 뒤끝이 나쁜 경험이었다. 나는 비슷한 경험을 이것 외에도 몇 번 겪으면서 조금씩 후쿠시마, 오키나와, 개헌, 민주주의 같은 것은 모두 이 나라에서 언론인의 축제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고 무슨 말을 해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헤이세이 20년대 후반, 나는 겐론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사실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근간부터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는 다시 철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철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꾸려 유지하는 길을 고민하게 되었다. 2017년(헤이세이 29년)에 간행한 『관광객의 철학』은 전자의 결과로서 내놓은 책이다. 그리고 지금 겐론에서 하는 카페와 스쿨 운영은 후자의 결과로서 시작한 활동이다.

따라서 지금의 나는 시대와 매우 동떨어져 있다. 철학 공동체를 만든다고 하면 최근 화제인 온라인 살롱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겐론을 그런 문맥에서 이해하는 사람은 많고, 그중에는 우노 쓰네히로[8]나 오치아이 요이치[9] 같은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며 ‘아즈마 씨, 저 사람들한테 독자를 뺏기겠어요’하고 ‘충고’해 주는 친절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는 활동은 그들의 시도와는 관계가 없다. 우노와 오치아이는 축제 속에 있다. 일본을 바꾸려 한다. 나는 축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일본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진솔하게 추구하고자 할 뿐이다.

비평가의 재능은 무엇일까? 만약 시대와 무의식적으로 공명하는 것이 비평가의 재능이라면 나에게는 분명 그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불모의 시대라면 그 비평가의 삶도 불모한 것이 됨을 의미한다. 나는 이를 헤이세이 마지막 10년에 겨우 깨달았다.

헤이세이 일본은 스스로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하지 못하는지를, 애초에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자존심만 키워 헛돌다 자멸했다.

헤이세이 마지막 10년이 되어서야 나는 이 병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일본 전체가 이 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축제의 시대는 아직 끝날 것 같지 않다. 새 원호는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엑스포로 시작된다. 말 그대로 ‘축제’로 시작된다.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엑스포는 반세기 전에도 열렸다. 사람들은 이 반복이 일본의 부활을 불러오기를 기대하지만 그런 주술 같은 기대가 실현될 리 없다. 축제라는 공수표의 실체가 밝혀졌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찾기 시작할까? 나는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

딱 하나, 17살부터 47살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헤이세이와 함께 한 세대로서 새 원호를 살아갈 젊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과거에 일본에 큰 가능성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세대에도 가능성이 있었다(당연하다). 헤이세이 30년은 공허한 축제를 반복하다 그 가능성을 잃고 말았지만 이와 공명해 불모의 반생을 산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인이든 정치인이든 경영인이든, 우리 세대에는 ‘일본을 바꿀 수 있다. 바꿔야 한다’고 믿다가 결국은 축제에만 정신이 팔려 가능성을 놓쳐 버린 사람이 많다. 앞서 말한 호리에 다카후미가 그 전형적인 사례다. 그에게는 분명 커다란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새 원호를 살아갈 새 세대는 이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시대의 이 나라에 과도한 기대를 걸어 자신을 소모하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일본이 나쁜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 21세기의 지금이 나쁜 시대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장소와 21세기의 지금이라는 조합은 어딘지 문제가 많은 부분이 있어 새롭고 본질적인 일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커다란 벽에 부딪히게 된다. 적어도 헤이세이 시대에는 그랬다.

나는 헤이세이 시대의 비평가였다. 이는 헤이세이의 병을 체현하는 비평가임을 의미했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욕망과 마주하지 않고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계속 헛돌며 사반세기를 보내고 말았다.

나는 새 연호에는 그런 헛돌기를 그만두고, 사회를 더 좋게 하겠다고 생각 말고, 차분하게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살려 한다. 이는 아마도 비평가 자격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 패배주의이고 냉소주의이며 현실 긍정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들이 이렇게 무기력해서 일본이 이렇게 되었다고 젊은 세대에게 비난받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거짓 희망에는 염증이 난다. 헤이세이라는 병을 살아온 47살의 나는 진심으로 절절하게 그리 생각한다.

그리고 이 피로는 아마 나와 같은 세대 일본인 상당수가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무한하지 않다.


[1] 1921년생. 주식회사 소니의 창립자.
[2] 1932년생. 소설 『태양의 계절』(1955)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1968년 정치에 입문해 도쿄도지사 등을 지냈다.
[3] 1942년생. 신진당, 자유당 당수와 민주당 대표 등을 지낸 정치인.
[4] 1955년에 성립된 자민당과 일본사회당의 양당 체제.
[5] 1972년생. 인터넷 기업 라이브도어의 전 CEO. 청년층에 인기가 높았으며 2005년 총선거에 자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이후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2013년 가석방되었다.
[6] “자유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지킨다”는 기치로 아베 정권의 안보 관련 법안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던 학생운동 단체.
[7] 00년대 비평을 이끌어 갈 신진 비평가 육성을 목표로 내걸고 진행되었던 도장 프로그램.
[8] 1978년생. 비평가이자 주식회사 PLANETS 대표 이사. 2000년대부터 2010년대 초에 걸쳐서는 아즈마 히로키와 종종 협업한 바 있다.
[9] 1987년생. 미디어 아티스트 겸 연구자. 2015년 우노 쓰네히로가 이끄는 PLANETS에서 첫 저서를 출간했고 2018년에는 호리에 다카후미와 공저서를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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