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리스크의 감춰진 상처들

«커밍 업 쇼트»의 결론 장인 <리스크의 감춰진 상처들> 일부를 공유합니다(263~276쪽). 이 책의 분석을 ‘리스크의 감춰진 상처들’을 발견하려는 시도로 정의하고 본문에서 다룬 쟁점들을 정리하는 부분이에요.
신자유주의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리스크의 사유화’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믿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렇게 청년들은 자립, 개인주의, 능력주의라는 문화적 각본을 받아들여 배신의 아픔과 연결을 향한 갈망을 완화합니다.
나아가 성인기에 이르는 자원의 부재로 고통받는 노동 계급 청년들은 거의 유일하게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자아’의 성장을 통해 성숙을 이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인의 의지’에 한층 집착하며 자아 변화에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로 경계선을 긋게 됩니다.
구체적인 분석과 청년들 자신의 이야기는 본문에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결론 장을 읽으시면 전체적인 논의 방향을 파악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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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장의 제목은 리처드 세넷과 조너선 코브의 1973년 책 «계급의 감춰진 상처들»The Hidden Injuries of Class에서 영감을 얻었다. 40여 년 전에 출간되어 이제는 고전이 된 이 사회학적 폭로는 노동 계급의 눈으로 삶을 보여 주면서 계급 불평등의 비가시적이고 감정적인 부담들을 드러냈다.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이룬 것이 없는 기분, 사회적 지위가 높은 타인들과 달리 취약한 위치에 있는 기분, 그런 기분을 느낀 자신을 원망하는 것이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숨겨진 감각”(Sennett & Cobb 1973: 58). 세넷과 코브가 이 책을 집필하던 1970년대는 일자리, 임금, 노동권보다 시장을 더 강조하는 새로운 정치 시대가 개막한 시기다. 이에 따라 노동 계급의 집합적인 행위 능력은 “수많은 부상을 입고” 빈사 상태에 이르렀다(Cowie 2010: 236). 거대 기업들과 치른 전투에서 승리한 전후 노동 계급의 권력은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전환으로 심히 약화되었고, 한때 이들의 집합적 운동에 불을 지폈던 투쟁성은 더 이상 퍼져 나가지 못하고 내부로 침잠해 들었다. 세넷과 코브는 “그리하여 오늘날 계급의 부담은 하나의 기이한 현상이 되었다”면서 “불만의 논리는 사람들이 ‘체계’가 아니라 서로를 공격하도록 이끈다”고 지적했다(1973: 172).
이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누군가를 존칭으로 부르고 그 사람은 나를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를 때 우리 두 사람이 동등한 권력 기반에서 시작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우리의 차이들, 그에게만 베풀어지고 내게는 부정되는 모든 예우와 배려의 상징, 나와 자신의 ‘취향’이나 이해 방식이 매우 다르다는 그의 느낌은 그가 나보다 내면적으로 성숙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인가? [하지만] 이것을 불평등 아닌 다른 무언가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제도들이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승자가 되고 나는 패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건 내 삶이다.……우리가 서로 다른 정거장에서 태어났다 해도, 그가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사실은 어쨌거나 그가 권력을 가지고 있음을, ‘자아를 실현하고’ 우월함을 획득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255~256)

권력이 노동에서 거대 기업으로 넘어감에 따라 산업 노동의 안전과 가치도 점점 더 약화되었다. 경제 영역에서 노동의 쇠퇴는 노동 계급의 의식 변화를 수반했고, 이 계급 성원들은 자신에게 동등한 기회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고 믿게 되었다. 이들이 자신의 단점 때문에 실패했다고 비난받았기 때문이다.
결론부에서 세넷과 코브는 막 “성립하기 시작한”(259) 포스트산업 사회에 주목하면서 이 사회가 조만간 경제적 안전, 자존감, 의미에 미칠 영향을 추측했다. 약 반세기가 지난 뒤 수많은 학술 연구가 미국 산업의 소멸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정책의 부상이 초래한 불안전 및 불확실의 정치경제를 검토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청년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았듯 산업 사회의 표준화된 노동과 인생 경로는 사람들이 삶의 과정에서 길을 찾는 방법과 관련된 근본적인 불확실성으로 대체되었다(Beck 1992, 2000; Bourdieu 1998; Giddens 1992; Hacker 2006a; Sennett 1998).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특히 칭송하는 기술적으로 발전한 글로벌 자본주의는 종신 일자리를 소멸시켜 왔다(Beck 2000). 그 결과 한때 노동 계급의 삶을 고정시켰던 결혼, 종교, 가족이라는 제도가 모양이 맞지 않는 조각들이 되어 버렸고, 이제는 개개인이 혼자 의식적으로 그 조각들을 짜 맞추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제도들의 파편화가 해방의 약속을 제시하기도 했다. 연애 관계의 운명을 더 강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공동체의 성원이나 여성에게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리스크가 점점 더 국가에서 떨어져 나와 개인에게 재분배되는 불안전한 사회 분위기에서 전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개인들은 종종 과거의 연결들—그리고 제약들—을 갈망하곤 한다.
이처럼 급속하고도 전면적인 경제・문화 변형을 고려하면서 나는 시선을 리스크가 감춘 상처로 돌려 세넷과 코브의 연구를 이어 가고자 했다. 더는 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 계급’을 백인 남성 산업 노동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관점으로는 포스트산업적 삶이 직면한 분할과 불평등의 역학을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나는 노동 계급이 된다는 것이 뜻하는 바를 리스크—그것이 사람들 삶의 기회를 구조화하며, 자신이 누구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감각을 형성하므로—가 재구축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분명 내 연구에 등장하는 노동 계급 남성—그리고 여성—을 통합하는 것은 공유된 작업장 문화, 저질의 반복되는 노동에서 느끼는 수모, 남성적인 삶의 영역과 여성적인 영역을 선명하게 관리하는 분할이 아니다(Rubin 1976; Willis 1977). 산업 노동 계급의 자녀들을 1차적으로 특징짓는 것은 산업 노동 계급의 삶을 이루었던 근본 측면들이 소멸하는 상황과 타협하고자 하는 이들의 고투다.
노동 계급 남성과 여성 모두 일자리의 안정성, 규칙성, 영속성을 거의 약속하지 않는 유연하고 무자비한 노동 시장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 생존하려면 집합적인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해야만 하는 시대에 이들은 실업이나 질병, 가족 해체 같은 경제적・사회적인 충격에 맞서 자신을 보호할 자원—지식이든 기술이든 자격증이든 돈이든—이 부족한 현실을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전통적인 정체성・성인기 지표들이 달성 불가능하며 심지어 바람직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에 청년들은 개인의 노력으로 성인 자아를 창출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런데 문화・사회・경제 자본이 부족한 탓에 이들은 이처럼 대단히 위험한 과제에 착수할 도구를 거의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불안전과 리스크는 노동 계급의 어깨를 짓누르는 일상적 부담이 되어 이를 감내하는 이들에게 여러 방식으로 상처를 입힌다.

상처의 원천들

내 연구에 참여한 남녀가 감당해야 하는 위험의 구조적 원천들은 쉽게 집어낼 수 있다. 여기서 구조적이라는 말은 실업이든 상처든 노화든 질병이든 간에 현대 자본주의의 리스크들이 사회 정책 층위에서 관리되고 있음을 뜻한다(Beck 2000; Hacker 2006a; Taylor-Gooby 2004). 이 청년 남녀들에게 리스크란 근본적으로 사적인 것이다. 이들 대다수가 실업과 불완전 고용의 리스크를 지고 있다. 안정된 생활 임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동 시장에서 자신을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단계들—고등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든 일자리가 많은 도시로 이사하는 것이든—을 밟을 형편도 못 된다.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고 기업은 단기 이윤 확대 전략으로 해고를 활용하는 상황에서 노동 계급 남녀는 자신이 “안정된 삶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런저런 임시직을 전전하고 있고 빚을 갚을 방법이 없음을 알면서도 신용카드를 안전망으로 이용한다고 묘사한다. 특히 흑인 남성에게 서비스 경제의 인종주의는 실업의 리스크를 배가시킨다.
또 일터가 만족스러울 정도의 보험 혜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남녀는 혼자 힘으로 질병이나 장애의 리스크를 감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리베카는 신용카드로 수술비를 지불하느라 대학에 가서 교사가 되겠다는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들로리스는 악성 뇌종양을 진단받을 수 있었지만 (그리고 완치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자신의 질환이 우울증이라 믿고는 계속 무료 임상 시험이나 가정 치료 요법을 찾아다녔다. 들로리스의 때 이른 사망은 사유화된 리스크의 위험을 비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사례다.
일부 청년은 잔인한 노동 시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군대로 향했다. 돈도 절약하고 이후 공무원 분야로 진출하거나 번 돈으로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였다. 소수의 남성은 가족을 두고 해외로 파병되어 삶을 리스크에 빠뜨렸고, 그렇게 자신의 남성성을 자본화한 덕분에 더 나은 삶을 약속하는 안정된 공무원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은 수입과 일자리 보장의 가능성을 높이고자 대학에 등록했다. 소수의 응답자—구체적으로는 가족 성원이 대학을 졸업해 지식과 경험을 전수해 준 경우—만이 사회・문화 자본을 이용해 대학을 졸업했고, 그중 간호나 정부 행정 분야에서 일한 이들은 계층 상승까지 이루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학위를 따는 데 필요한 돈도 기술도 없었으며, 막대한 대출금 때문에 자신이 실패자임을 거듭 떠올려야 했다. 겨우 졸업에 성공한 사람들조차도 학위를 이용해 일자리를 구하거나 급여 인상을 시도할 때마다 혼란을 느꼈다. 이 책 첫 부분에 등장한 브랜든의 사례가 말해 주듯 교육은 단순히 “불량품”의 체계가 되어 이들을 가로막는다. “저 종이쪼가리[그의 학위—실바] 하나 얻자고 돈을 그렇게 많이 썼는데 아무 쓸모가 없어요. 물론 학교가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죠. 그래도 이건 너무해요. 학교는 학생에게 보탬이 되어야 하잖아요. 아이 하나 키울 돈을 나라에 바쳤는데 건진 게 하나도 없어요!”

불확실한 세계의 자아

또 노동 계급 남녀는 한층 ‘감춰져’ 있지만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리스크의 상처들로도 고통받고 있다. 즉 리스크는 불확실로 가득한 성장 과정의 주관적 경험까지, 즉 이들이 시간과 미래를 파악하고 타인에 대한 헌신과 의무를 이해하는 방식까지 아우른다(Bourdieu 1998; Giddens 1991; Putnam 2000). 다수의 청년이 경제적 안정과 헌신이 자기 가족을 피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성장했고, 또 불확실한 노동 시장에서 제대로 경쟁할 도구가 없어 현재를 움켜쥐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약간의 희망을 약속하는 미래조차 상상할 수도 없고 이를 위해 행동할 여력도 없다. 일부는 삶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태도를 방어 전략으로 활용한다. 서른네 살 바텐더 코리의 말을 빌리면 목표가 없으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들이 알코올이나 약물에 빠지는 것도, 커뮤니티 칼리지를 중퇴하는 것도, 의도치 않게 임신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롭이나 제일런 같은 다른 이들은 얼마 안 되는 계층 상승 기회를 날려 버렸다. 미래에 투자한들 결실을 맺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때로는 목표를 세우는 것이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성공하고자 리스크를 감수했지만 상황이 한층 악화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는 넓은 사무실 벽에 졸업장을 걸어 놓은 심리학자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부동산 시장의 약탈적인 대출 때문에 계층 상승을 향한 꿈은 압류와 집단 소송, 신용 불량이라는 악몽으로 바뀌어 버렸고, 법학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계획은 지연되고 말았다.
제이컵 해커가 지적하듯 개인이 리스크를 감수하는 사회에서는 그 결과 사람들이 깊은 불안정감을 느끼고 미래에 절망하며 자신 및 더 넓은 공동체에 투자하기를 꺼리게 된다. “노동자와 가족이 심각한 리스크에 처할 수 있는 운명적인 경제적 선택—예를 들어 교육을 더 받을지, 새로운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재훈련을 받을지—에 직면할 때 이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의 리스크를 감수하기 꺼릴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안전한 선택지를 고려하게 된다”(Hacker 2006b: 11). 청년들은 자신이 확보한 아주 약간의 것조차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 막대한 리스크를 짊어지고 있는 이들은 자신이 리스크를 감수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미래의 경로를 바꾸기가 불가능해 보일 때마다 자기 자신을 탓한다. 이렇게 노동 계급 청년은 삶의 궤도를 자기 힘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신뢰감을 결여한 채로 성인이 된다. 청년들이 점점 더 “안전한 선택지”만을 고려하게 되어 자기 투자를 위한 어떤 리스크도 감수할 수 없거나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면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사회적 건전함과 활력은 한층 더 약화될 것이다.
또 노동 계급 청년들은 스스로를 타인들과 완전히 단절된 존재로 이해한다. 이들 다수는 가족이 포스트산업 사회의 가혹함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부모도 자신의 악마와 싸우느라 경제적으로 지원하거나 지식을 전해 주거나 위로해 줄 여력이 없다. 불안정하고 혼란스런 가정에서 자라 일찍부터 외로움과 배신을 경험한 청년들은 성인기로의 이행을 틀 짓는 제도들을 접하면서 그 경험을 되풀이한다. 청년들은 교육이라는 장이 성공을 위한 도구를 손에 쥐여 주리라 믿지만,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사들은 학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소홀히 대하며, 학생들은 교육받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자신이 받은 교육을 경제적 보상으로 전환하는 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러 응답자가 자신이 부적합하거나 속아 넘어갔다고 느끼며 학교를 떠났다. 스스로를 위한 삶을 건설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이들은 제도의 문화 논리가 자신을 피해 간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예를 들어 크리스토퍼는 매일매일 끊임없이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 제도에 의지하는 것이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 말고는 누구도 믿지 않음을 뜻한다.
고립되었음을 알아차리면 연결되고 싶은 갈망이 점화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 개인의 욕망을 초월하는 지속적인 헌신을 강하게 동경하며, 파트너와의 관계를 통해 혼란스러운 삶에서 벗어나 정착하기를 바란다. 흰 울타리 집과 영원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신화적 과거에 대한 향수는 불안정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에서 일시적으로 도피할 기회를 제공하지만 응답자들은 이 환상을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한 채 계속 찾기만 한다. 응답자들은 낭만적 관계라는 장에서 여러 장벽에 부딪힌다. 뚜렷한 젠더 역할과 의무에 기반한 전통적 결혼 관계를 좆는 커플들은 자신의 욕망이 경제 구조와 상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 아버지처럼 남편과 아버지 역할에 충실하고 싶어 하는 커티스는 가족 임금은 고사하고 일자리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커티스의 경우처럼 흑인 응답자들은 안정적인 남성 일자리의 부족 때문에 백인보다 가정을 꾸리기가 더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각자의 자아 가장 깊은 곳까지 성장시킬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자 하는 커플은 자아 실현이 자원을 요구하지만 자신에게는 그 자원이 없음을 깨달으며, 자기의 이해 관계와 욕망을 희생할 만큼 상대방에 대한 헌신이 가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 여성들은 자기 주도성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느낀다. 연애 관계가 초래할 리스크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의 자아감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청년이 실망, 배신, 이별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혼자 살아가기를 택하곤 한다.
의지할 데라곤 자기 자아—고난과 고통을 겪고 힘겹게 획득한—밖에 없는 세계에서 관계는 리스크 가득한 것이 된다. 사랑에 대한 두 가지 불가능한 이상 사이에 붙들린 많은 사람이 만족스러우면서도 지속적인 낭만적 관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응답자들은 자립, 개인주의, 개인의 책임이라는 문화적 이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배신의 아픔과 연결을 향한 갈망을 완화시킨다. 그렇게 하면서 이들은 유순한 신자유주의 주체가 되어 모든 종류의 정부 개입, 특히 차별 시정 조치를 거부한다. 이런 개입이 자기 삶의 경험과 대립하며 자신을 공격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4장에서 살펴보았듯 가족과 잠재적 연대 공동체가 허물어진 상황에서 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경직된’ 태도를 보인다. 남성들은 얼마 안 남은 공공 부문 일자리를 지키고자 경계심을 늦추지 않으며, 성 차별과 동성애 혐오라는 무기를 휘둘러 자기 일자리의 경계를 관리하려 한다. 백인은 흑인이 게으르고 무질서하다며 도덕적 경계선을 긋는다. 흑인 정보 제공자는 인종주의 사회의 리스크를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지 못하는 다른 흑인을 상대로 더 날카롭게 경계선을 긋는다. 사이먼을 떠올려 보자. “헐렁한 청바지나 입고 밥맛 떨어지게 말하고 다니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어요. 인종주의가 아니라 그런 사람이 문제인 거예요. 그게 인종주의라고 말하는 흑인은 질색이에요.” 궁극적으로 노동 계급 청년 남녀는 만일 자신이 혼자서 삶과 전투를 치러야 한다면 다른 모든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아이들은 희망과 헌신의 최후 보루며, 젊은 부모들은 돌봄에서 의미와 구조를 발견하고자 한다. 하지만 종종 불평등이라는 강력한 힘이 아이들에게 안정적인 가정과 기회를 마련해 주려는 이들의 노력을 가로막는다(Silva & Pugh 2010). 이들이 최선의 의도로 노력하더라도 아이들은 성공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주지 않았다며 제 부모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리스크라는 무드

끝으로 자아 층위에서 관리되는 리스크의 효과를 짚어 보자(Furedi 2004; Giddens 1992). 이 청년들은 전통적인 성인기의 의미와 의례에 사로잡혀 있다. 이 모델이 달성 가능하지도, 적합하지도, 단순히 바람직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안정된 공공 부문에서 일하는 소수의 남성만이 전통적인 성인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이 성인이라고 느낀다. 반면 대다수 응답자는 “중간에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다(Brinton 2010). 몇몇 흑인 여성은 성인기로의 이행이 지연된 것을 정당화하면서 종교를 유용한 자원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제도화된 통과 의례가 부재하기 때문에 대다수 청년은 자신의 진보를 표시할 수 있는 개인적인 이정표들을 찾아 나섰다.
삶을 돌아보면서 청년들은 자신이 겪고 이겨 낸 고통, 아픔, 배신을 토대로 자기가 누구며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했다. 특히 감정적인 해결책을 통해 고통의 유산들을 극복하려는 욕구가 이들의 삶에 질서와 방향을 부여했다. 내 주장은 노동 계급 청년 남녀가 무드 경제에서, 존엄을 결혼이나 노동 같은 전통적인 성취보다는 감정적인 자아 관리와 결부시키는 새로운 자아 체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무드 경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기꺼운 마음으로 하라고 명령하며, 그럼으로써 전통적인 생애 경로가 쇠퇴하면서 초래된 의미의 공백에 의미, 진보, 일관성을 채워 넣을 가능성을 제공한다. 치료 서사를 통해 청년들은 고통을 극복해 자아 변형을 이루었다는 전진형 서사로 자신의 성인 자아에 대한 “플롯을 짠다”emplot(Illouz 2008). 모니카처럼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거나 저스틴처럼 커밍 아웃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주장하거나 애슐리와 캐슬린처럼 어머니와 비슷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하는 식으로 말이다.
문화사회학자들은 노동 계급이 치료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고 설명해 왔지만(Giddens 1991; Illouz 2008) 나는 포스트산업 노동 계급 사이에서 새로운 감정적 하비투스—계급화되어 있는 동시에 세대적인—가 나타나는 중임을 지적하고 싶다. 치료 담론은 노동 계급의 삶을 형성하는 제도들에 깊이 배어들어 있으며, 이런 제도로는 사회 복지 서비스, 학교 심리학자, 자조 도서, <오프라 쇼> 같은 대중 문화, 무료 약물 시험, 인터넷상의 동호회나 자조 조임 사이트, 알코올과 약물 중독자 모임 등이 있다. 실제로 인터뷰에서도 이런 제도들이 한층 전통 지향적인 제도(소방관 같은 남성화된 일자리나 종교 등의)보다 더 두드러지게 언급되었다. 이 제도들은 노동 계급이 성인이 되는 궤도를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구조화하며, 사적 영역에서 각자의 감정적 웰빙을 혼자 힘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청년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경제 영역의 신자유주의가 조성한 자립 문화를 강화한다. 행복은 구조적 상황이 아니라 개인 의지의 부산물로 이해되며, 점점 더 늘어나고 있는 청년 세대 노동 계급은 순수하게 감정적인 해결책을 통해 자아 변화와 만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을 상대로 신속하고도 가혹하게 경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감정적인 해결책만으로는 부족하다. 많은 이가 건강한 자아다움에 대한 저만의 비전을 기획할 도구나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족이 고통의 원천이라 생각하는 청년들은 세대를 뛰어넘어 자신에게 상처 입힌 사람들과 분노와 배신감을 소통하지 못한다. 거부와 고통의 경험은 계속 승인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아이작의 가슴 아픈 고백을 떠올려 보라. “상황이 어떤지, 아니면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부모님에게 말하려고 할 때마다 벽에다 이야기하는 기분이에요. 지금처럼 고민이 생길 때면 더더욱 잊고 싶은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라요. 부모님한테 말하려고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둔 것들이 있는데 너무 오래 눌러 담아 놓고 있었나 봐요.” 정신 질환 범주들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응답자들은 치료비를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리고 중독을 물리친 이들은 실업, 빈곤, 절망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다시 약물과 알코올의 유혹을 느낀다. 성인기의 삶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감정들을 통제하고 자아를 변형했음을 보여 주는 데 필요한—물질적이거나 상징적인 자원을 보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은 무드 경제라는 덫에 걸려 이 경제가 제시하는 가치 있는 개인다움의 상像을 실현하지 못한다. 이것이 가장 깊은 상처다.

리스크의 교차로에 서서

서른 살 백인 남성으로 남부에 살고 있는 월리의 삶은 여러 면에서 다른 응답자들의 삶과 매우 비슷하다. 월리의 부모는 지금은 문을 닫은 제지 공장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전기 기술자고 어머니는 서비스 부문에서 시장의 요구에 맞춰 이런저런 일을 해 왔다. 두 사람은 “여러 신용카드를 사용해” 중간 계급 지위를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다. 월리는 가족 관계가 혼란스럽다고 묘사한다. 한때 백인만 살던 동네에 여러 인종이 들어오면서 여동생은 점점 편협해졌다. 아버지는 일자리가 불안정해지자 한층 보수적이고 종교적으로 변했고,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암웨이 같은 다단계 사업”에 뛰어들었다. 부모는 싸우기 시작했고—“엄마가 오늘 아침에 아빠한테 이렇게 묻더라고요. 다시 결혼할 수 있다면 그때도 엄마랑 할 거냐고요. 아빠는 아니래요”—월리는 부모가 내내 불행했다는 증거를 기억 속에서 강박적으로 찾아내려 한다. 결혼에 환멸을 느낀 월리는 헌신하는 관계를 피한다. “딱 맞는” 사람을 만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현재 월리는 “남의 집 소파” 신세를 지고 있다. 첫 달과 마지막 달 월세와 보증금을 낼 여유가 없어서다. 다른 여러 응답자와 비슷하게 그도 “앞으로 제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어요”라고 말한다. 지난 4년간 월리는 빵집, 정육점, 소형 슈퍼마켓에서 일했고, 최근에는 이 슈퍼마켓 냉동 식품 코너를 맡았다. 얼마 전부터 근무 시간이 주 34시간으로 줄었지만 시간당 11달러 75센트를 버는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노동자가 시간당 9달러밖에 못 벌기 때문이다. 많은 응답자처럼 노동 시장에서 지위를 높이고자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강좌 몇 개를 들었지만 곧 그만두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걸 배워서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지금 그는 어떻게든 생계를 유지하면서 지난 몇 년간 쌓인 신용카드 빚을 갚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측면에서 월리는 이 책에 등장한 다른 노동 계급 청년과 크게 다르다. 자신을 “혁명가”라고 묘사하기 때문이다. 10대 때 그는 예술과 음악을 좋아해 버지니아주 리치먼드에서 활동하던 여러 실험 음악 집단에 가입했다. 그러면서 아방가르드 음악 장르인 ‘노이즈’의 정치적 측면에 영감을 받았다. “본질적으로 자유 형식이에요. 내내 예쁜 소리를 내지는 않아요. 예쁜 소리가 뭘까요? 일부 노이즈 예술가의 음악이 모든 사람에게 예쁘게 들리지는 않을지도 모르죠. 안티팝에 가까우니까요. 또 제가 보기에 노이즈는 노동 계급의 음악이에요. 누구나 만들 수 있거든요. 비싼 악기도 필요 없고요.” 음악 공동체에 참여한 이후 독학으로 행동주의를 공부했고—“더딘 독자”로 쉽게 산만해지는 편이지만 요즘 그는 «노동과 좌파에 대한 전쟁»The War on Labor and the Left을 읽고 있다—자신의 정치학을 행동으로 번역하고자 노력 중이다. 월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경제 체계를 크게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미국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관리할 거냐는 문제죠. 내일 당장 혁명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가 그 혜택을 받겠죠. 빼앗긴 것을 되찾는 재교육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을 고무하게 될 거예요.” 그의 정치 기획으로는 버지니아주의 노동법을 강화하는 것, 동료들과 슈퍼마켓에서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에 항의하는 것, 노동절 시위 참여를 조직하는 것, 전 국민 건강보험을 위해 싸우는 것 등이 있다.

자기 일자리가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인지 아닌지를 사람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면 정신적으로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또 사람들이 일자리가 있고 해고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면 부정의에 맞서 더욱 목소리를 높이겠죠. ‘그래, 다른 일자리를 구하면 되지’라거나 ‘해고될 수도 있고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 수도 있어, 하지만……’ 같은 식으로요. 전 국민 건강보험은 분명히 노동자들을 엄청 강하게 만들어 줄 거예요. 저도 일을 그만두면 건강보험이 필요할 때 어쩌나 걱정하거든요…… 일을 그만두면 다른 일자리를 구해 어딘가에 정착해야겠죠.

또 월리는 성 차별과 인종주의를 구조적 문제로 이해하며, 일터에서 여성 동료가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거나 시위와 행진 과정에서 흑인 남성이 과도하게 경찰의 표적이 된 목격담도 들려주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린 시절에 제가 살던 동네는 거의 백인만 있었어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히스패닉 사람들이나 동네로 이사 온 흑인들을 비하하곤 했죠. 많이 슬펐어요. 처음에는 별 반응 안 했지만 나중에는 뭐라고 했죠. 모든 게 얼마나 나쁜지를 점점 배우게 됐어요.” 동네로 이사 오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위협을 느끼는 다른 응답자들과 달리 월리는 사회 정의 추구라는 차원에서 자신과 다른 인종 집단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정치 활동가가 되면 부담도 늘고 좌절도 커진다. 자신이 운영에 힘을 보탠 한 조직을 언급하면서 월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집단적이었는데 분위기가 많이 흐트러지면서 저랑 다른 사람 둘이서 모든 일을 떠맡게 됐어요. 2006년에는 상황이 많이 안 좋았어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잘못했는지도 모르죠. 저 혼자 모든 걸 처리해야 해서 화가 나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개인이 모든 걸 감당하는 곳은 더 이상 집단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들에게 참여를 독려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치 단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시간과 재정 자원도 없었다. 그래도 월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증오하는 모든 것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생각해 봤어요. 그러면서 화를 내거나 완전히 포기하는 건 선택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힘을 내서 지역 모임 같은 데 더 참여하고 있고, 어떤 집단과 같이하고 싶은지 알아보는 중이에요. 저는 모르던 것들을 배우고 있고 단체에 참여하고 있어요. 늘 이런 식으로 상황에 대해 배우는 편이에요. 어딘가에 참여해서 사람들에게 저를 한번 믿어 보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면서 진짜 신뢰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요.” 실망과 실패를 겪었음에도 월리는 동등한 기회, 리스크 풀링, 시장으로부터의 사회적 보호 같은 정치적 목표에 여전히 헌신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라는 감각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리스크가 인간 경험의 상수일 수는 있겠지만 그 리스크를 꼭 개인이 홀로 짊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이컵 해커는 이렇게 말한다.

리스크는 사람들을 결집시켜 공유된 운명 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끌 수 있다. 그러나 리스크는 또 사람들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여러 사회는 리스크를 다양한 방식으로 다룬다. 그런데 모든 대응이 공적인 해결책이나 폭넓은 사전 보호책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불운은 경솔함과 무책임 탓으로 돌려지곤 한다.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 신비한 힘의 작용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 사적인 시장 제도나 공동체의 틀을 통해, 지방정부의 조치나 국민 국가의 막강한 권력을 통해, 혹은 이 모든 것의 일정한 결합을 통해 처리되기도 한다. 물론 리스크가 늘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개인이나 가족이 가능한 한 혼자 힘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으로 남겨지기도 한다. (Hacker 2006b: I)

지난 반세기 동안 사회적 보호책을 시장화하려는 막대한 노력이 기울여졌다. 신흥 금융 제도들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었고(혹은 실패했고), 질병, 장애, 은퇴, 실업 같은 리스크가 개인 부담으로 떠넘겨졌으며, 공적 제도보다 사적 이윤이 우선시되었다(Calhoun 2010). 이런 노력의 귀결은 2008년 경제 위기로 구체화되었다. 대침체에 이어진 빈곤, 불평등, 실업은 사유화된 위험의 리스크를 지속적으로 상기시켜 주고 있다(Krugman 2009).
노동 계급 청년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가 드러내 주듯 리스크 감수의 부담은 개인, 가족, 공동체를 분열시켰으며, 개인의 책임이 의미, 안전, 자유의 열쇠라는 깊고 완고한 믿음만을 남겨 놓았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의해 규정되는 이 시대에 리스크를 집단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은 상식에 어긋난 것으로 여겨진다. 노동 계급 청년은 개인의 선택과 자기 통제를 정체성의 기반으로 이해하며, 미래를 헤쳐 나가는 데 필요한 도구가 없는 원인이 대규모 경제 불안정과 리스크 사유화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월리의 고독한 희망은 리스크라는 밀물에 저항하는 미약한 힘이 남아 있음을 상징한다. 그가 그리는 미래의 핵심에는 동등한 기회, 사회적 연대, 리스크 풀링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또 개인의 고통보다는 집합적인 웰빙에 근거한 자기 가치와 개인성 개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아가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사유화와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희미한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음을 신문, 정치 논쟁, 정책 발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예로 오바마 행정부는 신용카드 개혁을 단행해 리스크의 사유화를 역전시키고 시장으로부터 사회를 더 많이 보호하고자 시도하고 있다(2009년의 신용카드법CARD Act, The Credit Card Accountability Responsibility and Disclosure Act). 이는 청년 소비자가 막대한 빚을 지지 않도록 보호하며 이자율, 위약금, 수수료를 규제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 2009년의 미국 경기 회복과 재투자법American Recovery and Reinvestment Act(‘경기 부양책’)은 일자리 창출과 투자 및 소비 지출 진작을 목표로 삼는다. 나아가 학생들에게 과중한 대출금만 안기고 노동 시장에서의 전망은 주지 못하는 영리 목적의 사립 대학에 대한 지원금도 삭감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기념비적인 법령으로 의회를 통과해 2010년 3월 제정된 적정 부담 의료법Affordable Care Act은 건강 문제에 관한 한 모든 사람이 기초적인 안전을—그리고 시장으로부터의 보호를—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수십 년간 제정된 사회 입법 중 가장 포괄적”(«뉴욕 타임스» 2010년 3월 23일)이라고 평가받은 이 법은 민영 건강보험 산업으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하고(Cohen 2007을 보라) 미가입자들에게 형편에 맞는 건강보험 혜택을 누릴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또 경제 위기 이후 수년간 전 세계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이 소득 불평등, 규제 완화, 공공 지출 삭감, 글로벌 금융에 맞선 연대를 보여 주었다. 2010년에는 영국 학생들이 공립 대학의 등록금 인상안에 저항하고자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이며 정부와 대학 건물을 점거했다. 2011년에는 단체 교섭권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연금이나 건강보험 같은 혜택을 큰 폭으로 감소시키게 될 위스콘신 예산 수정안Wisconsin Budget Repair Bill에 반대하며 수만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런 움직임에 뒤이어 몇 달 후에는 에스파냐에서 인디그나도스Indignados[분노한 사람들] 시위대가 정치 부패와 은행 산업에 항의했고, 그리스에서는 긴축 조치에 저항하는 투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1년 여름 뉴욕에서 시작된 월가 점거 운동은 전 지구로 퍼져 나가 경제 불평등, 탐욕, 부패, 기업이 정부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인식을 고양시켰다. 점거 운동의 슬로건인 ‘우리가 99%다’는 집합적인 ‘우리’의 전망을 간명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리스크를 사회화하려는 움직임들은 극단적인 적대감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단적인 예로 ‘티파티 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운동은 낮은 세금, “재정 책임성”, “헌법에 의해 제한되는 정부”, 공공 건강보험 폐지를 요구한다(“Contract from America” 2010). 대침체로 실업과 빈곤이 전례 없는 수준을 기록하자 정치인들은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더 완화하며 노동조합을 약화시키고 공공 지출을 엄격하게 삭감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항의자들은 경멸과 조롱에 시달렸고, 폭력부터 아나키와 약물 사용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
이렇게 리스크는 열띤 정치 논쟁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새로운 중심은 불안정한 중심이 되고 있다”(Beck 2000: 70). 관건은 자기 가치, 자유, 안전하고 의미 있는 삶의 가능성을 문화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사유화, 개인주의, 개인의 책임이라는 깊이 뿌리내린 문화적 관념들의 실행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했다. 내 연구에 등장한 노동 계급 남녀가 경제적・사회적 불확실과 불안전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은 확실하다. 배신을 겪고 홀로 남겨진 고독한 이들은 미래를 마주 볼 수도,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도, 감정적 웰빙과 자기 존중의 감각에 다다를 수도 없다.
하지만 이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는 여전히 전개 중이며 이들의 미래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성인이 되는 과정에 대한 다른 이야기—희망, 존엄, 연결을 약속하는—를 말할 수 있으려면 이들은 생활 임금, 기초적인 사회적 보호, 미래와 대면하는 데 필요한 기술과 지식을 보장받은 상태로 성인기를 향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계급 연대—백인 남성 노동 계급 중심의 낡은 모델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유연한 정체성과 복수의 목소리를 허용하는 연대—를 위해 인종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 친밀함을 찾는 과정과 관련해서는 신뢰와 확신을 위한 지속적인 헌신이나 자기 충족 때문에 평등주의적인 젠더 이상을 희생하도록 강제하지 않는 문화 모델이 필요하다. 끝으로 노동 계급 청년 남녀는 존엄과 진보의 새로운 정의를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청년들은 성인이 된 이야기를 감정 관리로 환원하지 않고 불안전 및 상실과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모든 공동체가 건강하고 활력을 유지하려면 경직된 자아들이 아니라 연결과 상호 의존을 발전시키는 존엄의 관념들을 창출하고 육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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