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크 피셔의 글 <반-치료>를 공유합니다.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에 대한 일종의 서평이자 조금 더 확장된 논의를 펼치는 글이기도 해요. 번역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옮김 박진철 선생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는 현실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을 환기하는 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전략일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정신 건강’이라는 쟁점을 그런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로 설정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무드 경제와 치료 담론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커밍 업 쇼트»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커밍 업 쇼트»가 출간된 후 이 책을 소재로 몇 편의 글을 쓰거나 대담을 나누었으니까요. 오늘 번역해 블로그에 올리는 이 글도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반-치료>는 2015년에 진행한 한 대담을 전사한 것으로, 생전에는 출간된 적 없고 피셔의 유고집인 «K-Punk»에 수록되어 (영어로) 처음 공개된 글입니다. 여러 책에 대한 논평 형식을 취하는 이 글에서 피셔는 영국과 미국에서 감정 정치가 부상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이 현상이 초래한 두 가지 문화적 곤란을 ‘치료적 상상계의 이율 배반’으로 진단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 이율 배반을 넘어 대항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합니다.
미국과 영국에 만연한 (하지만 한국도 예외가 아닌) 치료 문화에 대한 «커밍 업 쇼트»의 분석을 조금 더 폭넓은 문화 정치/이론 맥락에 두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피셔의 «K-Punk»를 박진철 선생님의 번역으로 2021년 하반기에는 출간하고자 준비 중이에요. 그의 더 많은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께 이 글이 갈증을 조금 해소시켜 주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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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치료[1]
Anti-therapy
마크 피셔 | 박진철 옮김
우리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은 직관에 반하는 듯이 보인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들의 감정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 새로운 감정주의emotionalism는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른 것─자본주의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경제 체제라는 깊이 각인된 생각─의 출현과 동시에 발생한 것 아닌가?
신노동당과 감정 정치의 탄생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 먼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중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영국을 살펴보자.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은 마거릿 대처가 힘겹게 싸운 뒤에야 얻어 낼 수 있었던 것, 즉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외에는 어떤 대안도 없다는 관념을 자연스런 것으로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토니 블레어가 처음 총리가 되고 나서 첫 몇 달은 영국 정치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는 것이 이제 분명하다. 감정 정치라 부를 만한 것이 탄생했던 것이다. 블레어는 영국 정부에 새로운 감정적 정조를 불러들였다. 그는 스스로를 영국의 일부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른바 ‘불굴의 정신’을 지녔던 부모 세대나 그 위 세대보다 더 편안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신노동당이 집권하고 몇 달 되지 않아 다이애나 왕세자비 가 사망했고, 그 직후 벌어진 놀라운 애도의 물결을 블레어와 참모들이 성공적으로 다룬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녀의 죽음은 왕실과 왕실이 갖는 의무 및 감정 제약의 오래된 모델을 곤경에 빠뜨린 것으로 유명하지만, “인민의 왕세자비”라는 표현─신노동당 공보 비서관이었던 앨러스테어 캠벨이 문안을 작성했다─을 남긴 블레어의 유명한 연설은 총리로서의 권위를 확립했을 뿐 아니라 영국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새로운 국면을 개시했다.
캠벨과 영국의 순응적인 미디어 종사자들 덕분에 곧바로 하나의 강력한 서사가 출현했다. 이 서사에서 블레어의 명백한 감정적 개방성은 영국 여왕의 ‘냉정함’과 대조를 이루었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왕실의 특징은 감정을 억압하는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블레어가 스스로를 ‘과거의 계급 정치’로부터 노동당을 되찾고 있는 개혁가moderniser로 포장했듯이, 신노동당은 감정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과 단절했다. 정부는 이제 사람들이 감정적 고통에 대해 ‘올바르고’ ‘건강한’ 반응을 갖도록 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규범적인 어조도 우려스러운 것이었지만 신노동당의 감정 정치는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나 권유 사항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전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감정적 삶에 개입하는 일련의 조치를 통해 건강한 감정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신노동당 자신이 구축한 신자유주의적 권위주의 스타일로, 수동-공격적으로 구축되었다. 건강, 교육, 사회적 통제 등의 문제가 모두 이 기획의 일환이 되었다. 교사들은 감정 경찰 역할을 맡도록 사주받았고, 어린 학생들은 새로운 감정 규범에 순응했다. 낙제라고 판정받은 부모들은 이제 ‘부모 수업’을 받아야 했다.
한편 블레어의 슬픔이 얼마나 진정한 것이었는가라는 물음은 블레어 수수께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외치고 다녔던 교리를 정말로 믿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는 카리스마 있는 쇼 흥행사-조작자와 자본의 피상적인 꼭두각시가 이상하게 조합된 인물이었을까? 블레어는 거울을 볼 때 무엇을 보고 있었으며, 지금은 또 무엇을 보고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자기 기만, 메시아적 망상을 다루고 있는가, 아니면 포스트모던한 새로운 종류의 정신 병리 현상을 다루고 있는가? 이 수수께끼는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현재도 풀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확실한 것은 블레어가 영국 신자유주의의 최종 국면에 필수적이었던 감정적 자기 착취를 일반화하는 데 앞장섰다는 사실이다.
초기의 블레어는 ‘진심 연출하기’spincerity의 기예를 완성시켰다. 이는 실제로 느끼고 있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감정을 공적으로 연출하는 것이다. 영국 경제가 점점 더 서비스업과 판매직에 의존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노동자가 블레어가 공적으로 개척한 감정 가장假裝 테크닉들을 개발해야 했다.
캐스린 에클스턴과 데니스 헤이스는 «치료 교육의 위험한 부상»The Dangerous Rise of Therapeutic Education이라는 책에서 신노동당이 계급 정치가 남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중 치료에 의지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런 치료적 통념은 과거 삶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특히 점점 더 많아지는 소수자에게 치명적이라고 주장한다. 전반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겉보기에는 자신만만해 보이지만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존재이며, 결과적으로 특수한 형태의 감정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2]
에클스턴과 헤이스가 옳았다. 이런 치료적 교리는 널리 공포되어 왔으며, 흔히 별다른 비판 없이 수용되었다. 에바 일루즈가 특히 통찰력 있게 설명한 것처럼 치료적 통념은 심리 치료사들 자신만이 아니라 치료의 모티브와 개념틀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대중 문화를 통해 전파되었다. 신노동당이 계급 투쟁 개념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면서 드러난 공백을 치료[관념]으로 메웠다는 점에서도 에클스턴과 헤이스는 옳았다. 하지만 ‘치료적 전환’therapeutic turn에 대한 에클스턴과 헤이스의 해법은 반동적인 정치에 맞서 또 다른 형태의 반동적 정치를 내세우는 단순한 것이었다. “이성, 과학, 진보”에 기초한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이들의 주장은 겉보기에만 칭찬한 만하다. 그들의 입장은 궁극적으로 보수적이며, 상이한 권위주의들 중에서 고르라는 (거짓) 선택권만을 우리에게 준다. 에클스턴과 헤이스는 신노동당의 부드러운─하지만 침투력 강한─권위주의를 대신해 전통적인 형태의 권위주의로 다시 돌아가자는 시시한 입장을 견지한다. 이들은 또한 치료적 전환에 피상적인 정당성을 제공하는 바로 그 감정적 고립을 부추길 위험도 있다. 내가 여기서 치료적 상상계라 부르고자 하는 것이 가진 문제는 그것이 주체를 상처받기 쉽고 과거 삶의 사건들에 사로잡혀 있으며 자신감을 결여한 존재로 정립한다는 데 있지 않다. 이런 묘사는 지배 계급에 속한 자들을 포함해 자본주의의 주체 대부분에게 잘 들어맞는다. 치료적 상상계의 진짜 문제─이는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이기도 하다─는 앞의 문제점들이 스스로에게 노력을 들이는 개별 주체에 의해, 또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치료사들과 함께할 때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그 밖에도 에클스턴과 헤이스는 교육에서 감정이 갖는 역할을 거부하거나 더 정확히 말하면 감정을 “이성, 과학, 진보”의 반대편에 두는데, 이는 자신들이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고 주장하는 계몽의 기획에 대한 반쪽짜리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리처드 도킨스 같은 이가 이해한 계몽이다. 이런 계몽은 에클스턴과 헤이스가 무시한다고 해도 놀랍지 않은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 그것의 가부장적 편향을 정당하게 비판한 바 있다. 여기서 ‘계몽’은 계급, 젠더, 인종에 대한 대부분 검증된 바 없는 지배 계급의 가정을 단순히 강화하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계몽에 대한 이런 해석은 조너선 이즈리얼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대조된다. 이즈리얼의 서술에서 계몽은 전통적인 형태의 모든 권위의 기초를 무너뜨린다. 이런 계몽은 오늘날의 과학 제도를 독단적으로 고수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개방되어 있는 ‘포스트모던한’ 태도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전통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 ‘권위’의 형태들은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즉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에 따라 그런 권위주의를 어떤 민주적이며 투명한 권위 모델과 대조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급진적 계몽을 규정하는 원리는 사실에서는 아닐지라도 이론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이다. 이는 스피노자의 철학에 생기를 불어넣은 믿음으로, 이즈리얼은 급진적 계몽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이 철학이 제공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의 문제로 돌아갈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스피노자의 철학은 감정을 무시하거나 어떻게 해서든 우회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는커녕 감정 관리를 그 기획의 핵심으로 만든다. 그것의 목표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는 이성이 단순히 감정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기댈 수 있을 때 성취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논리에 따르면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그것을 신화화하고 합리적인 탐구 범위를 벗어나게 만들 따름이다. 이런 모든 것이 스피노자를 탁월한 현대 철학자로, 또 모든 진보적 기획에 불가결한 자원을 마련한 사상가로 만든다. 이는 점점 더 많은 삶의 영역과 정신 세계가 리비도 및 감정 공학에 종사하는 기관들─이들 대부분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자본의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인다─에 의해 지배되는 오늘날 특히 더 그렇다.
표면적으로 신노동당의 권위주의적 감정 정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보충하는 ‘진보적’ 기획의 일환처럼 보인다. 블레어주의는 ‘사회 정의’를 위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본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이상의 무언가를 희망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 여겼다. 그런 기대감은 조직화된 노동 계급이 자본에 대항해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초기 자본주의의 유물이며, 이제는 그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조건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신노동당은 자신들의 굴복이 가령 최저 임금 같은 조치들, 대처를 지지하는 신자유주의 정당이었다면 언제나 가로막았을 조치들을 취할 수 있는 협상의 여지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세력 구성을 수용하고 또 자연화했다. 하지만 신노동당의 감정 정치가 실제로는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를 확립하는 토대였다는 사실이 이제 밝혀졌다. 왜 그런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더 면밀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신자유주의를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치료적 상상계가 담당한 역할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제 영국에 맞춰져 있던 시선을 미국으로 돌릴 것이다.
치료적 상상계의 이율 배반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Coming Up Short: Working-Class Adulthood in an Age of Uncertainty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이 친밀함에 미친 침식 효과를 가슴 아프게 기록하고 있다.
실바의 책은 특히 청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그녀가 미국의 두 도시(매사추세츠주의 로웰과 버지니아주의 리치먼드)에 살고 있는 젊은 노동 계급 남성 및 여성을 상대로 진행한 100편의 인터뷰에 기초하고 있다. 겉보기에 실바의 출발점은 에클스턴과 헤이스의 그것과 유사하다. 실바는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충실함이 자취를 감춤에 따라 치료 언어와 제도—그리고 그것이 약속한 자아 변형—가 폭발적으로 증가”[3]했다고 주장한다. 에클스턴과 헤이스는 신노동당이 치료라는 비유를 채택한 배경에는 기회주의와 권위주의 그리고 서투른 선의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반면 실바가 보기에 미국에서 치료 문화의 확산은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정착되도록 해 준 방편이자 그런 정착의 결과다. 에클스턴과 헤이스에 따르면 치료는 주체성과 문화의 ‘연성화’를 낳으며, 이는 권위가 약화되고 국가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사람들의 삶과 내면에] 침투하는 현상에서 드러난다. 이와 대조적으로 실바가 보기에 치료 개념들의 보급은 개별 주체의 경직hardening이라는 결과를 야기한다. “신자유주의가 정착한 이후 출생한 노동 계급 남녀는……혼자 힘으로 살아가고자 벌이는 고투가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법을 터득했고, 도움을 구하지 않는 태도가 미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그랬으니 다른 사람도 모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4]
이는 신노동당이 연출한 신자유주의와 미국적 맥락의 신자유주의 사이에 차이를 도입한다. 주체(함축적으로는 노동 계급)에 대한 신노동당의 모델은 이중 구속으로 기능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설명하듯이 이중 구속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다. 예를 들어 아들에게 ‘어서 나를 비판해’라고 말하면서 실질적인 비판─적어도 특정 형태의 비판─은 전혀 달가워하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다.”[5] 이런 모순적인 지시는 주체를 불안정하게 만들면서 영구적인 신경증적 불안 상태에 빠뜨린다.
한편으로 노동 계급 주체는 신노동당에 의해 근본적이며 실질적으로 무한한 자기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존재로 호명된다(이런 이데올로기의 가장 중요한 효과 중 하나이자 전제였던 것은 바로 해당 주체에게서 계급적 지위를 박탈한 것이었다. 계급적 ‘정체성’은 주체가 자기 재창조의 무한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방해하는 과거로의 회귀이자 제약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 가령 노동 계급 개인들의 행동이 부득이 신노동당 행정부가 고안한 무수한 감시 및 통제 기관이 단속하는 통제 범위를 벗어났을 때 그 개인들은 곧바로 자기 결정 및 자기 돌봄 능력을 근본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집중적인 훈육(가령 앞서 언급한 부모 수업)의 대상이 되었다.
실바가 묘사하는 미국의 상황도 사실상 동일한 이중 구속으로 작용한다.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공식적으로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던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던 신노동당은 노동 계급에 대한 관리와 훈육을 수동-공격적 용어인 ‘돌봄’으로 표현했다. 이런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결여한 미국의 하이퍼(신)-자유주의는 주체들을 자기 결정 및 자기 재창조를 할 수 있는 자로 호명하는 과정에서 공격적인 투옥을 보충 수단으로 활용했다. 흑인 노동 계급 개인들의 경우에 특히 더 심했다. 치료적인 자아 변형 서사는 알렉스 윌리엄스가 ‘부정적 연대’라 부른 것으로 이어진다. 부정적 연대란 신자유주의 주체가 ‘바닥을 향해 경쟁’하는 경향을 뜻한다. 다른 사람들이 “일해서 벌지 않은” 자원이나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들은 그 자원을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청구한 데 대해 공적으로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즉 모든 사람이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바의 책이 갖는 여러 가치 중 하나는 부정적 연대의 감정적이고 문화적인 근원을 철저하게 밝힌다는 것이다. 실바는 자신이 인터뷰한 사람 대부분이 보인 경직된 형태의 주체성이 수년에 걸친 제도적 포기 및 실존적 포기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영웅적 자아 변형이라는 치료 서사는 더 이상 제도에 의지해 개인을 뒷받침하고 보살필 수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유일한 이야기다. 또 가차 없는 경쟁과 불안전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서로를 신뢰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며, 무엇이 되었든 장기적인 미래를 기획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자연히 이 두 문제는 서로 되먹임하며 신자유주의 문화의 혁신 과정에서 갈라져 나온 여러 악순환 중 하나로 나타난다. 확실한 미래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장기적인 일에 전념하기가 아주 어려워지는 것이다. 실바가 언급한 노동 계급 개인 상당수는 파트너를 치열한 경쟁 사회가 부과한 스트레스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관계 맺기를 추가적인 스트레스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특히 많은 이성애자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는 매우 리스크가 크다고 여겼다. 자신 외에는 의지할 데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키워야 했던 자립심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문화적으로 검증된 성취이자 힘들게 배운 생존 전략이 되었다.
어쨌든 우리가 여기서 만나는 것은 치료적 상상계의 첫째 이율 배반이다. 이는 치료적 통념의 확산이 ‘연성화된’ 주체─실제로 피해를 입은 것까지는 아니라 해도 결핍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주체─와 ‘경직된’ 주체─자신의 강인함에 자긍심을 갖고 있는 주체─를 동시에 낳는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취약함에 과도하게 몰두하는 주체라는 개념을 통해 둘째 이율 배반에 다다를 수 있다. 웬디 브라운은 20년 전에 <상처 입은 애착들>Wounded Attachments[6]이라는 글을 통해 좌파 관점에서 이런 몰두에 내재한 심각한 문제점을 분석한 적이 있다. 브라운은 신노동당을 낳게 될 리비도, 담론, 행정의 복합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쓰고 있다. “자유주의 담론이 정치적 정체성을 본질화된 사적 이해 관계로 전환시키는 동안, 훈육 권력은 이해 관계를 규제 제도가 관리할 수 있는 규범화된 사회적 정체성으로 전환시켰다.” 하지만 브라운 글의 주안점은 1990년대에 그녀가 이 글을 쓴 이후 더 깊이 정착하게 된 정체성 중심적인 정치 구성체의 심리-리비도적 기원을 진단하는 것이었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원한resentment에 대한 해석에 기대어 브라운은 “복수심에 불타는 도덕화를 통해, 고통의 광범위한 전파를 통해, 권력 자체에 대한 비난을 통해 자신의 무력함이라는 고통을 달래려고 하면서까지 자신의 무능함에 깊이 몰두하는” 어떤 정치적 주체성에 대해 기술했다. 브라운은 “따라서 정치화된 정체성은 그 자신의 배제에 집착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바로 그 정체성으로 실존하기 위한 전제가 이런 배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정치적 정신 병리 현상에 대한 브라운의 주의 깊은 진단은 예지적이며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20년이 지나 실질적으로 온라인 환경에 의해 정치적 분위기가 형성되는 오늘날 도덕적 공격과 무능함에 대한 몰두는 서로 섞인 채 급격히 확산되어 왔다. «고등 교육 연대기»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실린 <아카데미를 강타한 성적 편집증>Sexual Paranoia Strikes Academe이라는 글에서 로라 키프니스는 여학생들이 자신을 포악한 강사의 무력한 피해자로 여기게 된 미국 캠퍼스의 상황을 묘사한다. 키프니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캠퍼스 어디서나 권력과 권력 기관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정교한 모델을 구축하려는 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미셸 푸코─권력은 영구적인 수신자나 고정된 원자가valence를 갖는 않는다는 것이 그의 대표적인 사유라 할 수 있을─가 분과 학문들 전반에 걸쳐 미친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조야한 방식의 하향식 권력 모델이 퍼지면서 교수 집단은 우리 콧수염을 잡아 돌리는 악당 역을[스나이들리 위플래시스Snidely Whiplashes라는 악당 캐릭터], 학생들은 철로에 묶여 있는 무력한 여성 역을 맡게 되었다. 학생들은 자유 의지와 자주적 욕망을 결여한 자가 되었고, 교수들은 자진해 순결한 자들을 타락시키려는 비열한 계획을 꾸미는 독재자가 된 것이다.[7]
키프니스의 글은 예상대로 그것이 분석하고자 했던 바로 그 과정에 휘말렸고, 그녀는 스스로를 취약한 이들의 대변자로 생각하는 집단으로부터 맹렬한 도덕적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치료적 상상계의 둘째 이율 배반의 전반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오늘날 많은 주체가 자신을 학대의 피해자들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지적해야 할 것은 내가 키프니스의 논점을 에클스턴과 헤이스의 논점과 합쳐 버리지는 않고 있다는 점이다. 에클스턴과 헤이스의 입장이 궁극적으로 옛 권위 모델을 복구하자는 요청에 해당한다면, 키프니스의 입장은 도덕적 권위주의를 개탄했던, 미국의 학생 운동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 있던 자유주의적 좌파의 태도를 넘어서고 있다. 어떤 지점에서도 키프니스는 실제 학대로 인한 고통을 과소평가하지 않으며 학대의 “생존자들”이 입을 닫은 채 참고 살아야 한다고 암시하지도 않는다.
키프니스와 브라운의 글이 좌파에게 나타나는 실제적이며 만연한 정신 병리 현상들을 조명하고 있다면, 이들의 분석은 정치나 미디어 종사자들에 의한 성적 학대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실제로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는 인식과 비교해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국에서 지미 새빌이 벌인 충격적이고도 기이한 사건이 여기서 분명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최근 미국에서 빌 코스비에게 제기된 혐의도 이를 반향하고 있다). 새빌은 디제이를 하다 쾌활한 연예인으로 변신했으며, 1970년대에 아이들의 소원 성취를 도와주는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인 <짐 윌 픽스 잇>Jim’ll Fix it을 진행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가 사망한 후 여러 해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수많은 아이를 포함해 수천 명에 이르는 피해자를 성적으로 학대했던 것이다.
새빌은 보통의 연예인이나 미디어 인사와는 달랐다. 데이비드 린치 영화의 어떤 등장 인물처럼 새빌은 지하 세계의 범죄자와 가장 영향력 있는 지배 계급의 성원 양쪽 모두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경찰 조사(유트리 작전Operation Yewtree) 결과 새빌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상당수의 동료 또한 소아 성애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유트리 작전의 임무는 연예계에 한정되어 있었고, 새빌은 여러 정치인과 경찰의 친구기도 했다. 새빌에 대한 의혹의 여파 속에서 영국에서는 새로운 스캔들이 불거졌다. 이번에는 정치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소아 성애자로 기소된 자 중에는 대처의 심복이었던 리언 브리턴과 보수당 출신 전 총리인 에드워드 히스도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치료적 상상계의 둘째 이율 배반의 후반부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예전에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학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가능한 것에 대한 감각은 실제로 발생한 일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차라리 그것은 라캉주의 이론에서 대타자라 불리는 가상의 인물이 믿고 있다고 여겨지는 어떤 사태를 가리킨다. 대타자란 공식 담론의 청중으로 상정되어 있는 가상의 관찰자와 같은 무엇이다. 모든 리얼리티 체계의 일관성을 보장하는 것도 바로 대타자다. 집단과 개인이 알고 있는 것과 대타자가 믿고 있는 것 사이에는 언제나 약간의 불일치가 존재한다. 이는 라캉이 언급하듯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는 것이 바로 대타자를 규정하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단과 개인이 알고 있는 것과 대타자가 ‘믿고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가 너무 확연히 드러나게 되면 어떤 심각한 위기가 발생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공식적인 리얼리티 체계가 붕괴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에서 현재 우리가 직면해 있는 상황이라고 의심해 볼 말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난 30년 동안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유지해 왔던 리얼리티 및 리비도 공학 시스템이 2008년의 금융 위기와 시리자나 포데모스 같은 새로운 정치 정당의 출현에 따른 압박으로 고장이 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경우, 즉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자본주의 국가이자 역사적으로 가장 견고하고 효과적인 순화 메커니즘dampening mechanism을 이용하는 문화에서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문화가 가진 정동과 재현의 역량을 극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작동할 수 있었다. 리얼리티 TV, 자기 계발의 구호, 기업 유화 정책corporate appeasement 등─이 모두는 치료적 통념을 강요한다─이 지배하는 문화는 기대치를 낮추고 재현에 있어서의 보수주의를 낳는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로 영국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크게 기여해 온 이 재현 체제는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중 운동을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기득권층의 소아 성애자 스캔들이 야기한 트라우마 또한 받아들일 수 없음이 분명하다. 영국의 지배 계급이 도달한 모종의 극한 상황을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실로 데이비드 린치나 데이비드 피스가 보여 준 것과 같은 형식의 발명이 필요할 것이다. 린치나 피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환상적이며 멜로드라마적인 과잉─모든 곳에서 음모와 학대를 보는 그 경향─은 순수 문학과 대중 문학의 중간급에 속하는 문학과 텔레비전의 점잖은 ‘리얼리즘’이 보여 주는 온건한 재현보다 실제 현실에 훨씬 더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
바로 여기서 둘째 이율 배반이 완전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다. 즉 오늘날 많은 주체는 자신을 학대의 피해자들과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하지만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학대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 두 주장이 모두 진실일 수 있는가? 그리고 두 주장이 모두 진실이라면 그것은 치료적 상상계와 관련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자본은 우리보다 더욱 리얼하다: 자율적 개인 같은 것은 없다
이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전통 전반의 핵심에 자리해 왔던 자율적 개인에 대한 믿음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민주의나 사회주의의 집단주의와 성공적으로 단절을 꾀하는 과정에서 이런 자율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확장하는 데 막대한 이데올로기적 노력을 기울였으며, 더불어 선택과 책임에 관한 극작술dramaturgy을 지원했다.
우리가 개인에 대한 이런 개념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다시 한번 스피노자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의 작업 전체는 이런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있다. 그런데 치료의 맥락에서는, 개인주의적인 치료의 모든 표준적인 수사법을 거부했던 급진적 심리 치료사인 데이비드 스메일에게 의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권력, 이해 관계, 심리학: 정신적 고통에 관한 사회 유물론적 이해»Power, Interest and Psychology: Elements of a Social Materialist Understanding of Distress[8]에서 스메일은 “우리가 사고思考, 결정, 의지 등에서 인과적 과정이라 여기는 것은 흔히 우리의 행동에 동반되는 모종의 논평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상당수의 치료가 가정하고 있는 내면성이란 이데올로기의 특수한 효과에 불과하다. 스피노자처럼 스메일도 이른바 ‘내면’이 실제로는 외부의 접힘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내면’에 있다고 하는 것들 대부분이 더 넓은 사회 영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가 완전히 ‘심리적’이라고 여기는 특징 대부분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례는 아마도 ‘자신감’일 텐데, 전문가들이 ‘신경증’이라고 ‘진단을 내리는’ 개인적 고통의 근원에는 흔히 이런 자신감의 상실이 자리하고 있다.”[9] 이는 인지 행동 치료 같은 것의 기본 원리와는 반대로 자기 변화를 위한 수단이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심리적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흔히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아무리 변화하기를 원하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어떤 정신적 훈련을 한다 해도 그들의 삶이 한결같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자율적 개인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능력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획득되고 분배되며, 일부 능력(가장 강력한 능력)은 우리가 가닿을 수 없는 곳에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 행동의 의미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실제로 아무런 통제도 할 수 없는 문화적 체계(중심부뿐만 아니라 말단의 것까지)를 경유할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10]
이것이 바로 모든 개인적 치료─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호의적인 심리 치료사가 행한 것이라 해도─가 이제껏 제한된 효과밖에 가질 수 없었던 이유다. 더 넓은 사회적 영역이 개인에게 입힌 피해와 진정으로 타협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스트레스의 개인화privatisation를 역전시킬 수 있는 집단적 실천에 나설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제니퍼 실바의 언급을 떠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페미니즘 같은 사회 운동에서 자기 인식이나 자기 문제 명명하기는 급진적인 집단 인식의 첫걸음이다. 그런데 현재의 청년 세대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걸음이며, 그 어떤 종류의 연대와도 전혀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구조에 뿌리를 둔 비슷한 문제들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우리’라는 감각은 가지고 있지 않다. 고통을 명명하는 방식을 통한 집단적 정치화는 더 넓은 지배 구조에 포섭되기 쉽다. 왜냐하면 분투하고 있는 타자들을 같은 고통을 감내하는 동료가 아니라 경멸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11]
치료 서사의 확산은 의식 고양 운동이 야기한 분자 혁명을 억누르고 개인화한 한 방식이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를 무너뜨리려는 투쟁은 반드시 이러한 예전의 대중 운동을 재발견하거나 재발명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제기한 물음에 답할 차례가 되었다. 우리의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감정이, 보통은 이데올로기가 은폐하는 비개인적인 상호 주관적 구조를 가시적으로 만드는 의식 고양 운동의 일부가 되는 때다.
[1] 이 글은 2015년에 나눈 대담을 전사한 것으로 이전에는 출판된 적 없다. 반면 독일에서는 “Anti-therapie” in Felix Klopotek and Peter Scheiffele ed., Zonen der Selbstoptimierung: Berichte aus der Leistungesellschaft, Matthes & Seitz, 2016에 번역 수록된 바 있다.
[2] Kathryn Ecclestone and Dennis Hayes, The Dangerous Rise of Therapeutic Education, Routledge, 2008.
[3] Jennifer M. Silva, Coming Up Short: Working-Class Adulthood in an Age of Uncertainty,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p.19[«커밍 업 쇼트: 불확실한 시대 성인이 되지 못하는 청년들 이야기», 문현아‧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50쪽].
[4] Ibid., pp.16~17[같은 책, 46~47쪽].
[5] Gilles Deleuze and Felix Guattari, Capitalism and Schizophrenia:Anti-Oedipus, Continuum, 2004, p.53[«안티 오이디푸스», 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6] Wendy Brown, “Wounded Attachments”, Political Theory, Vol.21, No.3, August 1993, pp.390~410.
[7] Laura Kipnis, “Sexual Paranoia Strikes Academ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 27 February 2015, http://laurakipnis.com/wp-content/uploads/2010/08/Sexual-Paranoia-Strikes-Academe.pdf.
[8] David Smail, Power, Interest and Psychology: Elements of a Social Materialist Understanding of Distress, PCCS Books, 2005, p.39.
[9] Ibid., pp.39~40.
[10] Ibid., p.46.
[11] Silva, Coming Up Short, p.142[«커밍 업 쇼트», 2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