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보이어는 «언다잉»의 <막을 올리며>에서 유방암에 걸린 뒤 그 사실을 어떤 형태로든 기록한 여성 작가들을 소개합니다. 이는 이들과 동행하겠다는 의지 표명인 동시에 이 작가들이 직면했던 문제 하나가 자신의 기획에도 출몰해 있다는 사실 확인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가요.
사회는 암 환자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갖추라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싸워 이기라고, 유방암처럼 젠더화된 암의 경우 여성성을 유지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맞추어 생산된 수많은 승리 서사가 소음을 이루며 진실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을 쓰고자 하지만 그 진실이 대체 무엇이며 어떻게 전달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유방암은 형식을 흐트러뜨리는 질문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질병”이며, 오늘날의 과제는 “툭하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묵살해 버리는 소음에 맞서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처럼 <막을 올리며>는 이 책 전체의 문제 의식과 목표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이 나아갈 방향을 가리켜 주지만, «언다잉»의 매력은 그 방향마저 흐트러뜨리고 수많은 가지를 치면서 예상치 못한 형식으로 뻗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낯선 여정에 여러분도 동행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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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을 올리며
1972년, 수전 손택은 ‘죽어 가는 여자들에 관하여’나 ‘여자의 죽음’ 혹은 ‘여자는 어떻게 죽는가’ 등의 제목을 염두에 둔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소재’라는 표제를 달아 놓은 일기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죽음, 마리 퀴리의 죽음, 잔 다르크의 죽음, 로자 룩셈부르크의 죽음, 앨리스 제임스의 죽음 등 열한 사람의 죽음을 목록으로 정리해 두었다. 앨리스 제임스는 1892년 마흔둘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유방 종양을 “내 가슴 속에 있는 이 불경한 화강암 덩어리”라고 묘사한다. 1974년 마흔하나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손택은 암 치료 후에 저술한 «은유로서의 질병»에 앨리스의 그 일기 내용을 인용한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사적인 내용을 배제한 채로 암을 다룬 글이다. 손택은 ‘나’와 ‘암’을 같은 문장에 병치하지 않는다. 레이철 카슨은 암의 문화사 분야에서 단연 명저로 손꼽히는 «침묵의 봄»을 집필하던 시기인 1960년 쉰셋의 나이로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1964년 사망 때까지 자신의 유방암 투병 사실을 공개하지 않는다. 손택이 유방암 치료 기간에 쓴 일기는 기록이 띄엄띄엄하고 분량도 적다는 점이 유독 눈에 띈다. 분량이 적다는 사실은 유방암으로 인해 치러야 했던 비용, 즉 장기간에 걸쳐 인지 능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항암 화학 요법 치료의 주된 결과인 사고력 상실을 예증해 준다. 1976년 2월, 항암 화학 요법을 받고 있던 손택은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내게는 정신의 체련장이 필요하다.” 바로 다음 일기는 그로부터 수개월 후인 1976년 6월의 기록이다. “편지를 쓸 수 있게 되면……”
재클린 수전의 1966년 소설 «인형들의 계곡»에 등장하는 인물 제니퍼는 유방암 진단 이후 유방 절제술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다가 고의로 약물을 과다 복용해 사망한다. 제니퍼는 이렇게 말한다. “내 평생 암이라는 단어는 죽음과 공포, 온몸이 움츠러들 정도로 끔찍하디끔찍한 무언가를 의미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암에 걸려 있다. 재미있는 건 암 그 자체는, 혹여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으로 밝혀질 암이라 한들,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 암이 내 삶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가 두려울 따름이다.” 1932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페미니스트 작가 샬럿 퍼킨스 길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암보다는 클로로포름이 낫다.” 마흔넷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재클린 수전은 손택이 유방암 진단을 받은 1974년에 유방암으로 사망한다.
1978년에는 시인 오드리 로드가 마흔넷의 나이로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잘 알려져 있듯 «암 일지»에서 로드는 손택과 달리 ‘나’와 ‘암’을 같은 문장에 병치한다. «암 일지»는 로드가 경험한 유방암 진단 및 치료 과정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종의 결의도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이 한낱 비애의 기록으로만 남지는 않았으면 한다. 이 책이 한낱 눈물의 기록으로만 남지는 않았으면 한다.” 로드에게 유방암이라는 위기는 “전사가 자신에게 남은 최후의 무기를 필사적으로 점검하는 시간”을 의미했다. 로드는 1992년에 유방암으로 사망한다.
1810년에 유방암 진단을 받은 영국 소설가 패니 버니도 로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유방 절제술 경험을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한다. 버니의 유방은 마취제 투여도 없이 제거된다. 그는 의식이 또렷한 상태로 유방 절제술의 전 과정을 겪는다.
……며칠도 몇 주도 아닌 자그마치 몇 달 내내, 그 끔찍한 사건을 입 밖에 낼 때마다 꼼짝없이 그 시간을 처음부터 다시 견뎌 내야만 했어! 떠올리기만 해도 밀려드는 고통에 속수무책이었고! 그 병 하나 때문에 아픈 건 물론이고 심신이 다 망가질 정도였어. 더군다나 지금도, 그 일이 있은 후로 9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두통이 찾아오는 데다가! 이 비참한 이야기……
«은유로서의 질병»에 암에 관한 글을 어떻게 담아낼지 숙고하던 손택은 일기에 “경구적으로 쓸 것”이라고 적는다. 유방암은 어쩌다 “그 끔찍한 사건을 입 밖에 낼”지도 모르는, “이 비참한 이야기”를 털어놓을지도 모르는 ‘나’라는 존재와 불안하게 공존한다. 이 ‘나’는 암에 의해 말살될 때도 있지만, 암의 대리인에 의해 선제적으로, 말하자면 자살에 의해 혹은 ‘나’와 ‘암’이 하나의 사고 단위 속에 공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작가적 완고함에 의해 말살될 때도 있다.
‘2014년, [……]은/는 마흔하나의 나이로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혹은
‘2014년, 나는 마흔하나의 나이로 [……] 진단을 받는다.’
소설가 캐시 애커는 1996년 마흔아홉에 유방암 진단을 받는다. 애커가 «가디언»에 기고한 <병이 준 선물>은 암에 관한 이야기를 유례없이 솔직하게 풀어 낸 글로, “나는 이 이야기를 내가 아는 그대로 들려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지금도 이상한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 나도 도통 모르겠다. 나는 감상적인 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 애커는 자신이 왜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알지 못하지만 일단 한다. “작년 4월 나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시점으로부터 18개월도 채 지나기 전인 1997년에 사망한다.
유방암은 유방 조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병이지만, 여자들은 유방암이라는 재앙에 직면하면 막대한 무게를 짊어지게 된다. 그런 재앙은 때 이른 사망, 고통스러운 죽음, 심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치료, 심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치료의 후기 효과, 파트너나 수입 또는 능력의 상실 같은 모습으로 구현되지만, 또한 질병에 관여하는 복잡한 사회적 조건들, 즉 질병의 계급 정치, 젠더에 따라 부과되는 한계, 죽음의 인종 차별적 분배, 혼란스러운 지시를 내렸다가 혹독한 신비화에 빠뜨리기를 반복하는 질병의 계략 따위를 거쳐 찾아오기도 한다.
유방암처럼 여자에게 사실상 재앙에 가까운 질병이 소수에 불과하다면, 유방암만큼 막대한 고통을 야기하는 질병은 그보다도 극소수다. 그런 고통은 유방암이라는 질병 자체가 유발하는 통증만이 아니라, 유방암에 관해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할지, 유방암에 관한 글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할지 같은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유방암은 형식을 흐트러뜨리는 질문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질병이다.
형식에 관한 그런 질문에는 흔히 서로 상충하는 의도적 삭제와 삭제된 부분에 대한 해석 및 정정이 답변으로 제시된다.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시인인 오드리 로드가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대상은 암이며, 그에게 질병을 둘러싼 침묵은 정치로 향하는 입구가 된다. “내가 할 일은 지금껏 더불어 살아온 침묵들 속에 존재하면서 그 침묵들이 더없이 눈부신 낮과 더없이 요란한 천둥의 소리를 갖게 될 때까지 나 자신으로 한가득 채우는 것이다.” 백인 상류층 출신 문화 평론가인 수전 손택이 의도적으로 삭제하는 대상은 사적인 내용이다. 손택이 추후 «은유로서의 질병»으로 출간한 글의 후보 제목들을 두고 고심하며 쓴 일기에는 이런 문장이 들어 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손택이 집필을 구상하기는 했으나 끝내 쓰지 못한 글의 네 번째 후보 제목은 ‘여자와 죽음’이었다. 손택은 “여자들은 다른 여자를 위해 죽지 않는다. ‘자매의’ 죽음 같은 것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나는 손택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매의 죽음이란 여자들이 다른 여자를 위해 자기 목숨을 던지는 죽음이 아니라, 서로 유리된 상태에서 나란히 맞이하는 죽음에 가깝다. 자매의 죽음은 여자들이 여자라는 이유로 치르는 죽음이다. 1991년 마흔하나의 나이로 유방암 진단을 받은 퀴어 이론가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은 유방암을 둘러싼 문화가 놀라운 방식으로, 때로는 잔인한 방식으로 젠더를 끌어들인다는 사실을 다룬 글을 썼다. 유방암 진단을 받고 세즈윅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빌어먹을,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여자네.” S. 로클랜 제인이 «악성»의 <부치 같은 암>Cancer Butch에서 말하고 있듯이 유방암은 “아주 멋들어지고 하찮은 진단 하나가 당신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리겠다고, 여성의 몸이 조금씩 나눠 갖고 있는 원형적 죽음 속으로 침잠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무언가다”. 세즈윅은 2009년 유방암으로 사망한다.
손택의 말마따나 여자들이 서로를 위해 죽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유방암으로 인한 죽음에 있어 여자들이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적어도 지금 같은 ‘인식’의 시대, 돈벌이가 되는 핑크 리본 포장이 ‘치유’를 대체한 시대에 우리는 공공선을 위해 우리의 삶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삶의 이야기는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과거에 로드는 유방암을 둘러싼 침묵에 맞서 글을 썼지만 이제 그 침묵의 자리는 유방암을 둘러싼 언어가 내는 유례없이 끈질긴 소음이 차지하고 있다. 현시대에 주어진 과제는 침묵을 뚫고 입을 여는 것이 아니라, 툭하면 우리 삶의 이야기를 묵살해 버리는 소음에 맞서 저항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선뜻 자기 자신과 병을 연관 짓지 않으려 했던 손택과 카슨의 머뭇거림은 이제 늘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로, 병을 앓는 여자들을 위해 그래야만 한다는 의무로 대체되었다.
애커가 그랬듯 나 역시 감상적인 쪽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강변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음 문장에는 나 자신과 내 유방암이—감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면—적어도 이데올로기적인 이야기의 형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2014년 나는 마흔하나의 나이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러고 보면 유방암이 지닌 형식 차원의 문제는 정치적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이데올로기적인 이야기란 왜 말하려는 건지도 모르면서 여하간 하는 이야기다. ‘나’와 내 ‘유방암’이 같이 들어 있는 위 문장은 유해할 정도로 어디에나 존재하게 된 ‘인식’의 영역에 진입한다. S. 로클랜 제인이 설명하듯 침묵은 더 이상 유방암 치료법을 찾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 아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암은 진창에 빠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유방암에 걸린 이들 가운데 핑크 워시된 인식 지평에 주기적으로 발을 들일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은 다름 아닌 유방암 생존자다. 승자들이 향하는 곳에는 서사적 전리품이 뒤따른다. 유방암 투병기라면 응당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를 통해 살아남은 ‘생존기’여야 한다. 즉 자가 진단과 유방 방사선 촬영을 제대로 이행한 원자화된 개인, 시킨 대로 한 덕분에 치료된 질병, 5킬로미터 마라톤, 유기농 녹색 채소 스무디, 긍정적인 사고 등으로 구성된 서사여야 한다. 엘런 레오폴드가 유방암에 관한 개인사를 담은 «더 어두운 리본»에서 지적하듯이 1990년대에 부상한 신자유주의는 유방암에 관한 서사적 관습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외부 세계가 하나의 기정 사실로, 사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 배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만을 다루는 글쓰기가 오로지 죽음만을 다루는 글쓰기인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만을 다루는 글쓰기는 특정 유형의 죽음을, 혹은 정치나 집단 행동, 광범위한 역사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를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기도 한다. 현재 유방암을 다루는 일반적인 문학 형식에는 유방암의 산업적 병인, 의학의 여성 혐오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역사와 관행, 믿기 어려울 정도의 수익을 창출하는 자본주의 기계, 유방암이 유발하지만 계급에 따라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고통과 죽음이 누락되어 있다. 자기 자신만을 다루는 글쓰기는 죽음에 관한 글쓰기일 수도 있지만, 죽음에 관한 글쓰기는 만인에 관한 글쓰기다. 로드는 이렇게 썼다. “나는 살아남지 못한 여자들의 이름을 내 심장에 문신으로 새기고 다닌다. 그리고 그 심장에는 이름 하나가 더 새겨질 공간이, 내 이름을 위한 공간이 남아 있다.”
손택은 유방암 진단을 받은 해인 1974년 일기에 이렇게 기록한다. “지금까지 내 사유의 방식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구체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나치게 추상적: 죽음. 지나치게 구체적: 나.” 그러면서 “추상적이기도 하고 또한 구체적이기도 한” 중간 조건을 인정한다. 그 조건이란—자기 자신과 자신의 죽음 사이에 위치한, 추상과 구체 사이에 위치한—“여자”다. 손택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자 완전히 새로운 죽음의 우주가 내 눈앞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