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

오늘은 앤 보이어의 에세이 한 편을 공유합니다. «언다잉»의 전작인 에세이 모음집 «어긋난 운명 안내서»A Handbook of Disappointed Fate 첫 글로 수록된 <아니요>No입니다. 보이어가 무엇을 쓰고자 하며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글이에요. ‘아니요’라는 부정이 “내 예술의 논리를 이끄는 주축”이라 선언하는 보이어는 자본주의적 ‘예’를 거스르는 ‘아니요’에서 부정과 긍정의 가능성을 동시에 끄집어 내며, 시에 이 가능성이 새겨져 있다고, 아니 새겨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아직 앤 보이어라는 시인이 낯설게 느껴질 한국의 독자에게 단호하고 진실하면서도 불명료함의 여지를 남기고자 하는 그의 문학을 조명해 줄 수 있으리라 판단해 저작권자 앤 보이어의 허락을 받아 번역해 게재합니다. 이 글을 통해 회고록 집필자가 아닌 시인 앤 보이어의 면모를 확인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이 글과 «언다잉»에서 서로의 메아리를 확인할 수 있음을 감안하면 «언다잉»이 어떤 정신에 입각해 쓰인 작품인지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거예요.

* * *

아니요No

앤 보이어
양미래 옮김

역사 속에는 ‘그냥 하지 않기’를 택한 사람이 넘쳐 난다. 그런 사람들은 됐어요,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사막으로 달아났고, 술독에 빠져 살았고, 자기 집을 불태워 버렸고, 자기를 해한 강간범을 살해했고, 저녁 식사를 뿌리쳤으며, 빛에 가닿기를 꾀했다. 거부를 행하는 건 젖먹이도, 노인도 마찬가지다. 동물도 거부를 행한다. 동물원에 갇힌 동물들이 플렉시 유리 너머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인간의 면전에 배설물을 내던지지 않는가. 몇몇 계급도 거부를 행한다. 빈곤 계급은 바리케이드를 향해 자신의 삶을 내던지고, 노동 계급은 생산 라인 속도를 늦춘다. 노예로 부려진 사람들은 진수성찬에 독약을 풀고 배아의 성장을 중단하면서 실종일관 거부를 행했다. 어디서든 존재감을 발하는 근면 성실한 무단 횡단자들은 그 무엇보다 가시적인 방식으로 교통 질서에 당당히 맞섬으로써 하루의 첫 일과로 ‘그냥 하지 않기’를 행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요를 행하기 위한 하나의 사전 준비 방법이다. 말하지 않기를 연습하는 것은 굴하지 않기를, 특히 군중 속에서라면 더더욱 굴하지 않기를 연습하는 것과 같다. ‘쿰 타켄트 클라만트’cum tacent, clamant[1]—“침묵 속에서 그들은 아우성친다”—라고 쓴 키케로가 옳았다. 침묵을 동의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침묵은 동의이기도 하나 그만큼 모반이기도 하다. 평소 같으면 왁자지껄했을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권위자를 응시하는 공간에는 침묵이 감돌며, 그 침묵 속에서 ‘우린 하지 않겠어’라는 결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때로 우리는 지시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거부를 행한다. 우리는 척척 해내기를 숙달하기에 앞서 딴청 피우기를 통달한다. 아장아장 걸음을 떼는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우리도 한때는 어른들이 옆에서 야단법석을 떨든 말든 조그마한 몸으로 클로버잎이나 바닥 타일을 야무지게 살폈다. 10대 시절에도 우리는 딴청을 피웠고, 기숙사 밖으로 나가게 해 달라고 경비원에게 사정했다. 경찰들의 주 임무가 개들이 공동 분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던 어느 시골에서 본 수많은 자유로운 방랑견처럼. 한 무리가 쫓겨나면 새 무리가 접근하던 거기 개들은 꼭 쇼핑몰에 들어선 10대 같았다.

때에 따라 내가 말하는 우리란 뭔가를 하지 않은, 뭔가를 할 생각이 없는, 몸으로든 정신으로든 동조할 생각이 없는 특정 우리만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이 뭔가를 공모하면서 웃고 있는 동안 이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잠자코 서 있고, 길을 막고,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유령처럼 배회하고 무단으로 불참하며, 거부를 행하는 동안 불가사의하게도 내면에서 무능함이 자라나 무언가를 시도할 엄두도 못 내고 있음을, 모든 자본주의적 를 가능케 하는 온갖 무자비하고 순환적인 조건 속에서 점점 병들고 우울해지고 꼼짝도 못 하고 있음을, 무언가를 진심으로 하고 싶을 때조차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건 이를테면 제방의 규모를 알게 된 강물이 그 위로 넘쳐흘러 보려고 애쓰는 대신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라비틀어짐으로써 제방의 뒤통수를 치겠다고 마음먹는 것과 다름없다.

죽음의 이면에 거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머리에 총을 겨누는 행위조차 하나의 도발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 사람은 메리 맥카시였으리라—거부의 이면에 죽음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며, 대체로 죽음은 최선의 선택지는 아닐지 몰라도 여하간 선택지이기는 하다. 거부로서의 죽음이 필요로 하는 재료는 오로지 삶뿐이다. 행여 삶이라는 재료가 거부를 부추기는 상황 속에서 저렴한 값에 조달된다 해도, 아니요를 행한다는 대의명분에 선택적으로 동원되면 다시금 고귀해질 수 있다.

때로 시는 그 자체로 아니요다. 시의 상대적 침묵은 은밀한 방식으로 부정성을 노래하는 소리다. 격렬한 움직임이 가득한 외부 세계에서 드넓고 다양한 내부 세계로 도피하는 시의 행위는 때로 지시를 따르지 않는 한 방법이다. 10대와 혁명가 사이에서 비교적 인기를 끄는 시가 능숙하게 해내는 일은 무언가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고 무언가와 정반대되는 아무 말이나 던지며, 유의미한 말에 대고는 무의미한 말을, 우려스러울 만큼 무의미가 넘쳐 나는 세상에 대고는 유의미한 말을 하는 것이다. 아니요를 말하는 온갖 시 중에서도 단연 우아하게 거부를 행하는 작품은 기예르모 파라Guillermo Parra가 번역한 베네수엘라 시인 미겔 제임스Miguel James의 <경찰에 맞서>Against the Police다.

경찰에 맞서

내 모든 작품은 경찰에 맞선다
내가 쓰는 사랑 시는 경찰에 맞서는 사랑 시고
내가 몸의 벌거벗음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는 경찰에 맞서는 노래며
내가 떠올리는 지구에 대한 은유는 경찰에 맞서는 은유다
내가 시 속에서 부르짖는 목소리는 경찰에 맞서는 목소리며
내가 애써 창작해 내는 시는 경찰에 맞서는 시다
내가 쓴 시어, 시구, 시절은 전부 예외 없이 경찰에 맞서며
내가 쓰는 모든 산문도 경찰에 맞선다
내 모든 작품은
이 시를 포함한
내 작품 전체는
경찰에 맞선다

잘 알려져 있듯 시인들은 자기 자신을 은둔자나 성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문 거부자로 규정했다. 때로 월계관을 쓸 때도 월계관이 아닌 가시 면류관을 쓰듯 했던 에밀리 디킨슨, 그웬돌린 브룩스Gwendolyn Brooks, 조지 오펜George Oppen, 아미리 버라카Amiri Baraka는 ‘이건 아니야’라는 정신을 모시는 판테온에 서 있다. 아닌 것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위한 판테온은 시가 선사해야 마땅한 최고의 신전이다. 그런 신전에는 문학적 명성을 제물로 바치면서 피운 향 연기가 가득하고, 백안을 치켜뜨는 문화 자본에 부친 파산 통지서들이 어질러져 있고, 본래 그 공간에 내재된 커다란 불길이 훈훈한 온기를 발하며, 누구보다 유명하고 누구보다 무명인 자들이 거주한다. 그곳에서는 비겁한 어쩌면의 형태를 취한 시도, 현란한 의 형태를 취한 시도, 사람을 질리게 만들고 찬동적인 동시에 반동적인 데다가 위신을 애호하며 뭐든 하라는 대로 하겠어라고 우짖는 절박한 열망의 형태를 취한 시도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아니요가 좋다. 아니요no는 역방향으로 외우는 만트라(옴om) 같은 주문이다. 아니요는 은밀하고, 어디로든 이동 가능하며, 결코 축 늘어지는 일이 없다. 아니요는 내 예술의 논리를 이끄는 주축이며, 어쩌다 잘못 입 밖에 내게 되더라도 발화된 소리 자체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무언가를 거부하면 거부하지 않은 것이 되레 부각될 때가 잦은 터라, 시인 가운데 단연 위대한 거부론자들이 사용하는 거부조차도 다소 모순적인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시인의 아니요아니요라는 등껍질을 둘러맨 일 때가 상당히 많다. 시인의 아니요는 드물기는 해도 가끔은 어떤 시 자체에 대한 아니요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시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암울한 집단과 풍경에 대한 아니요다. 시인의 아니요는 화학 물질의 진부한 효과와 화학 전쟁에 대한 아니요, 고용과 법률 만능주의에 대한 아니요, 역사 그리고 탐욕으로 코팅된 지구를 비참하게 그리는 방식에 대한 아니요다.

때로 시는 형식적 전략을 동원해 거부를 행하는데, 그런 전략 중에서도 가장 단순한 전략은 ‘세상의 전복’이라 불리는 시 기법이다. 아래에 제시한 월트 휘트먼의 시 <전치>Transpositions는 거부를 행하고자 역전의 힘을 빌린다.

연단에서 끝없이 아우성치고 있는 개혁가들은 내려오고—백치나 광인이 그들의 연단에 오르게 하라
판사와 범죄자의 자리를 뒤바꾸고—교도관이 수감되게 하고—죄수들이 감방 열쇠를 쥐게 하라
출생과 죽음을 교란하는 그들이 나머지 이들을 이끌게 하라

<전치>는 사회 계급을 전복함으로써 그런 계급의 존속을 강제하는 구조가 작동 불가능함을 폭로한다. 이 시는 독자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거부를 행하고 나름의 ‘전치’를 글로 써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관대함과 지속성을 갖추고 있다. 가령 독자들은 뭔가를 취한 다음 그걸 전복하거나, 뭔가를 취한 다음 그걸 다른 뭔가로 만들면 된다. 혹은 뭔가가 아닌 것을 취한 다음 그걸 뭔가로 만들거나, 뭔가를 취한 다음 그것의 주머니에서 잔돈이 후두두 떨어져 나올 때까지 흔들면 된다. 아니면 어떤 계급 제도를 취한 다음 그 계급의 최하위층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최상위층을 이루는 범주들에 끼워 넣거나, 여러 계급 제도를 되는대로 많이 취한 다음 각각의 구성 요소들을 뒤섞는 것이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1935년에 쓴 에세이 <진실 쓰기: 다섯 가지 어려움>[2]에서 역전 기법을 동원한 어느 고대 이집트 시의 일부를 인용한다.

그러하니, 귀족은 비탄에 잠기고 하인은 환희에 차노라. 온 도시가 외치네, 우리 무리 안에 있는 강자들을 몰아내자고. 관공서는 공격당하고 서류는 사라지고 없네. 노예는 하나둘 주인의 자리에 오르고.

그러하니, 명문가의 자제일지언정 더는 인정받지 못하노라. 안주인의 자식이 이제 안주인이 부리던 노예 소녀의 아들 신세거늘.

그러하니, 나리들은 맷돌만 한 바위들에 묶여 있노라. 그날을 한 번도 목도하지 못한 이들은 빛을 향해 떠나고 없구나.

그러하니, 흑단 헌금함들은 박살 나고 귀한 세스반 목재는 절단돼 침대가 되고 있노라. 보라, 수도가 한 시간 만에 몰락했노라. 보라, 이 땅의 빈자들이 부자가 되었노라.

브레히트는 이 시가 “억압받는 자들에겐 몹시 바람직해 보일 수밖에 없는 종류의 무질서를 묘사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다만 그럼에도 시인의 의도는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라고 설명한다. 역전 기법을 동원하긴 해도 이 시는 ‘세상의 전복’을 직접 촉구하는 식의 정치적 모험을 무릅쓰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그런 전복을 상상함으로써 불가능한 것의 불가능성을 완화한다. 익숙지 않은 질서가 시라는 안전망 속에서 인지적 예행 연습을 거치고 나면, 수도가 한 시간 만에 몰락할 수 있다거나 이 땅의 빈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도 그리 가망 없는 일처럼 들리지 않게 된다. 그러나 수도의 몰락은 인지적 예행 연습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예행 연습까지 거친다. 즉 수도의 몰락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상연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 사이에서 공유되며, 그런 공유 과정 중에—집단적 노력이 뒷받침되어야만 충족될 수 있는—시의 욕망은 실현을 향해 전진한다.

거부는 단지 가끔가다 시의 형식을 취할 뿐, 시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세상의 전복은 더러 시의 형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단어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단어는 값싸고 일상적이고 어디로든 이동 가능하고 관대하다는 점에서 세상을 전복하기에 유용한 수단인 데다가 성냥이나 마체테와 달리 어쩌다 잘못 사용한다 해도 우리를 심히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지 않지만, 시는 단어로 이루어지는 만큼 생각, 비유, 수사, 구문으로도 구성된다. 우리는 언어 없이도 시를 지을 수 있다. 시작詩作의 예행 연습을 위한 재료로서의 언어가 사물로 직조한 시, 활동으로 직조한 시, 환경으로 직조한 시, 그리고 이것들의 배치로 직조한 시 등 또 다른 시의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시인이 되면 세상을 전복하는 것의 예행 연습만 해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 머리 위에 의자를 올리는 것부터 시도해 보자.

전치와 전복은 단 한순간에 불과할지라도 이 세상을 거부하며, 이윽고 재배열한다. 그리고 시 또한 어휘의 전복을 실현한다. 즉 거부론자 시인의 ‘반대’는 명민하고 너그러운 ‘찬성’으로서, 부정성을 발전시켜 천재성을 이끌어 내고 반대항을 확대해 예기치 못한 몰락과 포용을 아우른다. 그런 시인이 쓰는 어휘는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하거나, 영국 시인 숀 버니Sean Bonney의 다음 설명에 공명한다.

사탄을 가리키는 우리의 단어는 사탄을 가리키는 그들의 단어와 같지 않다. 악마를 의미하는 우리의 단어는 악마를 의미하는 그들의 단어와 같지 않다. 죽음을 뜻하는 우리의 단어는 죽음을 뜻하는 그들의 단어와 같지 않다.[3]

이 세상에서 거부당한 질서를 규정하는 어마어마한 논리에 입각한 ‘아니요’는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시의 아니요는 잠재적인 를 보호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의 아니요존나 좋지 혹은 모든 존나 좋지의 변형을 보호할 수 있는 단어다. 이렇듯 경찰에 맞서는 모든 시는 이 세상을 향한 사랑을 지키는 변함없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1] 키케로의 『카탈리나 반박문 1편』 In Catilinam I에서 발췌. “그들의 침묵은 무량한 의미를 담고 있다”로도 번역된다.
[2] 이 에세이에는 다음과 같은 유용한 조언도 담겨 있다. “자본주의에 맞서지 않으면서 파시즘에 맞서는 사람들, 야만 행위가 야기한 야만 행위를 두고 통탄하는 사람들은 송아지를 도살하지 않으면서 송아지 고기를 먹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송아지 고기를 먹지만 피를 보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도살자들이 송아지 고기 무게를 측정하기에 앞서 손을 씻으면 그걸 보고 쉽게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야만 행위를 야기하는 소유 관계에 맞서지 않는다. 오로지 야만 행위에만 맞설 따름이다. 그들은 야만 행위에 맞서는 목소리를 내지만, 꼭 그런 소유 관계가 지배하는 국가에서나 그리할 뿐 도살자들이 송아지 고기 무게를 측정하기에 앞서 손을 씻는 국가에서는 그리하지 않는다.”
[3] 숀 버니의 블로그 ‘버려진 건물들’Abandoned Buildings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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