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봄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의 글 <끝없는 봄>An Endless Seeing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 2022년 1월 13일 자에 실린 글이고,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Copyright © 2022 Jacqueline Rose).

이 글은 2021년 출간된 로버트 자레츠키Robert Zaretsky의 «전복적 시몬 베유»The Subversive Simone Weil: A Life in Five Ideas에 대한 서평 격으로 쓰인 글입니다. 로즈는 자레츠키의 책을 다루는 대신 이를 매개 삼아 베유의 생애 및 생각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합니다. 그리하여 특정 책의 서평보다는 재클린 로즈 버전의 ‘시몬 베유론’이라 할 만한 글이 탄생했어요.

이전에 재클린 로즈가 시몬 베유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알고 있었던 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중동 문제를 살핀 저작 «마지막 저항»의 제사로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한 구절(“힘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런 저항도 없는 공간을 걸어 나갑니다. 그 주변의 인간 물질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그의 충동과 행위 사이에 생각이 머물 짧은 틈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을 사용했다는 사실 정도였어요. 어쩌면 베유를 본격적으로 다룬 첫 글일지도 모를 이 서평에서 로즈는 베유의 저작과 노트, 편지를 오가며 ‘정의’라는 이념에 주목합니다.

로버트 자레츠키는 «전복적 시몬 베유» <서론>에서 베유의 모순적인 면모들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보수적인 이상들을 옹호한 아나키스트,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평화주의자, 세례를 거부한 성인, 노동 투사인 신비주의자, 영국 공동 묘지의 가톨릭 구역에 묻힌 프랑스 유대인, 문제 해결의 중요성을 무시한 교사, 자아의 소멸을 주장한 가장 의지 넘치는 개인.” 로즈 역시 “베유의 글들을 단 하나의 가닥으로 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정의를 이 가닥의 가장 근사한 후보로 내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글의 가설이에요. 로즈가 말하길 “정의는 그의 후렴구였다”.

이 글에서 로즈는 베유의 생각과 행동이 얼마나 이 지상의 평등에 대한 열망에 뿌리내리고 있었는지 감동적으로 밝혀냅니다. 또 베유의 신학이 맞닥뜨린 딜레마를 이해하고 “베유의 생각과 글과 존재가 베유 자신의 고통스러운 비전에 대한 최선의 반격”이라는 견해를 (앤 카슨을 따라) 제시합니다. 자신의 유대인성을 부정한 태도를 (베유 자신의 정의관에 비추어) 질책하기도 합니다. 떨쳐 내기 어려운 여운을 남기는 마지막 문장에서 로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구의 정전 반열에 드는 작가 가운데 우리를 그처럼 세계 끝까지 밀어내면서도 그토록 확고하게, 그리고 결연하게 우리를 발아래 지면에 붙들어 놓는 이가 나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시몬 베유의 지적‧실천적 궤적을 따라가기가 여전히 요원한 한국에서 이 글이 우리를 베유에게 이끄는, 베유를 읽도록 초대하는 또 하나의 길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2021년에 출간된 베유의 여러 책과 함께 읽어 봐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재클린 로즈는 정신분석을 기반으로 시각 문화, 페미니즘, 문학, 유대인 문제, 국내외 정치 등 오랫동안 다양한 방면에서 글을 써 온 영국의 작가이자 연구자입니다. «시각 영역에서 섹슈얼리티», «실비아 플라스의 유령», «판타지의 상태들», «마지막 저항», «어두운 시대의 여자들», «숭배와 혐오», «폭력과 여성에 대한 폭력» 등등의 책을 펴냈고, 국내에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에 포함된 <에드워드 싸이드에 대한 응답>과 «시각과 시각성»에 수록된 <섹슈얼리티와 시각>, 저서 «숭배와 혐오» 등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주석은 모두 옮긴이 주입니다. 가능한 선에서 재클린 로즈가 인용한 시몬 베유 글 출처를 밝히고자 했습니다.


끝없는 봄
An Endless Seeing

재클린 로즈
리시올 출판사 편집부 옮김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1937년과 1938년에 두 차례 이탈리아를 방문해 생애에서 손꼽을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1938년 파리에 돌아온 그는 젊은 의과 대학생인 장 포스테르나크에게 편지를 띄워 “지난 몇 년간 저는 기쁨이 정신 건강 차원에서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 재료라는 이론을 고수해 왔습니다”라고 말하고는 기쁨의 부재는 “광기나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1] 마조레 호수에서 출발해 밀라노, 피렌체, 로마를 거치며 문화 유적을 둘러본 이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그는 두통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죽는 게 낫겠다고 느껴질 정도로 심할 때도 있는 두통이었다. 베유에게서 “기쁨”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연상하기란 쉽지 않다. 반면 “광기”라는 멸칭은 끊임없이 그를 따라다녔다. 베유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주로 광기를 그와 결부시켰는데 그중에는 생애 마지막 해에 런던에서 쓴 레지스탕스 관련 논고들을 통해 그를 알게 된 샤를 드골도 있었다.

그런데 베유가 지닌 고유한 천재성의 중추가 바로 분별력을 잃어 가는 한 세계의 시민들 사이에서 발현되기 시작한 광기의 위협을 알아채는 능력이었다. 그의 글은 현대의 사회 배치들이 초래한 견딜 수 없는 잔혹함―노동자의 비참, ‘백인종’에게 식민화되어 뿌리 뽑힌 세계 여러 지역, 정치적 의지의 폭력적인 추진력으로서 힘―과 인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상처를 입히는 시련을 직선으로 잇는다. 파시즘의 승리라는 위협 아래 있음에도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탈리아 방문 기간에 베유는 여러 파시스트와 마주쳤다. 그중 한 명은 베유의 공공연한 반파시즘에 반박하며 사회에서 당신이 점한 “정당하고 정상적인” 자리가 소금 광산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그는 오히려 반갑다는 듯이 대응했다. 이 지상에 감도는 정치적 기류―“국민주의적 강박, 가장 잔혹한 형태의 권력에 대한 흠모, 집단성(플라톤의 ‘거대한 짐승’), 죽음의 위장한 신격화”―보다는 소금 광산 밑바닥이 숨 쉬는 데는 분명 더 나으리라는 것이었다.[2] 마찬가지로 2차 직전 전야의 프랑스에서도 “질식할 것 같은 도덕적 기류”가 떠돌았다. 이 나라가 이등급 열강으로 강등되는 불명예에서 탈피하고자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루이 14세와 나폴레옹(자신이 “우주 전체가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사랑하는” 대상이라 믿은)에게 여전히 “도취”된 상태로 말이다.[3]

이처럼 현혹된 대중 분위기의 귀결은 “허풍 및 공포와 혼합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수두룩한 거짓말과 허위 정보와 선동”이었다.[4] 그가 브렉시트라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영국이나 중국의 영향력 상승에 맞닥뜨린 미국을, 동일한 운명을 모면하고자 각자 분투 중인 두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베유에게 그런 비탄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자유, 정의, 예술, 사고, 여타 유사한 종류의 탁월함”은 지배적인 국민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반대다. 한층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싶다면 생각의 규모를 줄여야 한다(베유가 가장 선호한 단어 하나가 ‘무한소’infinitesimal였다). 그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프랑스의 분별력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나머지 유럽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요.”

베유는 정치 철학자, 혁명적인 노동 조합 활동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성스러운 진리를 탐색한 신비주의자, [민족적] 유산을 거부하고 가톨릭에 귀의한 유대인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 고전 연구자, 시인, 간헐적인 조각가, 미완성 희곡을 쓴 극작가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왜 나는 내게 필요한 만큼 무한하게 실존하지 않는 걸까?” 그는 정의의 여신상이라는 발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썼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서 있는 여자, 무릎은 피로에 찌들어 꺾이고 두 손은 등 뒤에 사슬로 묶인 채, 같은 무게를 올려놓았지만 양팔 길이가 달라 기울어 있는 저울을 든 여자. 무게에 짓눌리고 몹시 지쳐 있더라도 그의 낯은 평정을 잃지 않을 터였다. 그의 글을 읽을 때면 자주 그러듯 이 이미지를 베유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읽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정치적‧도덕적 시야가 언제나 자신이 살아간 지상의 실존 영역 너머를, 자신이 거의 내내 경멸한 그 영역 너머를 응시했음에도 그렇다. 어쩌면 그는 꿈속에서 자신을 조각하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주형은 보편적이었다. 정의는 모두를 위한 것, 그게 아니라면 아무도 위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의가 여자의 형상을 취한 건 우연이 아니다. 베유의 전기 작가이자 막역한 친구 중 하나였던 시몬 페트르망에 따르면 베유의 어머니는 강간을 막기 위한 살인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하나의 예외라고 딸에게 말했다. 훗날 베유는 강요된 매춘을 거부하는―자기 존재 전체를 “고조”시킴으로써―젊은 여자의 이미지를 참된 정치의 모델로 삼았다. 안티고네와 엘렉트라가 베유의 히로인이었는데, 이 둘이 속한 그리스 계보는 베유가 근대 서구 세계의 문화 가치 중 가장 귀중히 여긴 것들의 원천이었다(베유는 소포클레스 희곡 여러 편의 중심 구절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특히 말년에 베유는 자연권을 초월하는 불문법에 호소한 안티고네에게 다시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보기에 자연권은 언제나 개인의 요구로 전락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주장하길 그리스인에게는 권리라는 관념이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라는 단어로 만족을 했지요.”[5]

베유의 생애를 연구한 최근작 «전복적 시몬 베유»에서 로버트 자레츠키가 상기시키듯 베유 글을 열렬히 옹호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알베르 카뮈가 있었다. 베유에게 헌정된 1949년 «신 프랑스 평론» 특집호에서 그는 정의야말로 베유가 자기 작업 전체를 “봉헌한” 원리라고 설명했다(그는 베유에게 이것이 하나의 영적인 소명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정의는 “분명히 그를 으뜸가는 자리에 올려놓”아야 한다. 생전에 베유가 이 포상을 “고집스럽게 거부”했음에도 말이다.[6] 카뮈는 자신의 예견을 현실화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에스푸아 총서 편집자로서 그는 베유 저작 일곱 권을 출간했다. 1934~1935년의 경험을 토대로 공장 노동이 초래하는 인간의 퇴화를 설명해 호평받은 «노동 조건»부터 전쟁기의 망명을 계기로 집필한 마지막 장편 에세이이자 내쫓음의 악함을 명상한 작품인 «뿌리내림»에 이르는 이 책들은 일종의 원호를 그린다.

베유는 비범한 결과물들을 산출했고, 여기저기 기고한 에세이들을 제외하면 생전엔 단 하나도 출간되지 않았지만 결코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잊히리라고 확신했으나 이 전망에 실망하지는 않았다. 1943년 7월에는 부모에게 마지막 편지 중 하나를 보내 자기 내면에는 순수한 금이 있고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어야 하겠지만 아마 그렇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내적인 확신을 전했다. “그게 괴롭진 않아요.”[7] 베유는 한 명의 난민이었다. 그는 어디서든 자신을 망명자로 묘사했다. 부모와 함께 그는 나치 점령이 임박한 프랑스를 떠나 뉴욕으로 갔다. 처음에는 1940년 6월 13일에 파리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싣고 마르세유로 향했다.

미국에 도착했지만 조국 사람들을 버린 기분을 느낀 그는 곧바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런던으로 가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영국-프랑스 해협 건너편에서 활동하던 레지스탕스 세력에 합류하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낙관으로 충일한 마지막 편지들에서 그는 급속한 건강 악화를 부모에게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1943년에는 결핵으로 미들섹스 병원에 입원했지만 회복은 요원했다. 프랑스에 있는 동포들이 구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편지 중 하나에서 그는 부모에게 “적당한 수준의 희망”을 알렸다. 그는 서른네 살 나이에 죽었다.

사망 후에 부모는 진력을 다해 그의 작업을 옮겨 적었다. 여기에는 그가 최후의 몇 달간 쏟아낸 모든 글도 포함되는데, 이 마지막 글 중 일부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술이기도 하다. 시몬의 생애 마지막 해에 태어난 조카 실비 베유에 따르면 소유권 문제―이 방대한 문서를 어떻게 보관하며 출간할지―가 발생해 남은 가족을 사실상 조각 내 버렸다(실비는 시몬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이자 저명한 수학자인 앙드레 베유의 딸이다). 회고록인 «앙드레와 시몬 베유, 그들과 함께 집에»(2010)에서 그는 시몬을 이렇게 나무랐다. “고모는 이 피폐해진 얼굴들을 제게 남겼어요.”

자레츠키가 지적하듯 베유의 글들을 단 하나의 가닥으로 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어려움에 대처하고자 자레츠키는 자신이 보기에 베유의 생각을 가장 잘 대표하는 다섯 가지 주제를, 즉 불행affliction, 주의attention, 저항resistance, 뿌리들roots, ‘선한 것, 나쁜 것, 신적인 것’the good, the bad, and the godly을 추려 냈다(이 마지막 주제는 베유 버전의 신비주의를 지시하는데, 여기서 실질적인 윤리적 삶의 참된 원천 하나는 영적인 염려다). 이는 초점을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도 알고 있듯 베유의 착상들이 구획되는 탓에 구분과 분리가 생겨난다. 반면 대개의 경우 베유의 개념들은 때로는 창조적이고 때로는 비틀린 혼합물이나 흐릿함 속에서 다른 개념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다른 개념에서 빠져나온다. 베유의 글은 여러 가닥으로 엮은 복잡한 태피스트리 같다. 한 가닥을 당기기 시작하면 손안에서 형체를 잃고 마는 태피스트리.

그런데 저 목록에서 ‘정의’가 누락된 건 «전복적 시몬 베유»가 전반적으로 유익하고 사려 깊음을 감안할 때 이상한 삭제처럼 느껴진다. 베유의 심장은 정의를 간절히 원했다. 정의는 그의 후렴구였다. 정의 개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의 거의 모든 집필 단계를 거듭 이끈 원칙이다. 이 개념은 신비주의자 베유를 활동가 베유에게서, 신을 사랑하는 자인 베유를 공장 노동자 베유―근대 세계의 잘못들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여자와 남자를 기계 톱니로 환원해 노예처럼 부리는 육체 노동의 가혹한 치욕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느낀―에게서 분리하려는 어떤 시도도―많이도 이를 시도했지만―헛된 것으로 만든다.

베유는 여러 차례에 걸쳐 심경 변화를 겪었다.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히틀러가 1939년 3월에 프라하를 침공하자 이전의 평화주의를 버린 것이다. 이때쯤에는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당과 노동 조합에 근거를 둔 어떤 종류의 정치도, 혹은 그가 점점 더 국가의 필연적인 전체주의 권력이라 생각한 것(히브리인과 로마인부터 히틀러에 이르는)도 믿지 않게 된 상태였다. 그가 이 목록에 히브리인을 포함한 것에는 근거가 없었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를 그의 글에서 가장 위태롭고 불성실한 요소로 간주했다. 하지만 몇 차례에 걸쳐 생각을 바꾸었음에도 그는 특정 사안에 관해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끝까지 그는 더 공평한 세계를 위해 행동하는 방법이라는 문제에 몰두했다. 과거 베유의 제자였던 안 레노-게리토는 베유의 «철학 강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세례받지는 않았더라도 본능적으로 타고난) 그리스도교인, ‘스스로 허락한 양 이상으론’ 먹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1943년 런던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이 그리스도교인은 내가 알던 사람, 1933년에 자신의 임금을 로안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나눠 준 사람과 동일 인물이다”.[8]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식사량을 정해 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례 모두에서 베유는 그 자신의 한 조각을 바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정의라는 저울에 올려놓고 있었다. 베유의 공장 노동과 농장 노동은, 비록 비판자들이 그렇게 특징지으려 노력했지만(그 자신의 양심에 봉사하는 짓 혹은 양심을 위해 악조건을 감수하는 짓이라며), 나르시시즘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노동은 1971년에 법 이론가 존 롤스가 제시한 입장, 즉 인간이 스스로의 자리를 불리하고 억압받는 자의 자리로 상상하기를―혹은 베유의 사례처럼 스스로를 그런 자의 자리에 두기를―불사할 때만 정의가 달성될 수 있다는 입장을 선취한 것으로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941~1942년의 마르세유 노트에서 그는 “사다리 제일 밑단이 내 자리라고 믿을 때만 나 자신을 우선시하는 대신 타자들을 나와 평등한 자로 여기게 된다”라고 적었다. 그는 자신을 순교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보편적 책임의 한 형태를 직접 증명하고 있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 말을 남긴 바 있다. “나는 그가 온 세계와 함께 뛰는 심장을 가진 게 부럽다.”

베유는 사태가 한창일 때 그 안에 있기를 원했다. 열 살 때 파리에서 그는 노동 시간 단축과 임금 상승을 요구한 데모에 참가했고, 1년 후에는 실업자들을 돕고자 다시 거리로 나갔다. 1930년대에는 오트-루아르의 르 퓌에 소재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한편 시 채석장에서 돌을 깨는 힘들고 보수는 턱없이 부족한 일거리를 받은 실직 노동자들을 위한 데모를 이끌었다. 그는 선동죄로 고발당했고 교사 자격을 박탈하겠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카페에서 한 노동자와 동석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위원회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사생활을 묻는 질문은 사절입니다”라고 답했다.

파리의 주간지 «르 샤리바리»는 그를 “유대인 여자 마담 베유”, “모스크바 투사”로 묘사했다(이 일화는 ‘시몬 베유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다른 출처들은 적그리스도가 르 퓌에 당도했다고 보도했다. 실크 스타킹을 신고 옷차림은 남자 같은 적그리스도가 말이다. 이 중 후자만이 사실이었다. 베유가 실크 스타킹을 신었을 리는 없으니까. 그는 평생 반대 성별처럼 입었다. 한번은 부모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가기로 합의했는데, 그 대신 특별 주문한 턱시도를 입을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어머니는 그가 소녀의 “실실거리는 우아함”보다 소년의 “솔직 담백함”을 갖추도록 북돋고자 갖은 애를 썼다. 젊은 여자였음에도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당신의 아들, 시몬”이라고 서명했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인 1942년 베유는 뉴욕에서 오래전 학교 친구인 모리스 쉬망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고난과 위험을 좇는 유일한 이유는 타자들이 당하는 억압이 자신의 심장을 찔러 대며, 자신의 능력들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직 행동만이 “무익한 원통함에 소모되는 것”을 피하게 해 줄 터였다.[9] 오늘날 그의 마지막 계획―점령된 프랑스에 간호사들을 낙하산으로 투입해 목숨을 걸고 돌봄 임무를 수행하게 만드는 것―을 접하는 사람은 이 계획이 우리가 코비드-19에 대응하는 모든 병원에서 목격하는 것, 즉 새로운 형태의 전 지구적 연대와 얼마나 유사한지 깨닫고 깊이 감명받을 것이다. 세계의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 아니라 더욱 악화하는 팬데믹의 몇 안 되는 긍정적인 결과 중 하나인 이 연대와 말이다. 베유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계획을 열렬히 고수했지만 베유의 가장 굳건한 지지자 중 한 명에게 계획을 전해 들은 드골은 그가 미친 여자라며 일축했다. 거듭된 거절에 깊이 상심한 그는 비통함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검시관을 비롯해 많은 사람의 생각과 달리 그의 죽음을 자살로 성급히 분류해선 안 되는 합당한 하나의 이유). 시몬 페트르망에 따르면 런던에서 베유를 돌볼 책임이 있던 그 누구도 그가 죽고 싶어 했다고 믿지 않았다.

수많은 정치 사상을 괴롭혀 온 중심 문제 하나는 왜 정의를 파악하기가 늘 그토록 어렵냐는 것이다. 이 질문과 씨름하면서 베유는 인간 권력에 대한 심리학자가 되었다. 아테네 역사가이자 장군이었던 투키디데스는 베유가 여러 번 인용한 어느 구절에서 이렇게 썼다. “어디서든 명령할 권력을 쥐기만 하면 누구나 명령을 내리기 마련이다.” 그 누구도 타자에 대한 지배에 저항할 수 없다. 저항할 경우 남는 선택지는 가련한一지배당하는―처지로 전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은 이렇게 이어진다. “다른 모두가 마찬가지지만 당신 역시 일정 정도의 권력을 획득하면 곧바로 똑같이 행동하리라는 걸 당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이 “당신”은 총칭으로 모든 사람을 아우른다).[10] 무엇보다 정의는 두 가지 의미 모두에서 팔[무기]을 내려놓으라고 요구한다. 베유가 논평하길 정의는 “초자연적인 덕”을 필요로 하는데 당신이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건 정의를 위해선 세계가 평등한 것처럼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것”은 신적 은총에 고취되는 것과 초인적 노력을 요구하는 것 모두를 암시한다. 모든 사람에게 요청하기에는 너무나 과도해 보이지만 말이다.

권력에 대한 이 성찰들은 신에 대한 그의 가장 깊은 명상인 1942년 텍스트 «신을 기다리며» 중반에 나온다. “참된 신은 전능한 신이지만 그는 어디서든 명령할 권력을 쥐더라도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다”(이로써 신은 투키디데스의 규칙을 벗어나는 하나의 예외가 된다).[11] 사실상 “신은 이 우주를 실존케 하고 스스로 명령할 수 있으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12] 창조를 통해 신은 “모든 것”이기를 포기했다. 인간의 비참함을 이유로 신에게 반기를 들면 신을 세계를 통치하는 ‘주권자’나 폭군으로 잘못 재현하는 셈이 되며, 이는 신이 자신의 권력을 내려놓았다는 사실과 대치된다.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는 건 인간의 몫이다. 이는 자유의 한 형태거나 신적인 포기의 한 형태 혹은 둘 모두다.

대체로 ‘신을 기다리며’waiting for god라고 번역되는 아텅트 드 디외Attente de Dieu를 ‘신의 기대’god’s expectation로 옮길 수도 있다. 인간이 이 약속을 완수하길 신이 기다린다는 식으로. 이를 위해 인간은 강자들이 애지중지하는 그릇된 확신, 즉 자신의 정의가 약자들의 정의보다 더욱 육중하다는 확신을 버려야만 한다. 자신의 특권이 공정하다는 특권층의 믿음만큼 불의를 영속화하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베유가 마르세유 노트에서 관찰한 것처럼 “부자들은 자신이 [아무나가 아니라] 누군가라는 믿음에 확고히 이끌린다”.

자신의 가장 뛰어난 에세이 중 하나로 런던에서 보낸 마지막 몇 달 동안 쓴 <개인성과 성스러움>에서 베유는 다음과 같은 관찰을 제시한다. 불안정한 세계에서 특권층은 양심의 가책을 도발(“당신들이 갖지 못하는 특권을 제가 갖는 건 완전히 온당합니다”)이나 양심 불량(“저는 주장합니다. 제가 가진 특권들을 여러분 모두 똑같이 가져야 합니다”)을 통해 누그러뜨린다는 것이다.[13] 그가 논평하길 후자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거들먹거림이다. 전자는 단순히 끔찍하다. 미국 보수주의가 뻔뻔스러운 태도로 전자를 긍정한다면 영국 보수주의는 역사적으로 둘 사이를 진동하며 오갔다. 오늘날에는 ‘당신의 특권을 확인하세요’라는 발상이 공적 어휘 목록에 등록되어 비판 세례에 직면하고 있다. 당신의 특권을 주시하기만 하면 전부 괜찮아지겠느냐며 말이다(특권 확인이라는 발상은 베유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

‘탈창조’decreation는 의심의 여지 없이 베유의 가장 어려운 개념이다. 창조의 순간에 신은 자신의 작은 조각들을 흘렸고, 이로써 인간 존재는 신도 인간도 불완전한 채로 남겨 두는 어떤 제스처의 부스러기가 되었다. 1969년 발표한 소설 «이혼»으로 잘 알려진 수전 타우베스는 베유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이른 주해 중 하나를 남긴 바 있다. 거기서 타우베스는 인간 실존이 “신에게 범한 우리의 가장 위중한 범죄”라는 베유의 명제를 해명한다. 인간은 자신을 ‘탈창조’해야만 하는데 그래야 자신이 잃은 신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우베스가 보기에 베유는 일종의 부정 신정론negative theodicy을 창조했다. “신의 부재라는 어두운 밤은 그 자체 영혼과 신의 접촉이다.” 고통은 “우리를 세계에 붙들어 매는 끈을 잘라 버릴” 정도로 견딜 수 없는 것이어야만 한다.[14] 타우베스가 파악했듯 결국 베유는 자신이 천국에서 보상받으리라고 혹은 자신의 고통이 신의 최종 목적에 봉사하리라고 확언하는 이들뿐 아니라 고통을 겪는 이들도 심각하게 모욕하고 있다.

베유 스스로도 자신이 제시한 세계가 영적 난문을 포함하고 있음을, 자신이 이 난문을 해결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1942년 12월에 영국에 도착하고 1943년에 미들섹스 병원에 입원하기 전 어느 시점에 그는 모리스 쉬망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내 지성도 심장 한가운데도 점점 더 황폐해지는 것 같아. 인간의 불행과 신의 완전함, 그리고 둘 사이의 연결 고리에 대한 진실을 동시에 생각할 수 없는 무능 때문에.” 그는 극도의 실망감을 느꼈다.

오페라 <탈창조> 대본에서 앤 카슨은 베유의 딜레마를 한결 친절하고 시적으로 연출한다. 그에 따르면 베유가 신과 자신, 창조 전체를 가지고 에로스적인 삼각형을 그린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낫다. 카슨이 인용하듯 베유는 “정혼자를 기다리는 여자가 아니라 성가신 제삼자다”.[15] 1942년에 쓴 뉴욕 노트에서 베유는 신을 끈질기게 조르는 여자로 비유했다. 이 여자는 연인에게 착 달라붙어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속삭인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해요”(신비주의자답게 베유의 신앙은 그의 글이 지닌 감각성을 결코 손상하지 않는다). 카슨에게 베유는 사포 및 14세기 프랑스 신비주의자로 화형당한 마르게리트 포레트와 더불어 자아나 에고가 용해되는 “절대적인 영적 대담함의 구역에 들어설 정도로 용기 넘치는” 인물이었다.[16]

이것이 베유의 생각과 정신분석이 공명하는 단적인 순간이다. 1933~1934년에 베유는 로안의 여자 고등학교 철학 수업에서 프로이트의 개념인 억압과 무의식을 가르쳤다. 그가 말하길 프로이트 작업이 “위험한”(베유의 표현) 까닭은 순수와 불결이 마음속에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생각들이 있고, 우리 영혼 속에는 소망하지 않는 소망들이 있다는 것이죠”(“독립된 삶을 영위하는 전사들…이 타고 있는 목마”와 비슷하게).[17] 그는 “정말로 우리 영혼에는 우리에게서 이탈하는 생각들이 있는 걸까요?”라며 반대 의견을 펼쳤다. 에고의 급진적 방향 감각 상실을 유일하게 가능한 영적이고 심리적인 도정으로 받아들이려면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으리라. 그는 “우리가 자아라고 믿는 것”이 “바다에서 부서지는 파도의 모양”만큼이나 “일시적”이라고 썼다.[18]

그렇다고 해서 베유가 자신의 삶에서 열정적으로 현존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1934년 에세이 <억압과 자유>에서 그는 “우리가 소멸할 운명이라면 [먼저] 실존하지 않고서는 소멸할 수도 없음을 이해하자”라고 썼다.[19]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의 “어두운 발상들을” “[그의―로즈] 작가적인writerly 기획에 대한 눈부신 자기 확신”과 조화시킬 수 있겠느냐고 카슨은 묻는다.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20] 카슨은 베유의 생각과 글과 존재가 베유 자신의 고통스러운 비전에 대한 최선의 반격이라고 여긴다. 내게는 이 견해가 타우베스의 비판―종국엔 아주 단호한―보다 내가 읽은 베유에 더 가깝고 또 더 공정해 보인다. 형세가 암울할지언정 그 무엇도 “투쟁을 위한 우리 에너지를 조금이나마 갉아먹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그는 거듭 강변한다.

저 투쟁 심장부에는 가장 근본적이고 귀중한 형태의 정신적 자유가, 얼마 전부터 위협에 처한 자유가 있었다. 그는 위험의 범위가 온전히 드러나기 전인 1934년에 이미 이렇게 썼다. “힘은 사고를 능가하는 데 무력하다고들 종종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이려면 사고가 있어야만 한다.”[21] 그랬기에 그는 개종했음에도 가톨릭 교회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교회의 이단관이 그를 질식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길 치명적인 전체주의의 원천은 저 두 작은 단어 즉 ‘저주받을지어다’[파문]anathema sit의 사용에 있다. 그는 세례를 거부했다.[22]

그가 쓴 마지막 텍스트 중 하나로 보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무들 성명 초안>에서 베유는 신의 사랑과 인간의 의무가 맺는 불가분한 연관을 한층 명료화한다. 그 어떤 인간 능력도 이 세계를 넘어서며 이 세계 위에 있는 더욱 참된 현실을 포착할 수 없다. 주의와 사랑만 제외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이 현실은 모든 인간 존재를 평등하게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그저 인식될 수만 있을 따름이며, 또한 “오직 그들에게만” 인식될 수 있다. 이 현실은 인류에게 “유일무이하고 영속적인 의무”를 명한다. “모든 인간 존재가 지상에서 영위하는 삶을 파괴하거나 훼손할 수 있는 영혼과 몸의 갖은 궁핍”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무를. 어느 국가의 독트린이 시민에 대한 이 의무를 방기하고 있다면 그 국가는 범죄를 존속시키는 셈이 된다.[23]

이는 신의 사랑을 시민의 책무 비슷한 무언가로 만든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세계의 악을, 교정은 무리더라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존재 양식으로 만든다. 1942~1943년에, 즉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쓴 글임을 유념하자. 그가 언급하고 있는 범죄 국가는 히틀러의 독일이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나치가 저지른 학살의 범위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또 베유가 때때로 유대인에 대한 박해를 암시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 시점에 저 박해의 범위를 온전히 인정하는 데 실패한 것은 어떻게 봐도 용서받기 어렵다. 비시 정권 통치기에 베유는 자신에겐 유대인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유대교 신앙에 따라 길러지지도 않았고 그 신앙과 자신을 동일시한 적은 더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비시 정권이 1940년에 제정한 ‘유대인 지위법’(그는 이 법에 조소를 보냈다)에 대한 반응으로 그는 유대인에게 최선의 대응은 동화되는 것, 심지어는 사라지는 것이리라고 제안했다. 아마도 그의 생애에서 최악의 순간이었을 바로 이때 그는 뿌리 뽑힌 유대인들이 이 세계가 직면한 뿌리 뽑힘의 기원이라고 암시한 셈이다. 이는 유대인인 것이 박해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위험할 정도로 유사하다.

실비 베유는 회고록에서 묻는다. 어째서 고모는 자신의 정치적 열렬함이 고대 예언자들의 열의를 반향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을까? 어째서 정치적 무게를 짊어진 당신의 관대함이 유대교의 핵심 원칙이자 “정의의 한 형태, 균형을 회복하는 하나의 방법”인 너그러움tzedakah과 현저한 친화성을 보인다는 사실에 눈을 감았을까? 시몬의 부계 할머니인 외제니 베유는 바로 저 원칙을 지키며 산 독실한 유대인이었다. 그리하여 실비 베유는 시몬이 순수하게 세속적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견해―페트르망의 1976년 전기 이래 거의 정설로 굳은―를 수정한다. 실제로 시몬의 어머니인 셀마가 남편의 어머니에게 보인 적개심은 가족 내에서 지속적인 압력을 형성했고 세대를 거듭하며 전해졌다. 젊은 여자로서 실비는 부친의 회원증을 가지고 도서관에 몰래 들어가 탈무드, 루이스 긴즈버그의 «유대인 전설», 하인리히 그레츠의 «유대인 역사»를 빨아들이듯 읽었다. 이를 알아낸 앙드레는 이렇게 반응했다. “너는 내 동생이 할 법한 일을 하고 있구나. 걔도 대체로 정직했거든.”

이 어두운 그림자에도 불구하고 베유의 영적 여정은 결코 정치적 삶과 생각에서 달아나는 출구로 기능하지 않았다. 신과의 마주침―편지와 노트에서 그는 세 차례에 걸친 신의 방문[신비 체험]을 이야기한다―은 지상에 대한 헌신을 강화했다. 비록 그가 이 헌신을 유대인 선조들에게서 가차 없이 분리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가 생각을 바꾼 전환점을 하나 고르라면 스페인 내전 기간에 전선에서 싸운 경험이 신비주의보다 훨씬 나은 후보일 것이다. 이는 너무나 자주 일종의 해프닝으로 일축되는데, 그가 발을 헛디뎌 기름이 담긴 냄비에 화상을 입은 탓에 부모가 그를 구하러 와야 했고, 또 내가 보기엔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그가 총을 조준하는 데 무능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상처를 치료하자마자 전선으로 돌아가고자 최선을 다했다. 연대하더라도 살인에 가담하지는 않는다는 조건하에 말이다. 자레츠키는 이 경험이 정치 참여에서 손을 떼도록 그를 재촉했다고 이해한다. 반대로 내 제안은 이 경험 덕분에 그가 새로운 층위에서 정치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조르주 베르나노스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서 반란군이 프랑코의 군인들에게 잔혹 행위를 벌였음을 전해 들었다. 그런 잔혹 행위 중에는 죽을 것인지 반파시즘 무리에 합류할 것인지 택하라는 강요를 거부해 살해당한 열다섯 살 소년의 사례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아버지 눈앞에서 살해당한 젊은 제빵사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 광경을 보자마자 미쳐 버렸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그는 정치 진영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폭력의 잠재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온전히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일단 가치 있는 삶의 경계 바깥으로 내몰리는 순간 그를 죽이는 짓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게 되죠.”[24]

카뮈에 따르면 베유는 피가 그치지 않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를 계기로 인간이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의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그 폭력과 대면하는 지속적인 헌신이 시작되었다. 베유는 독일이 유럽을 취급하는 방식과 프랑스가 식민지에 보인 행태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그리고 탈식민화―오늘날의 용어―가 이뤄지지 않았다면 2차 대전 승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히틀러에 맞선 전쟁에 반대하던 1938년에 베유는 주간지 «라 플레슈» 편집자인 가스통 베르제리에게 편지를 띄워 “독립성을 일부 잃는 것보다 아랍인이나 인도차이나인 등을 계속해 짓밟는 것이 더 프랑스의 수치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습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다른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제 몫의 흑인종이나 황인종을 차지”하기만을 생각해 왔다.[25] 프랑스 제국의 식민 문제를 다룬 1938년 에세이에서 그는 유럽 최악의 전체주의 국가보다 더 가혹한 제약을 부과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통치하에 있는 식민지를 찾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주장했다.[26] 그도 알고 있었듯 이는 스캔들을 불러일으킬 만한 관찰이었다.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민주주의의 보전을 중심 목표로 받아들이던 때였으니 말이다. 반면 그는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당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민주주의 자체의 타도를 목표로 삼은 당의 형성을 막는 데 무력했음을 올바르게 지적했다.

베유에게 식민주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힘의 행사로, 자신의 도상에서 마주친 전통들을 뿌리 뽑거나 박멸하고, 토착 역사의 모든 흔적을 파괴하며, 공동체 고유의 기억을 지우고, 그런 다음 최종적인 모욕으로서 제가 초래한 폭력을 부인한다(베유 전집의 이 부분에 편집자들이 붙인 제목은 ‘반식민주의자 시몬 베유’다). 그 귀결로 식민주의 국가는 제 과거를 은폐하는 “무지와 망각”의 체제가 된다. 베유가 결론짓길 문제는 “한 인민의 관대함이 범위를 넓혀 자신의 이름으로 범해진 불의를 적발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27]

베유는 위험 지대로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단순히 나치주의와 식민주의 사이에 유비를 설정하고 있어서가 아니다(한나 아렌트와 프란츠 파농에게서 이 연관성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음에도 오늘날 저 둘을 연결하려는 어떤 시도도 반사적으로 격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나중에 정신분석이 투사projection 과정이라고 이론화한 무엇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자아에서 고뇌를 제거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혹은 자신의 이름으로 무슨 일이 행해졌는지와 무관하게, (역사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죄책감에 책임을 질 수 없게 된다. 프랑스를 떠나기 직전에 쓴 1942년 에세이 <신의 암묵적 사랑에 대한 형태들>의 일부 구절은 저명한 오스트리아계 영국인 정신 분석가 멜라니 클라인의 말을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읽힌다.

우리 안에 악과 추함이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면 우리는 몸서리치면서 그것을 토하듯 밀어낸다. 전이 작용을 통해 우리는 이 불편을 우리를 둘러싼 사물들로 옮겨 놓는다. 하지만 이 동일한 사물들, 추해지고 훼손된 이 사물들은 이제 우리가 저희 안에 채워 둔 해악을 한층 불려 우리에게 다시 돌려준다. 이 교환 과정에서 우리 안의 악은 확장되며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그 환경이 감옥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다.[28]

베유는 투사 과정을 직접 경험해 알고 있었다. 극심한 두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머리를 때리고픈 기분을 느꼈으며, 세계 전체를 자신의 고통으로 더럽히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죽음 충동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를 기이하게 그리고 아마도 의도치 않게 상기시키면서 베유는 “삶의 규범이자 목표”가 바로 죽음이라 주장한다. 인간 삶의 취약성과 육신의 필멸성을 “온 영혼으로” 인식할 때만 그리고 우리가 “그저 물질 쪼가리”임을 인정할 때만 우리는 살생을 멈출 것이다.[29]

이 주장의 반향들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만큼이나 정치적이며, 승리를 거머쥐기 직전에 있는 국민에게는 특히 그렇다. 1940년 에세이인 <히틀러주의의 기원들에 관해>에서 그는 “무기를 수단 삼아 공정한 대의를 옹호하는 자들의 승리가 꼭 공정한 승리라는 법은 없다”라고 썼다.[30] 그는 연합국에 간청하고 있는 셈이었다. 때가 왔을 때 독일을 힘으로 무장 해제시켜선 안 된다고. 이를 피하는 유일한 길은 승리자로 하여금―“이것이 우리의 운명임을 깨닫게 해”―“완패한 자들에게 부과하게 될 변화들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었다(전쟁에 이긴 국민들이 통상 이 길을 밟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베유는 적과의 급진적 동일시를 제안하고 있다. 우리 각자더러 우리가 가장 덜 어울리거나 덜 원하는 자리에 있는 모습을 기꺼이 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는 롤스의 한 판본과 유사하지만, 이번에는 심리 역학적psychodynamic 색채를 띠고 있으며 국제적, 군사적, 식민적 범위를 아우른다. 보부아르를 다시 인용하면 베유의 심장은 온 세계와 함께 뛰었다. 베유의 정치학에서 이 심리 역학적 측면이 그토록 주목받지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이 순간들에 베유는 새로운 윤리를 제안하고 있었으니 이는 주의 혹은 타자에게 붙들림이라는 발상, 자레츠키가 베유 생각의 열쇠 중 하나로 정당하게 골라낸 발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은 마법적인 생각에 한층 가까운데, 왜냐하면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극빈자, 난민, 흑인, 병자, 재범자”)에게 당신의 존재 자체를 선사함으로써 당신은 인간이 비참함에 느끼는 자연스러운―최소한의 안전만 보장받은 이들에게 자연스러운―혐오를 뒤집기 때문이다. 당신은 역겨움을 자발적이고 다정한 포옹으로 바꾸고 있다. 베유는 이렇게 말했다. “사전 훈련을 받지 않은 개가 불길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것이 그렇듯 정신이 기꺼이 불행을 향하게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다.” 에너지의 “고조”는 당신을 타자에게 “실어 나른다”. 타자가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잃는다(이는 모든 가용 공간을 채울 정도로 확장되는 권력 획득과 정반대다). 결국 승산은 거의 없지만 그런 움직임만이 만인의 근본적 평등과 동일성을 인식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런 움직임만이 정의의 유일한 기회다. 그러니 오히려 더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그에게 뛰어들기가 불가능해 보였던 한 가지 동일시, 그가 거부한 역사적 공감의 한 형태가 유대인으로서 그 자신이었다는 것이 말이다.

베유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가장 깊은 층위의 믿음을 거스르고 있었다. 그는 또 그 자신의 경험을, 자신이 외부 망명자고 지독히 사랑받지 못하며 자신을 사랑할 줄도 모른다는 느낌도 거스르고 있었다. 1942년 5월에 그는 급진적인 도미니크회 사제인 페랭 신부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카사블랑카 아인세바의 난민 캠프에서 뉴욕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쓴 “영적 자서전”이다. 이 편지는 한 편의 분출이었다. 사람들이 잔인하지 않은 태도로 자신에게 말을 걸 때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그는 설명한다.[31] 페랭 신부는 그가 살아오면서 굴욕감을 느끼지 않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신부님께서 저처럼 저 자신에게 증오와 혐오를 느낄 이유는 없지요”라고 그는 썼다.[32] 베유는 신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벌레처럼 말라 죽은 나뭇잎 색을 띤 사람이지요.”[33] 베유에게 영감의 원천은 혐오revulsion였다. 주변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모친이 쏟았을 사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어머니인 셀마는 자신의 사랑이 딸로선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했다고 인정한 바 있다.

이 같은 고백의 순간들은 많은 경우 그의 판단을 망가뜨린 절망의 층위나 정신적 고통의 층위를 나타내는 지표로 읽힌다. 자레츠키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베유에게 붙어 제멋대로 유통된 멸칭이 몇 개나 되는지 세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자레츠키가 톤을 누그러뜨리려고, 때로는 정정하려고 애쓰고 있음에도 말이다. “병적인”, “집착하는”, “참을 수 없는”, “비인간적인”, “짜증스러운”, “미치광이의 헛소리”, “생각을 그만두지 못하는 저주를 받은” 등등. 일부만 골라도 이 정도다(이 중 몇 가지나 남성 사상가에게도 통용될까?). 반대로 나는 그의 내쳐짐abjection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내쳐짐이 자신의 것임을 기꺼이 알고 받아들이려는 태도가 그를 영적 은총, 정신의 자유, 더욱 공평한 세계라는 포부에 걸맞은 높이까지 그를 끌어올렸다고 주장하고 싶다.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가 오르고자 한 언덕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베유가 그것을 어떻게 해냈는지를 일러 주는 마지막 단서를 그가 단어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늘 그의 작업에 재간 혹은 장난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쓰기가 그에게 가장 편안한 장소, 그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장소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이 비유[유비]의 피조물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그중 가장 골치 아프다 할 만한 것들―히틀러와 고대 예루살렘, 나치주의와 식민주의의 비유―과 더불어 시작한다. 1939년에 그는 비유는 기만적이지만 자신에겐 “유일한 지침”이라고 썼다. 한번 비유를 눈여겨보기 시작하면 그의 작업 어디서든 비유를 발견할 수 있다―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개들, 목마에 타고 있는 전사들과 비슷한 무의식적 생각, 연인에게 착 달라붙은 여성인 신을 떠올려 보라. 여기에 우리는 부정직과 불의에 대고 소리쳐 봤자 헛될 뿐임을 상기시키고자 제시한, 눈 위에 엎드린 채 죽은 주인 옆에서 짖고 있는 개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1940년에 프랑스가 함락된 뒤 제 영혼이 제 나라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온 프랑스인을 환기하고자 제시한, 불에 달군 물건에 닿아 벗겨진 피부도 추가할 수 있겠다. 혹은 “고기도 없는데 소금을 부탁하는 아이”와 비교되는,[34] 현실적인 사고 없는 사고의 자유도 있다. 베유는 그 무엇도 다수의 비유 없이는 실존하지 않는다고 진술한다(오빠와의 심원한 유대).

타고난 재능이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베유의 비유들은 한계까지 나아가며, 고통스러운 무언가 혹은 이해를 빠져나가는 무언가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신은 내가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에메랄드가 녹색‘이듯’ 사랑한다. 마지막 편지 중 하나에서 그는 부모에게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는 바보 광대들(특히 «리어 왕»에 등장하는)이 “진리를 말하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쓴다. “이 광대들과 저 사이의 친화성, 본질적인 유사성이 보이세요?”[35] 비유는 하나의 영적 원리다. 오직 “비유와 전이”[36] 덕분에 특정한 인간 존재들에 대한 우리의 애착이 보편적인 사랑의 층위까지 상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사람들은 베유가 판단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며 비판하지만, 이는 불공평한 평가며 그가 감수한 위험을 무시하는 처사다. 최상의 순간에 베유는 다수를 담고 있다.[37] 생각들이 무수히 많은 조합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생각들이 표현 가능하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결국 영적, 윤리적, 정치적 관대함은 당신에게 당신 자신 너머까지, 한계 없이, 도달하라고 요구한다. 서구의 정전 반열에 드는 작가 가운데 우리를 그처럼 세계 끝까지 밀어내면서도 그토록 확고하게, 그리고 결연하게 우리를 발아래 지면에 붙들어 놓는 이가 나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1] 이 언급은 Simone Weil, Seventy Letters: Personal and Intellectual Windows on a Thinker, ed. and trans. by Richard Rees, Stock Publishers, 2015, p.95에 나온다.
[2] 이 일화와 인용은 1937년 봄에 피렌체에서 파스테르나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Ibid., pp.84~85.
[3] 이 일화와 인용은 앞서 언급한 파스테르나크에게 보낸 1938년 편지에 나온다. Ibid., p.94쪽.
[4] Ibid., p.94쪽.
[5] 시몬 베유, <개인성과 성스러움>,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 이종영 옮김, 새물결, 2021, 75쪽.
[6] 알베르 카뮈, <서문 초안>, «스웨덴 연설/문학 비평», 김화영 옮김, 책세상, 2007, 269쪽.
[7] Weil, Seventy Letters, p.197.
[8] Weil, Lectures on Philosophy, trans. by Hugh Pri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8, p.25.
[9] Weil, Seventy Letters, p.156.
[10] 베유, <신에 대한 암묵적 사랑의 형태들>, «신을 기다리며»,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5, 115쪽.
[11] 같은 글, 118쪽.
[12] 같은 글, 130쪽.
[13] 베유, <개인성과 성스러움>, «신의 사랑에 관한 무질서한 생각들», 79쪽.
[14] Susan Taubes, “The Absent God”, The Journal of Religion, Vol.35, No.1, 1955, pp.9, 11.
[15]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2021, 60쪽. 전체 문장은 이렇다. “정혼자를 기다리는 여자가 아니라, 두 정혼자 사이에 끼어든 성가신 존재, 그들이 진정으로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물러나야 하는 제삼자이다.”
[16] Anne Carson, “Decreation: How Women Like Sappho, Marguerite Porete, and Simone Weil Tell God”, Decreation: Poetry, Essays, Opera, Alfred A. Knopf, 2005, p.179.
[17] Weil, Lectures on philosophy, pp.94~97
[18] Weil, On Science, Necessity and the Love of God. trans. by Richard Rees. Oxford University Press, 1968, p.188.
[19] Weil, “Reflections Concerning Technocracy, National-Socialism, the U.S.S.R. and Certain Other Matters”, Oppression and Liberty, Trans. by Arthur Wills and John Petrie, Routledge, 1958, p.22.
[20] Carson, “Decreation”, p.171.
[21] Weil, “Reflections Concerning the Causes of Liberty and Social Oppression”, Oppression and Liberty, p.112. 해당 부분 내용을 조금 더 옮기면 이렇다. “이런 상황에서 일개 통나무가 왕으로 간주되고 왕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이는 일정 지점까지는 오직 저 믿음 덕분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 일반의 경우뿐 아니라 통치하는 계급들의 경우에도 참이다. 이와 관련해 인구 전체에 어떤 종류의 것이든 신화를 퍼뜨리는 것보다 쉬운 일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체주의’ 체제들의 출현에 놀라선 안 된다. 힘은 사고를 능가하는 데 무력하다고들 종종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이 참이려면 사고가 있어야만 한다. 비합리적 의견들이 이념(idea)의 자리를 차지한 곳에서는 힘이 전능하다. 예를 들어 파시즘이 자유로운 사고를 완파했다는 말은 공정하지 않다. 실제로는 자유로운 사고가 부족하기 때문에 의미가 완전히 결여된 공적 독트린들이 힘에 의해 부과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런 체제는 전반적인 어리석음을 상당히 키울 수 있고, 이 어리석음이 창조한 조건하에 성장하게 될 세대들에게는 희망이 거의 없다.”
[22] 베유는 <편지 4: 영적 자서전>, «신을 기다리며», 56쪽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이 교회에 들어서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23] Weil, “Draft for a Statement of Human Obligations”, Simone Weil: An Anthology, ed. by Siân Miles, Penguin, Penguin Books, 2005, pp.225~226.
[24] 이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에게 보낸 1938년 편지에 적은 내용이다. Weil, Seventy Letters, p.108.
[25] 베유, «뿌리내림», 이세진 옮김, 이제이북스, 2013, 210쪽.
[26] Weil, “New Facts about the Colonial Problem in the French Empire”, Simone Weil on Colonialism, ed. and trans. by J. P. Litt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3, p.66.
[27] Ibid., p.68.
[28] 베유, <신에 대한 암묵적 사랑의 형태들>, «신을 기다리며», 160쪽.
[29] 같은 글, 170쪽.
[30] Weil, “The Great Beast: Reflections on the Origins of Hitlerism”, Selected Essays, 1934-1943: Historical, Political, and Moral Writings, trans. Richard Rees, Wipf & Stock Publishers, 2015, p.139.
[31] 베유, <편지 4: 영적 자서전>, «신을 기다리며», 45쪽.
[32] 같은 글, 53쪽.
[33] 베유, <편지 6: 막바지의 생각>, 같은 책, 79쪽.
[34] Weil, Simone Weil: An Anthology, p.134.
[35] Weil, Seventy Letters, pp.200~201.
[36] 베유, <신에 대한 암묵적 사랑의 형태들>, «신을 기다리며», 155쪽.
[37] 월트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이야기>self의 구절인 “I am large, I contain multitudes”에서 따온 표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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