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론이란 무엇인가

사이먼 해먼드의 <k-펑크 전반>에 이어 이번에는 «k-펑크»에 수록되지 않은 피셔 자신의 글 한 편을 번역해 올립니다. «필름 쿼털리» 66권 1호(2012년 가을)에 발표한 <유령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에요. «필름 쿼털리»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Copyright © 2012 by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원문 링크: https://online.ucpress.edu/fq/article-abstract/66/1/16/29155/What-Is-Hauntology?redirectedFrom=fulltext

2000년대 중반부터 피셔는 정치와 문화 영역에서 점점 더 미래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20세기가 불러일으켰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잦아들고 그 자리를 향수가 점유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그는 자크 데리다에게서 유령론이라는 개념을 빌려 옵니다.

피셔에게 유령론이란 구체적으로 사회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자 한 ‘대중 모더니즘’의 약속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흔적을 표면화해 리얼리티를 교란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애초에 유령론 논의를 개시한 분야가 대중 음악(특히 전자 음악)이었다면, 여기서 피셔는 문학을 경유해 영화와 텔레비전 영역으로 범위를 확장합니다. 그런 다음 후반부에서는 60~70년대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유령론적 형식을 갖춘 동시대의 작업들도 일별하고 있어요.

«k-펑크»에는 피셔의 블로그 게시물과 각종 매체 기고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글을 싣고 있지는 않아요. 안타깝게도 «필름 쿼털리»에 기고한 글들은 «k-펑크»에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라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 글을 번역하기로 한 첫째 계기입니다.

피셔는 유령론 개념이 “제2의 (비)생명”을 얻었다고 평가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데는 피셔의 공이 상당히 크지 않을까 싶어요. 이 글은 그런 피셔의 유령론 이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고 있고,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을 소개하고자 한 둘째 계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셔는 무엇이 현실로 간주되느냐 자체가 첨예한 정치적인 문제라 생각했고, 현실 감각을 뒤흔드는 작품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구상 한편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반대편에는 대중 모더니즘과 유령론이 자리해 있었어요.

«k-펑크» 1권과 이 글은 피셔가 유령론적 작품들을 (재)발굴하고 개념들을 정교화한 과정을 기록합니다.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다루고 있는 이 글은 «k-펑크» 1권에 실린 몇몇 글의 후속작처럼 읽히기도 해요. 또 유령론 개념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라는 말년의 기획으로 이어지고요.

그의 첫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마지막 책인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만 소개된 한국에서는 그간 두 책이 이질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피셔의 일관된 관심이 두 권 모두에 담겨 있기도 해요. «k-펑크» 1권과 <유령론이란 무엇인가>가 둘을 잇는 가교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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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피셔
리시올/플레이타임 편집부 옮김

지난 10년[2000년대] 중반에 유령론hauntology 개념은 제2의 (비)생명을 얻었다. 여러 음악 예술가―필립 젝, 베리얼, 고스트 박스 레이블, 더 케어테이커―가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며 수렴한 현상은 이 용어에 다시 손을 뻗도록 비평가들을 재촉했다. 이들의 작업이 ‘유령 같은’ghostly 소리를 낸 것은 분명하지만 유령성spectrality은 단순한 분위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유령론적’ 수렴을 정의한 것은 무엇보다 문화적 교착 상태―미래의 실패―와의 대면이었다. 2005년경에는 전자 음악이 더는 ‘미래적인’ 소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2차 대전 종전 시기부터 1990년대까지 전자 음악―피에르 셰페르나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같은 고급 문화 작곡가들이 생산한 것이든 신스 팝 그룹과 댄스 음악 프로듀서들이 제작한 것이든―은 미래에 대한 어떤 감각과 동의어였다. 영화와 텔레비전이 미래를 환기하길 원할 때 으레 전자 음악에 의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2005년쯤에 이르러 일렉트로니카는 낯설거나 거슬리게[현재와 불협 화음을 내는 듯이] 느껴지는 미래를 소환하는 능력을 더는 발휘하지 못했다. 전자 음악이 ‘미래적’이었다면 이는 글꼴들이 ‘고딕체’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그러했다―[반면] 이제 미래적인 것은 개념, 정동, 연상으로 구성되어 뿌리를 내린 어떤 집합을 함의한다. 21세기 전자 음악은 20세기에 녹음된 것들을 넘어 진보하는 데 실패했다. 2000년대에 생산된 어느 것이든 사실상 1990년대에도 녹음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전자 음악은 자신의 타성과 회고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시기에 또한 뚜렷해진 사실은 이것이 익숙한 패턴을 이루는 또 하나의 순간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패턴에서는 한 장르가 시들면 다른 장르가 출현해 혁신의 최전선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더는 혁신의 최전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문화 영역과 마찬가지로 음악에서 우리는 프랑코 베라르디가 도발적으로 표현한 미래 이후를 살아가고 있었다.

21세기의 디지털 곤경들에 출몰하고 있는haunt 것은 과거라기보다는 차라리 20세기가 우리에게 예견하기를 가르친 잃어버린 미래 전체다. 잃어 온 미래들이라는 문제는 음악 양식이라는 사안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한층 포괄적으로, 그리고 한층 곤란하게도 미래의 사라짐은 사회적 상상력 양식 전반의, 즉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를 착상하는 역량의 저하를 뜻했다. 이 사라짐은 문화가 진정한 변화 없이 계속 흘러가기만 하는 상황을, 또 정치가 사전에 확립된 (자본주의) 체계의 행정으로 축소되는 상황을 수용하는 것을 뜻했다. 달리 말해 우리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묘사한 “역사의 종말”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후쿠야마의 테제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주장, 즉 포스트모더니즘―전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에 적합한 형식조차 찾지 못하는 무능이 특징인―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라는 주장의 이면이었다.

미래는 늘 하나의 출몰로, 이미 현재에 지장을 미치면서 기대를 조건 짓고 문화 생산을 자극하는 잠재성으로 경험된다. 유령론 음악은 발생해야 할 미래―현실성으로서 미래―의 실패보다 이 유효한 잠재성의 사라짐을 애도한다. 더 케어테이커 기획 배후에 있는 인물인 레일런드 제임스 커비가 내놓은 한 앨범 제목은 우리가 속아 넘어가 가로채인 미래에 대한 갈망의 감각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슬프게도, 미래가 더는 예전 같지 않다»Sadly, the Future Is No Longer What It Was. 혼성 모방과 중언부언이 지배하는 시대에 직면해 유령론 음악은 어떤 역설의 심장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모더니즘에 대한 일종의 향수가 제임슨이 “향수 양식”이라 부른 것에 지배되는 문화의 유일한 대립물일 수 있을까?

차제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제임슨의 일부 논변으로 돌아가 봐도 좋을 것이다. 특히 이 “향수 양식”에 대한 그의 이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영화이기에 그렇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유함이 특정 유형의 시대 착오anachronism에 있다고 논한다. 그의 분석이 가장 선명한 곳은 로런스 캐스던의 «보디 히트»1981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1991에서 이렇게 쓴다. “미적 기호 전체가 시간 속에서 공식적인 동시대 이미지와 우리 사이에 거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아르 데코풍 크레디트 자막은 즉시 감상자가 적절한 ‘향수’ 양식을 느끼며 영화를 수용하게 만드는 용도로 기능한다. […] 전략적으로 구성된 배경은 다국적 시대의 미국이라는 동시대성을 규범적으로 실어 나르는 대부분의 신호를 대단히 교묘하게 피해 간다. 즉 소도시를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카메라는 고층 빌딩이 즐비한 1970년대와 1980년대 풍경을 비켜 가고 […] 한편 현시대의 대상 세계―이미지의 연대를 곧바로 추정할 수 있게 해 줄 인공물이나 기기―는 고의적으로 편집되어 삭제된다. 그리하여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공모해 공식적인 동시대성을 흐리며, 시청자는 서사가 실제 역사적 시간 너머에 있는 영원한 1930년대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20~21).[1]

«보디 히트»가 그 어떤 직접적인 의미에서도 시대물이나 향수 영화가 아닌 까닭은 과거에 대한 명시적 준거를 모조리 부정하기 때문이다. 제임슨이 결론 맺길 «보디 히트»의 시대 착오는 “역사성의 퇴조”를 구성하며 이로써 “우리 자신의 최근 경험에 대한 재현들을 빚기가 점점 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의 심각함”을 예증한다. 21세기에 들어와 제임슨이 논한 유형의 혼성 모방은 더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나머지 이제는 알아차리기조차 쉽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런데 «보디 히트»가 우리를 “역사 너머에 있는” 시간으로 투사하기 위해 “인공물과 기기”를 편집해 삭제한 반면, 21세기 초 할리우드에서는 아마도 그 반대가 더욱 전형적일 것이다. CGI 같은 디지털 기술을 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더해 소비자 현재의 기술적 인공물들을 강박적으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용품들을 불길하게 강조하는 이런 관행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의 형식적 특징들이 너무나 익숙해져 고갈될 정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얼버무린다. 형식적 혁신과 새로운 유형의 감각 경험이 사라졌음을 가차 없는 기술 업그레이드―플랫폼만 새로울 뿐 보게 되는 그리고/또는 듣게 되는 것은 똑같은―가 은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유령론 이해를 영화와 텔레비전에 대한 논의로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첫째 접근으로 우리는 많은 유령론 음악이 음악뿐 아니라 영화와 텔레비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더 케어테이커라는 명칭은 큐브릭의 1980년 영화 «샤이닝»에 등장하는 오버룩 호텔에서 잭 토런스(잭 니컬슨)가 맡은 역할[관리인]에서 차용한 것이다(이 영화에 관해서는 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사실상 케어테이커 기획 전체에 동기를 부여한 것은 단순한 착상, 즉 오버룩에서 들을 법한 재료로 하나의 앨범 전체를 만든다는 발상이었다. 더 케어테이커는 (딜레이나 디스토션을 사용해) 1930년대 티룸 팝을 질을 저하시켜degradation 일련의 달콤한 흔적으로 변형하며, 음향적 유령론의 서명과도 같은 특질 중 하나인 크래클[치지직거리는 소리]을 두드러지게 사용함으로써―이는 시간을 청취 가능한 물질성으로 만든다―이 흔적들을 베일처럼 덮는다. 한편 고스트 박스 레이블이 짜릿함을 불러일으킨 까닭 하나는 자신이 소생시킨 동시에 이어 가고자 애쓴 근과거 시청각 문화의 정전―양식에서 그리고 슬리브 노트에서 암시된―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장르 영화와 공영 방송의 이 같은 혼합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포함되었다. BBC 라디오포닉 워크숍은 전자 장치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구체 음악을 라디오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반주로 번역했다. 나이절 닐의 비범한 텔레비전 희곡인 «돌로 된 테이프»The Stone Tape, 1972는 출몰이 트라우마적 사건들의 실제 기록일 수도 있다는 T. C. 레스브리지의 발상에 기댔으며, 앤서니 섀퍼의 «더 위커 맨»The Wicker Man, 1973은 이교주의, 민속 음악, 호러를 독특하게 응축했다. 이 계보가 영국다움을 표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유령론적이라고 묘사되어 온 예술가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영국인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다수의 유령론 음악에서 탐지할 수 있는 갈망들이 고무된 것이 도전적이고 실험적일 수 있었던 공영 방송 체계와 대중 문화가 기대치를 높인 덕분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돌로 된 테이프» © 1972 BBC. DVD: BFI Video(U.K.).

이 같은 ‘대중 모더니즘’의 조건을 대부분 마련한 것은 사회 민주주의였지만, 이 모더니즘의 열망은 사회 민주주의가 유지되리라는 단순한 희망에 한정되지 않았다. 실제로 사회 민주주의 문화의 급진적 차원은 그것이 (자기) 극복에 대한 염원을 생산하는 방식에, 상상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미래를 향한 운동을 전제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오언 해설리가 논했듯 브루탈리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의 철거는 이 미래가 도착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다. 실제로 다가올 미래는 대중 모더니즘이 아니라 포퓰리즘적 보수주의일 것이다: 비즈니스 세력이 개시한 창조적 파괴, 그리고 익숙한 미학 및 문화 형식으로의 귀환. 이는 영국적이지 않고 미국적인 미래, 적어도 소비 문화가 전형적인 사례인 특정 판본의 ‘미국적’ 미래일 것이다. 보수주의의 이런 재기는 새로운 규범성―성 차별,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를 견디다 못해 터져 나온 ‘신 사회 운동’의 요구들―의 방해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 와 보면 이 새로운 규범성은 사회 민주주의와 노동자 운동―애초에 사회 민주주의가 성립하도록 강제한―의 와해를 대가로 확립된 것이었다. 따라서 스스로를 진보로 셈하는 이들에게 출몰하는 여러 미래 중 하나는 전후 사회 민주주의에서 시작된 것을 이어 갈 수 있는, 하지만 실제 전후의 특징이었던 성 차별, 인종주의, 동성애 혐오는 수반하지 않을 수 있는 문화의 가능성이다.

“출몰한다는 것은 현전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고 한 개념의 구축 자체 안에 출몰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썼다(Routledge, 1994, 161).[2]

그 개념이 바로 유령론이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반복되는 «햄릿» 문장 하나는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며, 최근작인 «급진적 무신론: 데리다와 생명의 시간»에서 마르틴 헤글룬드는 이 고장난 시간 감각이 유령론뿐 아니라 데리다의 탈구축 기획 전체에 결정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논하길 “데리다의 목표는 존재를 자기 동일적 현존의 견지에서 사고하는 전통적인 ‘존재론’과 대비되는 하나의 일반적인 ‘유령론’을 정식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령이라는 형상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온전히 현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더는 혹은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관계를 표시한다”(Stanford University Press 2008, 82).[3]
그렇다면 잠정적으로 유령론의 두 방향을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방향은 (현실성 속에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하지만 하나의 잠재성으로서는 여전히 유효한 것(트라우마적인 ‘반복 강박’, 반복되는 구조, 운명적인 패턴)을 가리킨다. 둘째 방향은 (현실성 속에서는) 아직은 발생하지 않은, 하지만 잠재적인 것 속에서 이미 유효한 것(현재의 행동을 형성하는 끌개, 예견)을 지시한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데리다의 탈구축에서 또 하나의 계기―여기서 ‘유령론’은 이전에 흔적이나 차이差移, différance 같은 개념으로 수행한 작업을 재개한다―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제국의 와해를 배경에 둔 직접적인 역사적 맥락에도 구체적으로 관여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후쿠야마가 자랑스레 알린 이른바 역사의 사라짐에 대한 관여였다.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전방위적인 우위를 확보했으며 자신이 글로벌한 우위를 차지했다는 자본주의의 주장이 더는 다른 블록 전체의 실존이 아니라 쿠바나 북한처럼 저항하는 소국에 의해서만 좌절되는 이제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또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자본이 이제 글로벌한 수준에 이른 제 영토에 설치한 미디어 (또는 포스트미디어) 테크놀로지들에 대한 일련의 사변이기도 했다. 따라서 유령론은 결코 드문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술-원격-담론성”, “기술-원격-도상성”, “시뮬라크르”, “합성 이미지”의 시대에 고유한 것이었다.

그런데 “원격-”에 대한 이 논의는 유령론이 공간뿐 아니라 시간의 위기와도 관련됨을 보여 준다. 폴 비릴리오와 장 보드리야르 같은 이론가가 오래전부터 인정해 왔듯―그리고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데리다가 자신의 설명으로 이 사상가들과의 합의점을 도출하려는 시도로도 읽을 수 있다―“원격-테크놀로지들”은 공간과 시간을 모두 무너뜨린다. 사람들은 공간상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즉시 접할 수 있다. 보르리야르도 데리다도 공간과 시간을 가장 근본적으로 수축하는 “원격-테크놀로지” 즉 인터넷의 온전한 효과―당연히 ‘지금까지’ 발휘된 온전한 효과라고 말해야겠지만―를 살아생전에 보지 못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사실은 사이버 공간이 문화―특히 음악 문화―의 수용, 분배, 소비를 좌우하던 순간에 유령론 담론이 대중 문화와 결부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공간성의 침식은 마르크 오제가 말한 “비장소”―공항, 리테일 파크[영국과 유럽의 대도시 주변에 조성된 대형 쇼핑 지구], 체인점 같은 장소로, 해당 지역의 특수한 공간들보다는 서로를 닮아 있으며 이들의 불길한 증식이 자본주의 글로벌화의 거스를 수 없는 확산의 가장 가시적인 징후를 구성하는―의 부상과 더불어 증폭되어 왔다. [그런데] 공간의 사라짐은 시간의 사라짐과 나란히 진행된다. 비장소만이 아니라 비시간도 있는 것이다.

출몰은 시간과 공간의 수축 및 동질화에 내생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공간이 시간으로 얼룩질 때 또는 특수한 장소가 고장난 시간과 마주치는 현장이 될 때 발생한다. 제임슨은 큐브릭의 «샤이닝»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다. “유령 이야기에서 시대 착오적인 점은 이 장르가 독특하게 물리적인 장소에, 특히 집과 같은 재료에 우발적이고 구조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Historicism in The Shining”, http://www.visual-memory.co.uk/amk/doc/0098.html).[4]

실제로 «샤이닝»은 21세기의 유령론 이해에서 다시 출현한 집착 다수를 선취하고 있다. 이 영화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의 유령론을―인간 실존 자체에 고유한 들림possession(혹은 쫓아냄dispossession)의 성질을, 과거가 자신을 반복하기 위해 우리를 이용하는 방식을―지시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또 개봉한 이래 수년간 악화 일로를 걸어온 구체적인 역사적 위기―역사주의 자체의 위기―에도 관여한다. 코폴라나 스코세이지 같은 동시대인과 더불어 큐브릭의 작업이 1970년대에 정점을 찍고 그 이래 한결같이 할리우드에 출몰한―모사하고자 한 무언가(하지만 확신을 가지고 이 모사를 수행하기가 점점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코폴라와 스코세이지 자신이 깨달은)이자 푸닥거리하고자 한 무언가(범속한 블록버스터 스펙터클로 대체하기 위해)로―미국 영화의 대중 모더니즘에서 한 부분을 차지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샤이닝»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미국과 영국을 장악하고 포드주의적인 산업 생산 조직이 한층 불안정한―그리고 일각에서 ‘비물질적’이라고 말한―노동 형태에 밀려나고 있던 문턱 순간에 개봉했다. 오버룩 호텔의 건축 양식은 이 문턱을 반영한다. 잭이 매니저와 만나 면접 보는 특색 없는 사무실(제임슨에 따르면 “교외 주택지나 모텔 체인만큼이나 다국적이고 표준화된”)은 앞으로 다가올 기업 과잉 지배의 비장소들을 내다보며, 반대로 호텔의 나머지 공간은 미국사의 억압된 유령들, 즉 조직 범죄, 잔혹 행위, 북미 원주민 학살을 돌아보고 있다.«보디 히트» 같은 무언가에서 시대 착오가 “흐릿”해진다면 «샤이닝»에서는 상연된다. 이 시대 착오, 이음매에서 어긋난 시간에 대한 이 경험이 사실상 영화의 주제 자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신경이 곤두서는 순간 다수―전임자로 보이는 듯한 인물인 델버트 그레이디(필립 스톤)와 화장실에서 대면한 잭이 그레이디가 수행했지만 “기억하지는 못하는” 행동(가족 몰살)을 그에게 상기시키는 순간이나 한가운데서 잭이 웃으며 서 있는 1920년대 사진이 등장하는 순간 등―는 시대 착오를 전경에 내세운다. 그리고 복도를 통해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연장하는 오버룩 호텔이, 문을 열고 들어간 무도회장에서는 꿈결 같은 섬망 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1920년대 팝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간 방에서는 부패해 가는 시체가 모습을 드러내는 이 호텔이 일종의 시대 착오 건축물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이겠는가? 시대 착오는 잭을 위협하는 동시에 유혹하는 호텔 역사의 이전 순간들로부터 찾아온 모든 망령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이나 2차 대전 이전에 알 볼리가 부른 노래와 웬디 칼로스의 일렉트로니카를 함께 수록한 사운드 트랙에서도 들을 수 있다.

«샤이닝» © 1980 Warner Bros. Inc. DVD: Warner Home Video
«샤이닝» © 1980 Warner Bros. Inc. DVD: Warner Home Video

데리다가 갖가지 원격-테크놀로지를 강조했음을 감안하면 «샤이닝»이 출몰뿐 아니라 텔레파시에 관한 영화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영화에서 호텔의 악한 세력은 현현하기 위해 잭과 아들 대니(대니 로이드)의 텔레파시적 민감성을 활용하는데, 아마도 이 구상은 동시대 권력이 점점 더 ‘원격 작용’ 형태를 취하게 된 것에 대한 불안들을 반영할 것이다(«샤이닝»은 이 시기에 앞다퉈 나온 텔레파시 영화의 일부였다. 1976년에 «캐리»―마찬가지로 스티븐 킹 소설에 기초한―가 개봉한 데 이어 1978년에는 드 팔마의 «분노의 악령»이, 1981년에는 크로넨버그의 «스캐너스»가 상영되었다). 근본적으로 유령론 자체도 원격으로 작용하는 힘들―슬라보예 지젝의 구분을 차용하면 (물리적) 실존 없이 (인과 관계를 갖는다고) 고집하는 것들―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샤이닝»이 색다른 이유 중 하나는 유령 이야기에 대한 이전에 개념을 과거가 행사하는 힘[행위 능력]에 대한 정신 분석적 강조와 연결한다는 것이다. 관련해 잭이 맡은 오버룩 ‘관리인’ 역할의 양가성 전체가 중요하다. 잭은 돌보는[관리하는] 사람이지만 또 자신만의 행위 능력을 결여한 사람이기도 하니 말이다. 호텔에 속하는 한 그는 관리인의 역량 속에서만 실존한다. 그저 과거(가부장제의 외설적이고 살인적인 밑면)가 계속 반복될 것임을 보증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오버룩 자체는 레자 네가레스타니가 «사이클로노피디아»에서 “비유기체적 악마 혹은 외계 석재[포획암]xenolithic 인공물”이라 부른 것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런 유물 혹은 인공물은 일반적으로 비유기체(돌, 금속, 뼈, 영혼, 재 등등)로 만들어진 물체 모양으로 묘사된다. 자율적이고 지각 능력이 있으며 인간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이들의 실존은 버려진 지위, 태곳적부터 빠져든 잠, 도발적일 만큼 강렬한 형태로 특징지어진다. […] 비유기체적 악마는 본성상 기생적이며 […] 인간 숙주(개인이든 에스니시티든 사회든 문명 전체든)를 통해 제 효력을 발생시킨다”(re.press, 2008, 223).[5]

네가레스타니의 이 묘사는 1950~1970년대에 제작된 일군의 영국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적용될 수 있다. M. R. 제임스, 나이절 닐, 앨런 가너의 허구는 구체적인 (유령론적) 풍경―시간으로 얼룩진, 즉 시간이 고장난 것으로만, 운명적인 반복으로만 경험되는 풍경―속에서 발생하는 그런 “비유기체적 악마들”과의 마주침에 집착한다. 지금 이런 작가들의 작업에 기초한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고찰하는 것은 (적어도) 두 배가 된 유령론에 붙들리는 것이다. 이 작업들은 «샤이닝»과 마찬가지로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잠재적 행위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유령론적이었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에 대한, 그리고 프루스트와 조이스의 문학적 실험 중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으려는 시도에 대한 일종의 ‘펄프 모더니즘적’ 답변을 구성한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공영 방송 및 그것이 한 부분을 이루는 폭넓은 대중 모더니즘 문화 자체가 이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속한다. 역사-의-종말이라는 현재의 탈역사화된 순간에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는 이 작품들을 발굴하는 것은 특수한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호각을 불면 내가 찾아가겠네» © BBC. Courtesy of BFI.
«호기심 많은 이에게 보내는 경고» © BBC. Courtesy of BFI

다른 작가들이―의식적으로든 아니든―따르게 될 본보기를 확립한 인물은 M. R. 제임스다. 1968년에는 조너선 밀러가 BBC에서 그의 「호각을 불면 내가 찾아가겠네, 그대여」1904를 «호각을 불면 내가 찾아가겠네»로, 1972년에는 로런스 고든 클라크가 「호기심 많은 이에게 보내는 경고」1922를 각색했다(둘 모두 얼마 전에 BFI 비디오에서 DVD로 재발매했다). 두 단편 모두 이스트 앵글리아 시골을 침범한 도시인이 복수심에 불탄 고릿적 힘들을 불러내는 “외계 석재 인공물”(한 작품에서는 오래된 호각, 다른 작품에서는 왕관)을 발굴한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BBC에서 각색한 판본들은 장소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카메라는 으스스함을 풍기는 텅 빈 노퍽과 서퍽 풍경을 천천히 응시하는데, 이는 여러모로 텔레비전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행위 능력이 된다. 나이절 닐의 걸작 «퀘이터매스 앤드 더 핏»Quatermass and the Pit(처음에는 BBC의 한 시리얼로 1958년 방영되었고 1967년 해머 영화사에서 그보다 뛰어난 영화 버전으로 다시 제작한)은 이 서사 구조를 우주 규모로 확장했다. 여기서 외계 석재 인공물, 즉 화성에서 온 우주선과의 마주침이 발생하는 현장은 런던―더 구체적으로는 가상의 런던 지하철역인 홉스 엔드―이다. 우주선은 텔레파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퀘이터매스 앤드 더 핏»은 인간 역사에 다름 아닌 무언가를 다시 이야기하는 데 이른다. 오랜 세월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였던 현상들이 우리가 아는 인간 종을 생산하기 위해 유인원과 이종 교배한 화성인 여행자들과의 마주침―이런 뒤틀림을 통해 이 영화는 최근 개봉한 «프로메테우스»를 선취했다―으로 설명된다. 외계 석재 인공물은 이 외계 기원들에 대한 트라우마적이고 깊이 억압된 잠재 의식적 기억을 촉발한다.

«퀘이터매스 앤드 더 핏» © 1967 Hammer Film Productions Ltd. DVD: Optimum Classics(U.K.).

가너는 이 3각 관계의 셋째 인물이다. 그의 두 소설인 «올빼미 접시»The Owl Service, 1967와 «적색 편이»Red Shift, 1973는 청소년들의 에너지에 기생해 스스로를 반복하는 (신화) 구조들에 관한 것이다. 두 소설 모두 유물―«올빼미 접시»에서는 올빼미 패턴으로 된 저녁 식사용 접시, «적색 편이»에는 창끝―을 중심 소재로 삼는다. 또 둘 모두 신화를 개정한 것이기도 하다. «올빼미 접시»는 고대 웨일스 민속 설화 모음집인 «마비노기온»에 나오는 블로데웨이드Blodeuwedd 이야기를 업데이트한 것이고 «적색 편이»는 요정들에게 유괴된 소년이 궁극에는 진정한 사랑에 의해 구원받는 이야기인 탬 린Tam Lin 전설을 차용한다. 나아가 둘 모두 특수한 풍경―웨일스와 체셔―에 주목하는데, 이 같은 특징들은 두 소설이 추적하는 운명적인 반복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공물, 풍경, 청소년, 신화 구조의 조합임을 시사한다. 둘 모두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올빼미 접시»는 그라나다에서 1969년에, «적색 편이»는 BBC의 ‘오늘을 위한 드라마’ 한 편으로 (가너 자신에 의해) 1978년에―각색되었다. «적색 편이»는 가너가 수수께끼 같은 문구에서 영감을 받아 쓴 소설로 알려져 있다. ‘정말로 이제는 아닌 더는 아닌’not really now not any more. 대단히 암시적인 이 구절은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나 있다”의 가너 판본으로 유령론을 둘러싼 최근의 여러 논의에서 관건이 되는 것을 포착하고 있다. ‘정말로 이제는 아닌 더는 아닌’은 포스트모던한 교착 상태를, 현재 및 현재를 재현할 가능성의 사라짐을 가리킨다. 그런데 또 이 문구는 하나의 대안적인 시간성을, 시간이 이음매에서 어긋날 수 있는 또 다른 방식을, 비대한 물질적 힘보다는 영향 및 잠재성과 관련된 인과성 양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현재의 유령론은 어떤가? 데이비드 피스의 ‘레드 라이딩’Red Riding 소설들(1999~2002)을 2009년에 채널 4에서 놀랍게 각색한 연작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한물갔다고 여겨진 공영 방송 모델로의 일종의 유령론적 귀환을 달성했다. 피스의 소설들은 1970년대를 발굴했다. 지난 몇 년간 이 시기는 하나의 기억 대상에서 역사적 서사로 (키치 레트로를 경유해) 변형되어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부분적으로 이는 이 10년 동안 영국에서 사회 민주주의가 손쓸 도리 없이 쇠퇴하고 신자유주의의 쇼크 독트린이 사회적 삶의 총체적 재구축을 위한 길을 닦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텔레비전으로 각색된 3부작의 첫째 작품인 «1974»2009에서 우리는 이 근미래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특히 션 빈이 연기한 건축가[존 도슨]가 “집으로 꺼져 버릴” 필요가 없음을 의미하게 될 쇼핑몰 계획을 [주인공 에디 던포드에게] 들려주는 장면이 그런데, 이는 소비주의의 비장소들이 시간도 제거하게 될 방식을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다. 피스 소설에서 표면적인 주제는 경찰의 부패와 무능, 요크셔 리퍼의 범죄지만, 이 주제들은 장소와 시기의 교차에 대한 그의 한층 깊은 매혹에 의존한다. 이 영화는 BBC 시리즈인 «화성의 삶»Life on Mars, 2006~2007 같은 무언가의 연초점 키치와 대비를 이룬다. «화성의 삶»에서 경찰이 행사하는 폭력이 그리운 기억의 대상인 과거를 애석함을 담아 환기하는 기표라면, 여기서 요크셔는 저주받은 영토로, 마찬가지로 1970년대는 저주받은 시기로 나타난다(피스의 «댐드 유나이티드»를 2009년에 각색한 톰 후퍼의 영화 판본은 재난에 가까웠다. 이 영화의 주된 결점 하나는 영토성이라는 문제에 관여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령론의 한 형식이 아니라면 저주란 달리 무엇이겠는가?

«레드 라이딩 3부작: 1974» © 2009 Red Riding 1974 Limited. DVD: Optimum Home Entertainment(U.K.).

존 아캄프라와 블랙 오디오 필름 컬렉티브Black Audio Film Collective의 작업도 유사한 (유령이 출몰하는) 영토를 건드린다. 2011년 여름에 잉글랜드에서 시위들이 벌어진 뒤 테이트 모던에서 BAFC의 1986년 영화 «핸즈워스 노래들»Handsworth Songs을 상영했을 때 아캄프라는 유령론적 인과성이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토트넘 같은 특정한 장소들에 뭐가 있길래 시위가 계속 발발하는 걸까? 한 지역의 주민 전체가 바뀌었는데도 어째서 그런 반복이 발생하는 걸까? «핸즈워스 노래들»은 유령론에 대한 연구로, 인종의 유령 자체(그런 것이 존재한 적이 있다고 가정할 때 하나의 유효한 잠재성)에 대한 연구로, (강제 혹은 여타) 이주의 트라우마들이 어떻게 세대를 거듭하며 작용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뿐만 아니라 반란과 탈출의 가능성을 그린 작품으로 읽을 수 있다. 이미지만큼이나 트레버 매시슨의 무감동한 사운드 디자인이 이끄는 실험적 에세이 형식은 이 영화가 일부 측면에서 영국 공영 방송이 선보였던 대중 모더니즘의 정점으로 간주될 수 있음을 뜻한다. «핸즈워스 노래들»은 채널 4에서 방영할 목적으로 제작된 반면, 현재의 영국 공영 방송국이 이 작품이나 그와 비슷한 무언가를 의뢰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BBC 라디오에서 제작한 «밀크 우드 아래서»Under Milk Wood[시인 딜런 토머스가 각본을 쓴 1954년 라디오 드라마]와 영국에 당도한 카리브해 지역 출신 이주민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미지 같은 아카이브 소스를 샘플링한 아캄프라의 최근작인 «나인 뮤즈»The Nine Muses, 2010는 어느 정도는 이 잃어버린 대중 모더니즘 시대에 바치는 진혼곡이었다.

«핸즈워스 노래들» Courtesy of Smoking Dogs Films.

패트릭 케일러의 «로빈슨» 3부작은 유령론과 풍경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제공한다. 한 측면에서 «로빈슨» 영화들은 포스트포드주의적 잉글랜드의 부상을 연구하고 있다 할 만하다. 케일러는 산업주의의 잔해에서 헤어나온 잉글랜드를 본다. 이 잉글랜드는 하나의 탈영토화된 구역, 바로 그 익명성 때문에 해로운 하나의 비장소다. 그런데 순교와 적대의 현장들로 돌아감으로써―예를 들어 «폐허 속의 로빈슨»Robinson in Ruins, 2010은 그리넘 커먼Greenham Common[1980년대 초 핵 미사일에 반대하며 결성된 여성들의 평화 운동 캠프]와 과학자 데이비드 켈리[영국 무기 전문가로 정부가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보고서를 조작했다는 2003년 BBC 보도의 취재원으로 지목된 후 사망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자살로 밝혀졌다]가 사망한 채 발견되는 삼림지를 다룬다―이 영화들은 역사를 지우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고자 시도하며, 그리하여 [사태가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추측해 보라고, 혹은 카메라가 현장을 포착한 그 투쟁들을 어떻게 하면 되살릴 수 있을지 숙고해 보라고 촉구한다. 크리스 페팃의 «콘텐트»Content, 2010는 케일러의 영화들과 비슷하게 포스트포드주의적 영국의 비장소들에 대한 해부―그의 카메라는 “새 시대의 첫 건물들”인 “평범하기 그지없는 창고들”을 담는다―이자 대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이버 공간적 통신으로 인한 시간과 공간 자체의 사라짐에 대한 연구다. 하지만 이 영화는 또 후기 자본주의가 차단한 잠재성 일부를 고양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페팃의 첫 영화로 문턱이었던 해인 1979년에 발표한 «라디오 온»Radio On과 마찬가지로 «콘텐트»는 다른 종류의 영국 영화를, 영국에서 영화를 지배하게 된 따분한 문화 유산-산업 키치보다는 유럽 예술 영화와 공통점이 더 많은 영화를 꿈꾼다. 채널 4의 스핀오프 채널인 모어4에서 처음 공개된 «콘텐트»는 레드 라이딩 3부작이 그랬듯 방영되었을 때 어딘가 부조화스럽게, 말하자면 동시대 방송에 전혀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 이전의 공영 방송과 실험 영화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영화는 사실상 미래에서 쏘아 올린 조명탄과 더 닮았다. 이 미래는 한 나라에 도착하지 않았던 미래로, 페팃이 말하길 1979년 이후 그 나라는 “실존하지 않았던 과거에 기반한 어떤 내일로 후진해 왔다”.

«폐허 속의 로빈슨» © 2010 Patrick Keiller and the Royal College of Art. DVD: BFI Video(U.K.)
«콘텐트» Courtesy of Illuminations Films.

[1] [옮긴이]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69~71쪽.

[2] [옮긴이]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2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4, 311쪽.

[3] [옮긴이] 마르틴, 헤글룬드, «급진적 무신론: 데리다와 생명의 시간», 오근창 옮김, 그린비, 2021, 155~156쪽.

[4] [옮긴이] 프레드릭 제임슨, <‘샤이닝’의 역사주의>, «보이는 것의 날인», 남인영 옮김, 한나래, 2003, 187쪽.

[5] [옮긴이]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작자 미상의 자료들을 엮음», 윤원화 옮김, 미디어버스, 2021, 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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