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k-펑크» 1권을 내면서 오랜만에 국내 필자의 서평을 받았습니다. 대중 음악 비평가이자 블로거로 맹활약 중인 나원영 선생님께 서평을 부탁드렸고,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이라는 아름다운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마크 피셔는 오랫동안 ‘제집 같지 않음’unheimlich이라는 기분에 골몰했어요. 이 기분은 자신이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초래하지만, 거꾸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 나원영 선생님은 채 완공되지 못한 k-펑크라는 집을 둘러보면서 제집 같지 않음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냅니다. 나아가 피셔와 마찬가지로 제집이 없는 듯이 느껴졌던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고,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자신만의 집을 지으려는 시도를 긍정합니다.

서평은 “혼자서는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요”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말은 «k-펑크»를 지침서 중 하나로 추가하라는 권유인 동시에 함께 각자의 공간을 지어 나가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불안정하고 불균등할지언정 그렇게 개개의 집이 모여야만 공동체도 꿈꿀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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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영 (대중 음악 비평가, 블로거)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다’는 느낌이 든 적 있나요? 그 ‘집’이 상대적으로 멀쩡히 돌아가더라도, 그 ‘집’에 있는 게 여하튼 편안하더라도 말입니다. 제집 같지 않은 기분, 저는 이것이 언캐니uncanny보다는 언홈리unhomely로 직역될 ‘운하임리히’unheimlich가 아닐까 싶습니다. 두려운 낯섦, 낯선 친숙함, 친숙한 기이함, 기이한 두려움 따위로 번역될지라도 이 감정은 애초에 그 제집 같지 않음에서부터 생겨나겠죠. 어쩐지 저는 언제 어디에 어떻게 있든 간에, 그런 기분에서 완전히 도망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대체 왜일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요? 그보다도, 제집 같지 않은 기분에서 정말로 벗어난다면 ‘제집’에 과연 도착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매우 궁금합니다.

마크 피셔의 «k-펑크»라는 선집, 또는 k-punk라는 블로그 안에는 저마다 다른 책이 몇 권씩이나 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두껍게 분권되는 몇백 쪽의 분량 이상으로 말이죠. 피셔가 생전에 출간한 세 권의 책도 결국 이 풍성한 게시물에서 선별과 편집의 과정을 거쳐 구체화된 책들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가능했었을 미래, 2017년 이후의 피셔를 상상이나마 해 볼 때, k-punk로부터 또 다른 책들이 비롯되는 걸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더욱 거대한 글이 될 수 있을 만한 아이디어가 가득 담긴 «k-펑크»는 ‘안이 밖보다 큰’ 구조를 띠고 있을 텝니다. 그러면 <꿈꾸기 방법들>과 <스크린, 꿈, 유령>으로 이뤄진 1권에서는 어떤 책들을 뽑아낼 수 있을까요.

소재들이 언급되는 빈도만 따져 보면, 분명히 제임스 G. 밸러드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주연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이한 과학 소설의 관점으로 인간의 안팎을 그로테스크하게 뒤트는 둘에 관한 짤막하고 기묘한 평전이 수록된 셈인데, 특히 윌리엄 S. 버로스와 «네이키드 런치»를 경유해 «크래시»에서 수렴하기도 하죠. 피셔는 허구에서부터 실재와 욕망이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현실 번짐’이나 ‘환상 키트’ 같은 놀라운 도구를 빌려 오거나 뺏어 오며 설명하지요. 그러는 한편 크리스토퍼 놀런의 «배트맨» 3부작에 대한 소책자도 끼어 있는데, 코믹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배트맨의 고딕 누아르적인 본질부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선악의 문제, 9/11에서 월가 점령 시위에 이르는 2000년대 미국 정치사의 내용을 관통합니다. 한편 어딘가에는 카프카를 당혹스러운 관료주의 희비극으로 해석하거나, 글램을 노동 계급의 전략적인 치장 도구이자 그렇기에 지극히 ‘영국적인’ 미학으로 설명하는 비평이 흩어져 숨어 있기도 하고요. 70~80년대 공영 방송이 요상한 꿈을 꾸게 하듯 뒤흔들었던 ‘리얼리티’가 어떻게 21세기의 ‘(포스트)리얼리티’ TV 쇼를 통해 불안정하고 무기력하게 단단해지는지를 회고적으로 분석하면서 불만과 섭섭함을 감추지 않는 리뷰들도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미디어 60년대와 목가성, 강박과 엘리트주의/부성주의, 포르노그래피와 가족사 등의 실마리를 따라가다 보면 잃어버린 책들에 대한 단서를 한가득 발견할 수 있고, 심지어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제법 반성적인 후기까지도 들어 있네요.

그렇지만 다시, 저는 «k-펑크» 1권에서 제집 같지 않음, 말하자면 부적합함의 기분을 끄집어내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우선 참고해 볼 만한 구절은 책 전체의 지은이 서문으로 기능하는 <왜 k인가?>의 5번 항목입니다: “저렴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사운드 프로덕션 소프트웨어의 발달, 웹과 블로그의 등장이 뜻하는 바는 전례 없는 펑크 하부 구조가 가용해진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오직 의지, 승인되거나 정당화되지 않은 것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무언가가 공식 채널들을 통해 접하는 무언가만큼―혹은 그보다―중요할 수 있다는 믿음뿐이에요”(43, 강조는 인용자). 이때 펑크는 장르명이 아니라 “중앙 집중화된 통제의 필요를 파괴”(43)하는 ‘비공식적인’ 팬진들의 실천을 잇고, k란 실리콘밸리의 빅 테크 기업들이 어느새 ‘공식적으로’ 집어삼킨 온라인 공간을 돌려받으려는 시도를 나타냅니다. 아직은 공인된 플랫폼들이 비공인된 페이지를 잠식해 가며 난개발하지 않았고, 검색 엔진과 소셜 미디어가 웹상의 정보들과 그 재분배를 ‘사용자 친화’적으로 독점하기 직전이던 시기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k-펑크»를 피셔가 겪었던 온갖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의 백과 사전처럼 읽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20년 전의 피셔가 블로그를 개설하고 이 창구에 믿음을 건 이유가 여기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학위를 따며 “문자 그대로―임상적으로―우울”(42)에 시달렸고 그 탓에 학계에 적대적으로 반발했다는 게 유일하거나 가장 주요한 이유는 아닐 것 같고요. 차라리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이론과 팝/영화는 언제나 강도 높게 접속해 있었”으며, “감상에 젖고 싶지는 않지만 저 같은 출신에게는 그런 관심을 가질 다른 경로가 거의 없었”(42)다는 걸 끊임없이 재확인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1부를 여는 <책 밈>을 인용해 보자면: “성인이 되고 가장 슬펐던 때는 청소년기에 […] 발견한 것들에 대한 충실성을 잃은 시절이었어요”(49, 강조는 인용자). 이때 제집 같지 않음은 삶의 두 시기에 걸쳐 이중으로 나타납니다. 성인이 되어 헤매는 익숙잖은 곳들에서 주로 느끼는 동시에 어느새 시간적으로 멀어진 청소년기 자체도 어째 익숙잖아지면서 말이죠. 그러나 당혹감은 원래부터 새롭고 낯설며 결국에 ‘제집’이지는 않은 성인기의 영역들보다는, 여태껏 제집인 줄로만 알았던 청소년기에서 더 강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것이 아마도 제집 같지 않음이 작동하는 한 방식이겠죠.

2부에 실린 <이 영화는 옛날처럼 감동적이지 않았다>가 적절한 예시일 거 같군요. 한국인인 입장에서는 마냥 부럽게 느껴질 뿐이지만, 몇 안 되는 대중 모더니즘의 창구 중 하나였던 영국 방송 공사BBC는 청소년기의 피셔에게 충격적인 시청 경험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땐 끔찍히 무섭게 느껴졌던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을 어른이 되어 재시청하면서 그 “시시한 공포에 낙담하며 처음부터 그런 순간이 실존하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185)은 곧 피셔에게 과거의 제집 같지 않음을 산출합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열광과 성장 간의 뒤틀린 충돌 속에서, 어느 하나를 부정하며 따르는 “우울증적 리얼리즘 아니면 마니아적 광신”(185) 양쪽 모두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대체 어떡해야 할까요.

성장이 들이닥치기 이전에 열광했던 수많은 작품에서, 피셔는 “친숙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에 내재한 환원 불가능한 이례성”(188)이라는 공통점을 짚어 내곤 합니다. 그러니까 ‘제집인 줄로만 알았던’ 게 애초에 제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식이라고 할까요. 어쩌면 밸러드의 단편 <광활한 공간>을 TV 영화화한 «집»에서 “현관문 너머의 세계와 절연한 제리의 공간 감각[이] 망망하게 팽창”해 “텍스처와 이전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세부로 충만”(67)해지는 것처럼 말이죠. 다만 영문 모를 것들이 언제나 들어차 있던 이곳을 그동안 친숙한 제집이라고 기꺼이 믿어 왔을 뿐이고,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은 이 사실로 향하는 으스스한 길목이 되어 줍니다. 피셔가 크로넨버그의 2000년대 영화들이나 킹/큐브릭 각각의 «샤이닝»을 다루는 글에서 가족(사)을 ‘제집’의 위치에 두며 말하듯, 이는 이제 “유일하게 살 만한 현실이란 모사 현실임을 받아들이는 문제”(223)가 되죠.

청소년기에 대한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이 ‘제집’으로 믿어 온 곳에서 생겨난다면, 성인기 쪽에서 작동하는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은 ‘제집’을 떠나 거치는 곳들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리플리의 글램>에서 록시 뮤직과 브라이언 페리를 끌어와 설명하는 ‘글램 충동’을 그렇게 읽어 볼 수 있겠네요: “의상과 몸가짐, 목소리가 위조되지만 아직 완벽하지는 않다. 여전히 뿌리가 드러나 있으며,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고통스러운 드라마에는 실존적 무게가 얹힌다”(123). 글램 충동이 강화하는 치장의 성질은 제집 아닌 곳에 적합해지고자 스스로의 정체를 철저히 꾸미는 것으로 이어지며, 피셔에게 이는 특히나 출신지와 계급의 문제가 됩니다. 제집이라 믿어 온 곳의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청소년기의 제집 같지 않음이 모사된simulated 현실을 드러낸다면, 원래부터 제집도 아니었던 바깥에서 밀려드는 성인기의 제집 같지 않음은 모사된 자아를 들이밉니다. 그리고 양쪽은 부단한 되먹임 속에서 서로를 증폭할 거고요.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이 ‘제집’의 안팎을 배회하며 불어나는 움직임은 각본가 데니스 포터의 자전적인 TV 드라마를 논하는 <자리에서 일어서, 나이절 바턴>에서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됩니다: “말하자면 새로 얻은 특권과 지위를 포기하기는 싫지만 그것들을 몸에 밴 것처럼 받아들이거나 즐길 수 없고, 뿌리에 매달리면서도 그것을 거부하며, 출신을 결코 잊지 않지만 태생이 자신에게 남긴 흔적들을 수치스러워하는 것이다. 또 그런 수치심을 수치스러워한다. 지도층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결코 편하지 않지만 자신을 낳은 공동체에서도 더는 아늑함을 느끼지 못한다”(169). 어느 쪽의 갈래를 타더라도, 제집 같지 않은 이 기분은 ‘제집’이라 둘 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되풀이하며 알려 줍니다. 성인기 쪽에서는 공간적인 의미로 ‘제집’ 아닌 어딘가를 어색하게 헤맨다면, 청소년기 쪽에서는 시간적인 의미로 ‘제집’이었던 언젠가가 (광원 파업에 대한 데이비드 피스의 소설 «GB84»를 상세히 다루는 <무섭고 두려운 세계>에서 회상하며 보이듯) 이미 예전 같지 않아졌거나, 더욱 두렵게도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제집 아닌 곳들이 제집이었던 곳을 몽땅 집어삼키든, 제집이었던 곳에서부터 흘러나온 제집 아닌 곳들이 그를 온통 뒤덮든 말이지요. 이러한 제집 같지 않은 기분들이 «k-펑크» 여기저기에 온갖 꼴로 득시글대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마도 ‘충실성’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어느새 제집 같지 않아진 청소년기에 대한 당혹감과 어쩌든 제집 같아질 리 없는 성인기의 수치심이 뒤섞여 “내가 어디에도 부적합한 사람이라는 우주적인 감각”(52), 어디에도 충실하지 못하겠으며 그 무엇도 충실치 못하다는 기분이 만들어지죠. 현재에 제집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과거의 제집으론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면, 지금 가용한 자원들을 사용해 제집처럼 느껴지는 어딘가를 짓거나 충실해질 수 있을 무언가를 만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의 피셔가 스스로에게 “농간을 부릴”(25) 수 있게라도 해 준 모든 것, 즉 출신과 계급 등의 특징과 맞닿은 교외지부터 지극히 주관적으로 꾸린 사적인 정전들, 충격을 불러오며 그 목록을 만들어 줬던 몇 안 되는 창구, 그를 통해 만난 선대와 동료 독학자들에게 익힌 이론 활용법, 심지어는 제집 같지 않은 기분 그 자체까지가, 수중의 재료와 도구가 되어 “세계와의 유일한 접속처, 유일한 외선”(25)이 되어 준 블로그를 쌓아 올립니다. 그 기분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이것이 어떻게 생겨 먹었으며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를 낱낱이 기록하면서 지어진 k-punk가, 그렇게 10년 동안이라도 피셔가 충실할 수 있을 제집의 역할을 맡아 준 게 아닐까요. 그러는 동안에 “단속적이고 단편적으로만 시간을 운용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황”(303)이 사방을 음울하고 불길하게 지배했어도 말이죠.

«k-펑크»가 신기하고 중요한 까닭은 이렇게 피셔가 새로운 ‘제집’을 지어 가는 과정을 담았을 뿐 아니라, 이곳이 오로지 그만의 도피처는 아니었다는 걸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런 앰브로즈의 <엮은이 서문>이 밝히듯 온라인 공간의 덧없음과 편집상의 한계로 제대로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k-punk는 혼자만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온갖 사람이 모여드는 장소였으니까요. 댓글 타래의 논쟁들이 실리진 못했으나, 온라인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제집’을 짓고 이웃들을 찾아 나선 동료들의 흔적은 본문 여기저기에 남아 있습니다. <책 밈>이 그들의 연결망에서 소소하게 돌고 있던 ‘챌린지’를 이어받아 쓰였고, (두드러지게는 <토이 스토리>와 <선물의 반환>, <탈정체성 정치> 등에서) 종종 인근 블로그의 게시물과 각종 이론서, 기사문이 동등하게 인용되듯이 말이죠. 곧 저마다의 제집들이 따로 또 같이 존재하는 블로고스피어 전체가, 포스트펑크도 정글도 지나가 버린 시기에 가용한 매체를 써먹어 그만의 온라인-팬진이 된 셈입니다.

집단적인 제집으로서의 블로고스피어가 제로 북스와 리피터 북스의 설립을 통해 실물 영역으로 확장되며 피셔의 2000년대를 마감했다면, (4권에 실릴 예정인) <뱀파이어 성에서 탈출하기>는 이 전후로 빠르게 달라져 버린 인터넷에 대한 실감과도 같을 겁니다. 글에서 피셔가 적확하게 비판하는 고발call-out 문화와 같은 ‘전략’들은 상대적으로 자그마한 제집들의 이웃 연결망과 같던 블로그 네트워크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은 다른 사람과 무방비하게 직면하고 홈페이지에서 계정 단위로 쪼그라든 제집 하나조차 간수하기 힘겨운 초대형 메시지 보드 및 소셜 미디어의 산물이었으니까요. 익숙한 제집 같지 않음이 웹에 걸맞게 새 유형으로 되풀이되었지만 피셔는 이 기분을 다시 한번 활용해, 블로고스피어에서 실현했던 가능성을 현실에서 실체화하고자 2010년대를 정치적인 실천으로 보냅니다. 그동안 k-punk에 들어 있던 몇 권의 책을 «내 삶의 유령들»과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으로 결산하고, 새로이 획득한 자원과 충실성으로 만들어질 미래의 책을 «애시드 공산주의»로 기획하면서요.

이때로부터 길게는 거의 10년이 지난 현시점에 가늠해 보면, k-punk는 온라인이 현실 그 자체가 되어 버렸을지라도 바깥을 펼쳐낼 힘이 이 안쪽에 여전히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줍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k-펑크»를 제집 같지 않은 기분들로 지어진 제집, 온오프라인 양편에서 집단적인 이웃을 형성한 제집의 도안이자 작업기로도 읽어야 할 테고요. 이 건축물의 기반에는 무엇이 깔려 있을까요? 가장 공인된 창구라는 특성을 (역)이용해 교양과 문화를 재분배했던 BBC와 ITV가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포섭되며 겪는 하향 평준화를 다루는 <불안정성과 부성주의>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요. 70~80년대의 공영 방송을 문득 “웹 2.0의 흥미로운 이면”(300)에 맞대어 견줘 보는 부분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공허한 ‘논쟁들’이 아니라, 블로그에 글을 쓰고 유튜브에 자료를 올리며 위키피디아를 업데이트하는 일의 중요한 동기인 공유 충동 말이다. 어떤 것이 다중의 작품이라면 그것은 유튜브가 보여 주듯 샐비지펑크salvagepunk 아카이브와 비슷한 무엇이라 할 수 있다”(300, 강조는 인용자). 카이버펑크는 자본에게 공인받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정당화되지 못할, 그러므로 언제나 미승인 상태에서 대기 중일 비공식의 영역에서 발원했다는 점과, 주석에서 설명되듯 수중에 가용한 자원들을 써먹으며 제집을 지어 나가는 “재전유 과정이 그 폐기물-객체의 고유한 속성을 간직한다는 점”(300)에서 샐비지펑크와 긴밀히 맞닿아 있습니다. 두 개의 펑크를 가동한 공유 충동과 그에 대한 믿음은 어쩌면 “시청자의 지성을 전제하는 태도에 ‘엘리트주의적인 것’은 없다”(324)는 듯이 으스스한 프로그램들을 틀어 준 70~80년대의 공영 방송과, 규제도 인준도 없이 기이한 정보와 소음을 쏟아 내는 기괴한 벽지였던 90~00년대의 인터넷을 기묘하게 엮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글에서 피셔는 21세기의 웹 2.0을 “스펙터클에 대한 해독제가 아니라 스펙터클을 한층 만연하고 전체적인 것으로 연장하는 참여”(339)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필 ‘스펙터클’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게 의미심장한데요. 앞서 인용한 <왜 k인가?>의 구절에서 부족한 것은 오직 의지뿐이라 단언한 이후 피셔가 펑크 시대의 의지가 수축한 이유를 다름 아니라 “생산 수단들의 가용성이 스펙터클 권력의 보상적 재집권에 보조”(44, 강조는 인용자)된 탓으로 두기 때문입니다. 청소년기(70~80년대)와 성인기(00년대 이후)의 피셔가 잠시나마 ‘제집’을 지을 수 있도록 한 힘이 과거의 ‘공식적인’ 공영 방송과 당대의 ‘비공식적인’ 인터넷 각각에서 들끓던 공유 충동이라면, 그 직후 양편의 욕망을 좌절시키며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을 강도 높이 불러일으킨 게 바로 이 스펙터클 권력이지 않을까요. 앞선 인용문이 실린 <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에서 피셔가 새삼스럽게 «캣칭 파이어»에 열광하며 짚어 나가는 “적” 또한, 인터넷 시기에 들어와서도 텔레비전의 형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리얼리티 시스템”(339)이니 말입니다. 그 시스템은 밸러드가 «잔혹 행위 전시회»에서 과격하게 뒤틀었던 “미디어 60년대”의 스펙터클 권력이 “미디어 21세기”의 상황에 맞춰 새로이 발명한 도구이기도 할 것입니다.

«k-펑크»가 피셔의 개인적인 생애를 관통하면서 포착하듯, 잠재적인 제집들이 재개발되고 흔적만 남은 공터에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이 만연하는 현상은 그리 멀지 않은 근과거와 근미래, 혹은 그사이에 끼인 기나긴 현재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렇지만 <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가 «캣칭 파이어»를 비평하며 강렬하게 보여 주듯 바로 그 ‘리얼리티 시스템’에는 언제나 내파의 가능성이 잠재해 있고, 이는 언제나 필연적인 혁명의 가능성을 동반하지요. 마무리가 시적으로 벅차오르기 직전, 피셔는 캣니스를 연기하는 제니퍼 로런스가 보이는 것이 “개인화된 감정이 아니라 정치적 등록부를 가진 감정”이라 명명합니다. 그 수많은 감정에는 “분노, 공포, 단호한 결의”(342)가 있겠지만, 저는 거기에 제집 같지 않은 기분도 담겨 있다고 느꼈어요. «k-펑크» 1권을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물론 이곳이 제 ‘집’이 됐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어딘가 안심이 되긴 했어요.

마크 피셔는 자신의 주위를 떠도는 모든 것에서 스스로의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을 민감히 감지하고 이를 면밀히 관측한 사람입니다. 순전한 열광과 열띤 불평불만을 함께 담아서 말이죠. 한국어로 채 번역 소개되지 못한 사적인 정전들이나 “처음부터 품절”(326)이었던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들이건, 성인기에 종사한 관료적인 교육 현장이나 청소년기의 씁쓸하고 우울한 기억이건, 언제든 또 어디서든지요. 이윽고 그는 카이버펑크 네트워크를 가동해 이를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감정으로 등록한 뒤, 이 외선 너머로 신호를 받는 이웃들에게 암암리에 소문을 퍼뜨립니다. 이 기분이 오직 나만의 것도, 그 누구만의 것도 아니라고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이유는 개인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들 수 있는 사적인 영역이란 없다”(342). 나섰다가 언젠가는 돌아올 제집, 헤매다가도 결국에는 복귀할 제자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k-펑크»는 ‘집에 가고 싶다’는 이 느낌, 제집 같지 않은 기분이 실은 제집을 지어 올릴 필요이자 욕망과 이어져 있다는 걸 일깨웁니다. 그 제집이 환상이나 허구이건, 어쩌면 실재이거나 현실이건 말이죠. 사실 ‘일깨운다’는 건 그리 알맞은 표현이 아닌 것 같은데, k-punk 자체가 피셔 본인이 자신의 욕망과 필요로 지어 올린 사적인 건축물이자 기묘한 공공 기관이기 때문이죠. 그가 자신만의 조건과 환경, 그리고 불안정한 변화 속에서도 제집을 짓는 방법을 익혔다면, 우리 또한 «k-펑크»에서 건축의 지침서를 꺼내 함께 읽어 볼 수 있을 겁니다. 혼자서는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요.


[1] 영국의 전자 음악가 로레인 제임스의 2021년 트랙 We’re Building Something New와 2022년 음반명이자 동명의 트랙인 Building Something Beautiful for Me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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