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우연히 싱어송라이터이자 문필가, 또 활동가라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인 데라오 사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업을 조금씩 살펴보며 참 담담하게 여러 측면에서 사유와 감정을 건드리는 작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 끝에 에세이집인 «천사 일기»를 올해 계약해 번역 출간하기로 했습니다. 그의 글에는 구체적 개인들의 삶과 전쟁으로 굽이진 역사가, 공연이나 취재를 위해 세계를 이동하며 겪고 생각한 일들이, 공감을 머금은 관조 속에서 엮여 당연시되는 현실의 이면으로 독자를 이끄는 특색이 있어요.
그리고 이번에 기회가 생겨 그 매력의 일단을 여러분께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데라오 사호로부터 2026년 7월 19일 내한 공연을 기념해 한국의 독자 및 청자에게 보내는 선물로서 한 편의 에세이를 전달받았습니다. <‘너의 여행’에 대해>를 번역가 김단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 공유합니다.
이 글은 밴드 Fuyu Ni Wakarete(겨울에 헤어져)가 최근 발표한 노래 ‘너의 여행’이 탄생한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혜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교차한 몇 가지 죽음에 대한 글이기도 합니다. 2차 대전 말기 자살 특공대 학도병들의 죽음, 헤노코 미군 기지가 건설 중인 오키나와 바다 생물들의 죽음, 뇌종양을 앓는 심신을 직시했던 친구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어릴 적에 집을 나간 아버지의 죽음. 이 혜성들의 궤적이 남긴 심상이 하나의 노래를 지었다는 사실은 한 음 한 음의 울림을 더욱 깊이 음미하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https://youtu.be/35RcTW0h9HM?si=P28Arxulqp6bncg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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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여행>에 대해
데라오 사호寺尾紗穂 지음
리시올/플레이타임 옮김
김단비 감수
아사마 온천에서 열리는 예술제 유아리테 참여를 계기로 2022년에 <아사마 온천 망향의 노래>를 접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특공대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겠다고 느껴 관련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군사적인 상세를 담은 한 책의 말미에는 적함을 향해 돌진했던 특공기 한 기 한 기의 명칭, 침몰 위치,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다가 쇼와 20년[1945년] 8월 9일에 도호쿠 가마이시 부근을 적 함대로부터 지키려다 긴카산섬 앞바다에서 침몰한 특공기에서 ‘혜성’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얼떨떨해졌다. 20세기 최대의 참혹한 가해 행위 가운데 하나인 원자 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날, 즉 일본의 패전이 두 번째 원자 폭탄에 의해 결정적으로 확정된 바로 그날에도 특공병들이 미국 군함을 향해 목숨을 내던지고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나가사키와 멀리 떨어진 도호쿠 바다에서였고, 그들은 ‘혜성’을 타고 있었다. 이 극적인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다.
나는 2018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 <두 개의 혜성>이라는 글을 완성했다. 이 글은 «혜성의 고독»이라는 에세이집에 실려 있다. 어릴 적 아버지와 떨어져 살게 된 일, 이후 아버지와의 사이에 생겨난 미묘한 거리는 내게 버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떠나기 직전의 짧은 동안 나와 아버지 사이의 거리는 아주 조금 좁혀졌다.
나도 아버지도 혜성이었던 걸지 모른다. 어두운 우주 속, 제각각의 궤도를 여행하는 눈물 많은 존재. 두 궤도는 빙 돌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겨우 조금 맞닿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두 개의 혜성>, «혜성의 고독»)
살아갈수록 더는 만날 수 없게 된 사람이 늘어 간다. 사람은 마음의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서로를 스쳐 간다. 혜성과 마찬가지로 자기 궤도를 벗어날 수 없다. 먼 내세에 다시 만날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줄곧 해 온 터라 ‘나가사키의 날’[1]에 목숨을 불사른 ‘혜성’이라는 특공기가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혜성이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타고
너는 그때 빛이 되었다
이런 후렴 멜로디가 가사와 함께 태어났다. 그때는 음성 메모로 녹음만 하고 놔두었다. 도입부 멜로디와 가사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곡이 탄생할 때는 단번에 완성되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 곡은 달랐다.
찾아보다 전쟁 말기 특공 현장에서 ‘혜성’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가사키의 날은 물론이고 종전일에도 이바라키의 햐쿠리하라에서 제4미타테대[2]의 ‘혜성’ 함상 폭격기 12기가 출격했다. 더욱이 옥음 방송[3]을 들은 직후에조차 오이타 비행장에서 제5항공함대의 혜성 폭격기 11기와 우가키 사령장관 이하 22명이 오키나와를 향해 출격했다. 당연히 전과를 거두지 못했고 종전 당일의 자살 행위가 되어 버렸다.
전쟁이 끝날 무렵, 수많은 혜성이 마치 유성우처럼 바다를 향해 적기를 향해 돌진했다.
2025년 3월 25일, 오키나와에서의 일곱 번째 나키진 라이브[4]가 잡혀 있었다. 그 전해에는 팬인 사쿠라코 씨에게 건설 중인 헤노코 주일 미군 기지가 건너다 보이는 세다케 해변을 안내받은 일이 있는데, 이때 조개 연구자 나와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헤노코 기지가 완성되면 조류가 바뀌어 진흙탕 바다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고 계십니다.” 솔직히 그때는 정말 그렇게 될까 반신반의했다.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라이브 무대에서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 <쓰키누카이샤>라는 제목의 아름다운 달밤 해변을 노래하는 오키나와 옛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지 건설 반대 입장에서 다소 과장한 이야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25일 라이브를 앞두고 사쿠라코 씨와 함께 나와 선생님의 사설 박물관 ‘조개와 언어의 박물관’을 찾아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처음 품었던 생각은 오키나와 해변의 변화를 전혀 모르는 내지 사람의 오만이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나와 선생님은 세다케 해변과 마찬가지로 한때 조개와 생물 들의 보고였던 요나바루 해변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산호초 사이로 틈이 있어 오키나와 바다치고는 파도가 거세고, 바다 빛깔도 내지처럼 짙은 푸른빛을 띠며, 우타키御嶽[5]가 있는 육지에서 흘러드는 강물과 어우러져 영양분이 풍부한 기수역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두 해변의 공통점이었다. 옛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서 두 해변을 신성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나바루 해변이 개발되면서 매립이 진행되었고, 생색내기처럼 남겨진 해변은 더 이상 파도가 닿지 않아 진흙탕으로 변했다. 수없이 많던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모습을 두고 나와 씨는 “마치 습진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직접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비통함이 묻어 나는 말이었다. 조개들도 모습을 감추었다. 연구소에 근무하던 나와 씨는 죽은 물고기들을 건져 올려 표본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 그때 나와 씨가 느꼈을 슬픔은 나였다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그저 생명을 사랑할 줄만 알았던 사람이 그런 광경을 눈앞에서 보아야 했다는 것. 죽은 물고기들을 표본으로 만들어야 했다는 것. 원래 시를 쓰는 사람이었던 나와 씨는 이 슬픔을 조용히 소설의 형태로 결정화했다.
문득 파도가 밀려온다. 흙탕을 검은 연기처럼 휘말아 올리며 잔물결이 밀려온다. 뒤로 물러서지도 못한 채 검은 물속에 우두커니 서 있다. 죽은 물고기들을 쓰러뜨리며 파도는 끈적하게 빠져나간다. 맹렬한 부패취가 콧속을 찌른다.
(나와 준, <유나>, «신오키나와 문학» 96호)
나와 씨는 오키나와의 자연 해변 대부분이 인공 해변으로 바뀌었음을 알려 주었다. 나는 딸들이 어릴 적에 오키나와 인공 해변에 데려와 논 일을 떠올렸다. “수영하려면 저 해변이 좋지”라며 택시 기사님이 데려다준 곳이었다. 해파리 방지 그물이 쳐져 있었고 파도도 거의 일지 않았다. 바닷물은 맑았다. 새하얀 모래사장.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해수욕을 즐겼다. 조개 연구자인 나와 씨의 설명에 따르면 그 해변은 생물이 없는 ‘죽음의 해변’이었다. 인공 해변은 매립한 콘크리트 위에 조성된다. 모래는 게라마 제도의 풍요로운 바다 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곳에서 살던 수많은 생물과 조개 들은 모래와 함께 육지로 퍼 올려져 소독된다. 살아 있던 조개와 미생물도 죽는다. 생물이 죽어 사라진 모래는 인공 해변에 빈틈없이 깔리지만, 태풍이 오면 콘크리트가 드러날 정도로 모래가 해풍에 날려가 도로 통제를 초래한다고 한다. 죽음의 해변. 듣기 전까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조개를 주웠던가. 그것은 절멸당한 조개들의 잔해였다. 해변 바닥에는 살아 있는 조개가 하나도 없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오키나와 사람들도 인공 해변에서 노는 것이 당연해졌고 해변에서 생물과 교감하는 일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어릴 적 자주 가던 바다는 도쿄에서 가까운 히가시이즈의 바다였다. 해조류가 가득해서 그다지 아름답다는 인상도 없었다. 그래도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걷다 보면 가끔 발바닥을 콕 하고 물리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모래 밑에는 분명 생물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해변에는 작은 게도 있어서 쫓아다녔던 것 같다. 사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 중대한 변화다. 아이들에게 그런 작은 생명과의 교감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는 내 어린 시절의 경험만으로도 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변화가 아주 매끄럽게, 소리 없이 찾아온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변과 그곳에 사는 생물을 잘 아는 사람에게 그것은 결정적인 변화였다. 진흙탕 해변에 우두커니 서 있었던 나와 씨가, 지금부터 몇 년 뒤 세다케 해변에서 같은 일을 다시 겪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이 사람에게 같은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키나와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사쿠라코 씨가 건네준 잡지에 실린 나와 씨의 소설 <유나>를 읽었다. 표지에는 “제50회 신오키나와 문학상 수상작 발표, 나와 준의 <유나>”라고 적혀 있었다. 심사평 가운데에는 아카사카 마리[6] 씨의 글이 있어, ‘조개와 언어의 박물관’에서 방명록을 적을 때 내 이름 위에 아카사카 씨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이것은 현대의 «고해정토»[7]다. ‘유나’란 바다 밑 폭신하게 부푼 모래섬을 뜻한다. 지금 헤노코에서 ‘연약 지반’이라 불리는 바로 그것이 ‘유나’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헤노코를 다룬 문학이자, 늘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오래되고도 새로운 전쟁을 그린 통절한 전쟁 문학이기도 하다.
(아카사카 마리, <핵심은 변방으로 보이는 곳에 응축되어 있다>, 제50회 신오키나와 문학상 심사평)
오키나와에서 돌아와 며칠 지난 28일, 나와 씨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더니 가사가 떠올랐다.
슬픔 없는 세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이것은 아직 밝지 않은 밤의 노래야
아침의 기척도 모른 채
가만히 생명을 지켜보는 이에게
절망은 몇 번이고 건네진다
그런 잔혹함이 있어도 되는 걸까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처럼
떠오른 말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외할아버지 여동생이 읊은 단카短歌[일본 정형시 와카의 한 형식]를 떠올렸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 우연히 NHK 단카 프로그램에서 본 것이다.
출정한 아이들 돌아오지 않은 뒤에는 신불을 향해 합장하는 일도 없이 세상을 뜬 어머니여
(시미즈 후쿠코)
즉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는 내 증조모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증조모도 후쿠코 씨도 알지 못하고 모두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처음에는 모르는 누군가의 노래로 들었지만 인상이 강렬했다. 할아버지의 두 형은 해군에 배속되어 필리핀 앞바다에서 전사했다고 들었다. 증조모가 전사 소식을 듣기까지 신불에게 아들들의 무사를 얼마나 빌었을지 상상이 갔다. 자신이 줄곧 기도를 올린 신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전후 그녀가 품었을 허무감을 헤아릴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이 일본에 넘쳐난 것이 전후라는 시기다.
4월 4일, 나는 확인할 것이 있어 과거 메신저 대화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때 오무라 유타카라는 계정이 눈에 들어왔다. 근래 몇 년간 연락이 끊긴 사람이었지만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아! 그는 잘 지내고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오무라 씨를 처음 만난 것은 가나자와의 로렌스라는 카페였다. 로렌스는 마히토 더 피플[8]이 “재밌는 곳”이라며 알려 준 가게였다. 몇 번 가 본 적이 있는데 처음에는 못키리야 라이브[9]를 앞두고 잠깐 들렀다. 그곳에 내 라이브를 찾은 손님도 몇 명 있었던 것 같았는데,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오무라 씨였다. “나라에서 왔어요. 이따 라이브에도 갈 겁니다”라며 말을 걸어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는 취미로 여러 곳을 다니며 커피를 내려 주고 있다며, 이번에도 도구를 모두 챙겨 왔으니 다음 날 시간이 되면 커피 한 잔 내리러 가도 되겠느냐고 했다. 오전이라면 시간이 있었기에 그럼 부탁드린다고 답했다.
어쩐지 이번에는 커피를 대접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눈빛이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는 ‘미남’을 판단하는 기준을 잘 모르겠고 솔직히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는 이른바 ‘미남’ 축에 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아무튼 나는 그의 눈을 좋아했다. 그 뒤에도 시오야에서 있었던 소카베 게이이치[10] 씨와의 라이브나, 도쿄 네리마의 기라쿠도에서 열린 하라다 이쿠코[11] 씨와의 라이브 등에 커피를 내리러 와 주었다. 네리마에 왔을 때는 가족과 함께였다. 코로나 탓에 좀처럼 진척시킬 수 없었지만 나라에서 라이브를 기획하고 싶다고 했었고, 공연장도 대강 점찍어 두고서 이따금 상담 메일을 보내왔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오사카의 한 공원에서였다. 2020년 8월 오사카 시마노우치 교회 라이브 다음 날이었으리라.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커피를 내려 주었는데 마치 영화 같았다. 그때 오무라 씨는 자신의 병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뇌종양이 있다는 것, 평소에는 물리 치료사로 일하고 있다는 것, 종양도 따지고 보면 자신의 일부인데 그것을 적대시하고 제거하려 하는 데 위화감을 느낀다는 것, 굳이 항암 치료를 받지 않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신체의 변화와 마주하고 싶다는 것. 대강밖에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우리는 연락을 주고받았다.
제 몸에 관해서라면, 처음에는 여러 일로 꽤 많이 낙담했죠… 스스로의 죽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보니, 지금까지 나름대로 삶을 돌아본다고 돌아본 것이 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시늉’에 지나지 않았구나 싶더군요. 그러다 나중에는 죽음과 부대끼는 일이 곧 삶과 마주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나자빠질 정도의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닫지 못했을 사람이라 ‘무언가’가 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제게 가르쳐 준 거라고 생각합니다. 똑바로 살아가라고요.
참, 여담인데 기라쿠도에서 사호 씨와 이쿠코 씨가 리허설을 하는 동안 제가 커피를 내렸잖아요. 사실 가벼운 발작이 있었어요. 그때는 소리와 향기에 둘러싸여 꿈속에 있는 기분이라, 정말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고 있었던 것이 떠오르네요(웃음). 이야기가 샜는데, 그런 와중에도 살면서 사호 씨를 나라에 초대해 라이브를 여는 일만은 꼭 이루고 싶었어요. 지금은 흐지부지된 감이 있지만 반드시 개최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잘 부탁드려요.
(2020년 8월 3일)
이후로도 그는 공연장 측과 계속 협의했지만 코로나 탓에 일이 좀처럼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마침내 세부 사항을 확정해 예약을 받기 시작했지만 결국 코로나에 발목이 잡혀 공연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천사 일기»를 엮게 되어, 고치 신문에 연재했던 로렌스 첫 방문 경험을 담은 에세이를 포함하기로 하면서 오무라 씨에게 확인 연락을 했다.
축하드립니다! 저도 정말 기쁘네요. 글에는 아무 문제 없는 것 같습니다. 읽다 보니 그리움과 함께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1년 조금 넘게 지났나요. 신오사카역 근처 공원에서 제 지병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 같네요. 그 뒤로 여러 일이 있었고 사호 씨에게 언제 연락을 드릴지 자주 고민했습니다. 이따금 사호 씨에게 털어놓고 싶어지거든요. 신체와 정신의 연결, 이른바 병이나 증상이라 불리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 머릿속으로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양한 제 모습을 통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마주하는 일이네요. 추상적이라 죄송합니다. 조만간 조금 더 풀어서 편지 느낌으로 메시지를 드리겠습니다. 서양 의학적으로는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2년 전과는 또 다른 눈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호 씨는 건강히 지내고 계신가요?
(2021년 11월 13일)
메신저상의 마지막 교류는 2021년 12월 25일. 완성된 «천사 일기» 증정본을 보낸 다음이었다.
무사히 도착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합니다.
잘 읽을게요♪
잘 지내고 있을까. 황급히 오무라 씨의 계정 사진을 클릭해 그의 페이지로 들어갔다. 친구들이 그를 태그한 게시물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세 번째 게시물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2023년 9월 29일에 그의 친구 한 사람이 올린 글이었다. 2022년 9월 말. 마지막 메시지를 받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죽었군요? 마음속으로 묻자, 실은 그렇습니다 하고 수줍게 웃는 오무라 씨가 보였다.
아마도 그는, 좋은 삶을 살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멋대로,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때로는 두려워하면서, 망설임 속에서. 일반적인 결단은 아니었을 테지만 물리 치료사로서 치유를 보조하는 일에 종사하며 인간 신체가 가진 가능성을 믿었던 사람답기도 했다. 아내로 보이는 계정에 메일을 보내 보니, 남편의 죽음을 나에게 알려야 할지, 남편이 일방적으로 팬이었을지도 몰라 폐가 될까 고민하고 있었다고 했다. 고향인 단고丹後로 돌아가 커피숍을 열려던 그 참에 떠났다고 했다. 게다가 그의 죽음 사흘 전에는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고 했다. “남편은 나을 거라고 믿으면서도 죽을 곳을 찾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는 말이 아내의 메일에 적혀 있었다.
‘죽을 곳’이라는 말이 인상에 남았다. 그가 죽을 곳은 병원이거나 자택이었으리라. 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느껴졌다. 죽음이라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쪽을 향해 나아갔던 오무라 씨. 당신은 어떤 죽을 곳을 찾고 있었나요.
혜성이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타고
너는 그때 열기가 되었다
너의 소원을 아무도 모른다
추락하는 이카로스는 빛이 되었다
혜성이라는 이름의 비행기를 타고
너는 그때 꿈이 되었다
너의 소원을 아무도 모른다
몸을 버리고 먼지가 되었다
후렴만 써 두었던 곡의 다음 부분이 태어났다. 몇몇 단어는 바꾸었다. 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망설이면서도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자기 의지로 걸어간 오무라 씨. 시대도 상황도 다르지만 그 벡터가, 젊은 나이에 죽음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 특공병들의 그것과 겹쳐졌다. 오무라 씨의 죽음은, 죽음의 순간은 무無였을까. 워낙 선명하고도 강렬하게 살았기에 마지막까지 열기와 빛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의 정신은 최후를 향해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어졌던 걸까.
젊은 학도병들의 수기 «듣거라 해신의 목소리를»을 다시 펼쳤다.
나는 살아가리라 걸어가리라
다다르게 될 숲 그림자가 점점 분명해져
내 눈과 마음에 비친다 그것은 ‘죽음’인 듯하다
그러나 그 숲 그림자는 밝고 고요하며
또한 건강한 것이어야만 한다
(마쓰모토 미쓰노리, 조치대학교 독문학, 오키나와에서 전사 25세)
나는 항상 빛을 찾는다.
너도 항상 밝음을 찾기를 바란다.
(미야자키 다쓰오, 도쿄대학교 인류학, 마닐라에서 병사 26세)
나는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살고 싶다. 내 운명의 역경이 크면 클수록 삶에 대한 내 집착도 커진다.
(세키구치 기요시, 도쿄미술학교 미술학, 미야코에서 병사 26세)
눈물이 많은 어머니라 걱정이지만 부디 울지 말아 주세요. 저는 웃으며 죽겠습니다. “남이 웃으면 나도 웃는다”라고 아버지께서 자주 말씀하셨지요. 제가 웃을 테니 어머니도 웃어 주세요.
(오쓰카 아키오, 주오대 전문부(법경상학), 가데나 앞바다에서 특공으로 전사 23세)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살고 싶다”라고 쓴 세키구치는 미술학도였다. 우에다의 무겐칸無言館[12]에는 전몰 미술학도들의 그림과 팔레트 등의 유품이 남겨져 있다. 그림에 곁들여진 사연에서는, 출정 당일 아침까지 캔버스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그림을 그리던 학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술이든 문학이든 학문의 길을 걷던 중에 징집된 이들의 번민은 유난히 컸다. ‘성스러운 전쟁’이라 칭송되는, 강요받은 전쟁을 지극히 냉랭한 눈으로 바라본 이도 있다.
적대하는 민족들은 각각이 멸망에 이르도록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두렵도다, 한심하도다, 인간이여, 원숭이의 친족이여.
(하세가와 신, 메이지가쿠인 고등부,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사 23세)
하세가와 신은 나와 연이 있는 아사마 온천에 주둔했던 부요 부대武揚隊의 특공병이기도 했다. 물론 특공병 가운데는 순수히 ‘가미카제’로서 의식과 자부심을 가지고 죽어 간 이도 많다. 본심이 어땠는지는 차치하고 적어도 남아 있는 글들 속에서는 그러한 용맹을 드러낸 것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하세가와의 차가운 야유는 유독 두드러진다. 하세가와는 목적대로 오키나와에서 군함에 돌진할 수 없었다. 요나구니 인근 해역에서 격추되었기 때문이다. 특공에 성공한 자들은 사후 화려하게 보도되고 ‘2계급 특진’이라는 명예를 얻어 전후에도 지란 특공 평화 회관知覧特攻平和会館[13]에 이름이 남은 반면, 실패한 이들은 거의 묵살당해 잊혔다. 그리고 하세가와가 일갈했던 ‘한심한 인간’은 2026년에도 그 천박함을 날마다 갱신하고 있다.
혜성이 떨어뜨리고 간 것, 얼음과 먼지로 이루어진 궤도의 띠에 지구가 들어갈 때, 그것은 유성우가 된다. 혜성은 유성의 어머니인 셈이다.
오래전 고등학교 시절, 지구 과학 수업 시간에 그 사실을 알고 가슴이 떨렸다. 그 감동은 <그렇지 않니, 혜성>이라는 곡의 탄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8월 9일 기사라즈에서 출격한 제7미타테대 제2차 유성대(유성 6기) 12명과 햐쿠리하라에서 출격한 제4미타테대(혜성 7기) 13명이 긴카산섬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날, 6기의 유성과 7기의 혜성은 함께 도호쿠 바다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나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forgotten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잊고, 또한 잊혀진다
그러나 울림은 언제까지고 남는다
그 소리를 들으려 하는 사람이 있는 한
[1]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에 따른 인명 피해를 기리는 날이다. 이날 일본인 민간인 외에 조선인 강제 징용자 등도 포함해 약 7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 천황을 수호하는 방패를 뜻하는 ‘미타테’御楯로 명명된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3] 1945년 8월 15일 정오 뉴스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에 의한 무조건 항복 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이를 ‘옥음玉音 방송’이라고 부른다.
[4] 지은이는 2010년대부터 꾸준히 오키나와 나키진에서 소규모 공연을 열고 있다.
[5] 류큐 왕국 시대부터 전승되는 오키나와의 성역으로서 흔히 신이 강림하는 표식 역할을 하는 석비가 중심에 놓인다.
[6] 소설가(1964년생). 2012년 발표한 «도쿄 프리즌»은 2차 대전 전후 처리를 둘러싼 현대 일본인들의 무의식을 파헤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얻었다.
[7] 소설가 이시무레 미치코(1927~2018)가 미나마타병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고 취재해 1969년 발표한 기록 소설로서 공해 고발 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다.
[8] 뮤지션(1989년생). 밴드 GEZAN의 멤버.
[9] 못키리야는 가나자와에 위치한 작은 카페로서 공연도 종종 개최한다.
[10] 뮤지션(1971년생). 밴드 Sunny Day Service의 멤버.
[11] 뮤지션(1965년생). 밴드 clammbon의 멤버.
[12] 2차 대전기 전몰 미술학도 위령을 목적으로 1997년 개관한 사설 미술관으로서 나가노현 우에다에 위치하고 있다.
[13] 가고시마 지란에 위치한 박물관. 지란은 2차 대전기에 일본 육군 특공 기지가 설치되어 있던 지역이다. 회관에는 특공병들의 기록, 유품 등이 전시 및 보관되어 있다.
테라오 사호寺尾紗穂
음악가. 문필가. 1981년 11월 7일 도쿄 출생. 대학 시절 결성한 밴드 Thousands Birdies’ Legs에서 보컬, 작사 및 작곡을 맡았고 피아노 연주를 겸한 노래(히키가타리)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4월, 피아노 연주로 완성한 메이저 데뷔 앨범 <온미>御身, onmi가 화제를 모았고 사카모토 류이치와 오누키 다에코 등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후로도 활발한 창작으로 솔로 정규 앨범이 10집에 이른다. 사카구치 교헤이 밴드 및 아다치 레이사부로, 이가 와타루와 결성한 3인조 밴드 ‘후유니와카레테’冬にわかれて, Fuyu Ni Wakarete로도 활동 중이다. 2021년 음악 레이블 ‘코호로기샤’こほろぎ舎를 설립했다. 2009년부터 빅이슈 서포트 라이브인 ‘린린 페스티벌’을 주최하고 있다. 오바야시 노부히코 감독의 영화 <전학생: 안녕, 당신>(2007), 안도 모모코 감독의 영화 <0.5밀리>(2014) 등 다수의 영화 주제가를 맡았고, 그 외 광고 음악도 여럿 제작했다. 저서로는 «평전 가와시마 요시코»(2008), «사랑하고, 나날들»(2014), «핵발전소 노동자»(2015), «남양과 나»(2015), «그 시절의 팔라우를 찾아서: 일본 통치하의 남양을 살아간 사람들»(2017), «혜성의 고독»(2018), «천사 일기»(2021), «일본인이 이민자였던 시절»(2023), «전전 음악 탐방»(2025) 등이 있으며 다수의 공저서, 편저서가 있다. 현재도 신문, 잡지, 웹 등에서 다수의 연재를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