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를 가속하라

≪자본주의 리얼리즘≫ 2판 2쇄를 찍은 기념으로 마크 피셔의 글 한 편을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을 기반으로 한 예술 비평 저널인 ≪파스≫Parse(https://parsejournal.com/) 5호(2017년 봄)에 실린 <관리를 가속하라>Accelerate Management라는 글입니다. 번역 및 게재를 허락해 준 ≪파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가속주의accelerationism는 좌우 정치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느슨한 사고 운동이고, 여러 전선에서 논쟁과 비판을 초래했습니다. 기계적인 으스스함 때문인지 때로는 곡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요. 이 글에서 피셔는 가속주의의 세 물결을 구분하고 최근 흐름인 좌파 가속주의 입장 편에 섭니다.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서르닉, 그리고 이들이 쓴 <#가속하라: 가속주의 정치 선언>으로 대변되는 좌파 가속주의는 좌파 내부에 널리 퍼진 이른바 ‘통속 정치’folk politics 경향에 반대하는 움직임입니다. 통속 정치가 과거(이전 단계의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 이전)나 바깥이라는 상상된 영토로 회귀하려 한다면, 좌파 가속주의는 새로운 것과 미래에 여전히 판돈을 거는 기획입니다. 이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것들에서 물러나는 대신 수중에 쥐고 이용할 것.

이 글에서 피셔는 좌파 가속주의 입장을 관리(혹은 경영)라는 쟁점과 연결합니다. 관리 문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식별한 새로운 관료주의(그리고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정신 건강) 문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큰 국가를 몰아내면서 관료주의도 쫓아냈다고 자랑스레 외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보여 주기식의 불필요한 관료주의 업무”가 노동 그 자체보다 중요시되며 우리를 질식시킬 지경인 현실을요. 그렇다면 이처럼 관료주의를 증식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관리 자체에 반대해야 할까요? 이에 피셔는 질문을 뒤집어 “너무 많은 관리가 아니라 너무 적은 관리가 동시대 자본주의의 문제”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좌파 가속주의 입장을 채택해 ‘다른 관리’를 상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노동을 부과하는―저 자신의 노동 중독을 본보기로 이용해―관리자 대신 우리를 과도 노동에서 보호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미세 요구들로 우리를 질식시키는 관리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이해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피셔의 정치적 입장이 늘 한결같은 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그도 반의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고 정치 자체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그의 정치 관련 블로그 게시물을 모은 ≪k-펑크≫ 3권이 출간되면 전반적인 변화 과정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2009년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면 “지속적인 사회 변형에 꼭 필요한 (잠재적이고 실제적인) 하부 구조들을 중심에 두는 정치”를 명시적으로 지향하게 되고 이는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이와 관련해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9장과 말미에 실린 조디 딘과의 대담,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에 실린 <터미네이터 대 아바타>, 피셔와 동료 제러미 길버트가 나눈 대담,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집필한 팸플릿인 ≪현대성 되찾기≫ 등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 썼을 것이라 추정되는 <관리를 가속하라>에서도 그는 이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관리와 가속주의라는 쟁점을 검토하며 그는 우리가 지향할 바는 신자유주의가 내걸었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정확히 타격하는 것이라고, 자본주의의 산물들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좌파가 그 주역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간명하고 짜릿하며 도발적인 산문으로요. 최종적이지도 완벽하지도 않겠지만, 또 논쟁과 비판의 여지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입장일 겁니다.

원문 링크: https://parsejournal.com/article/accelerate-management/

관리를 가속하라

가연성 희망

오랫동안 준비한 번역문 하나를 올립니다. 2019년 문화 비평가 토드 B. 그루얼이 «k-펑크» 엮은이 대런 앰브로즈와 «k-펑크» <서문>을 쓴 사이먼 레이놀즈를 각각 인터뷰한 <가연성 희망>이라는 글이에요. 번역 및 게재를 허락해 준 온라인 잡지 «팝매터즈»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원문 링크: https://www.popmatters.com/mark-fisher-simon-reynolds-darren-ambrose

앰브로즈와 레이놀즈는 «k-펑크»의 <엮은이 서문>과 <서문>으로 마크 피셔에 대한 자신들의 기억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인터뷰는 그 글들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라 할 수 있어요. «k-펑크»를 작업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자료라 독자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서문>들보다 조금 더 비공식적인 이 인터뷰는 마크 피셔가 어떤 개성을 보유한 비평가였고 그의 사고가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잘 드러내 줍니다. 특히 사이먼 레이놀즈는 피셔뿐 아니라 여러 사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도 해요.

이 인터뷰를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k-펑크»를 읽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이 인터뷰(그리고 블로그에 올린 다른 여러 글)를 동행인 삼아 2024년에도 «k-펑크»와 최근 2판이 출간된 «자본주의 리얼리즘» 많이들 읽고 얘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가연성 희망

«자본주의 리얼리즘» 2판

2018년에 번역되어 한국 독자들에게 마크 피셔라는 비평가를 각인한 «자본주의 리얼리즘» 2판이 출간되었다. 2022년 영국에서 발표된 원서 2판에는 마크 피셔의 부인인 조이 피셔의 <서문>, 동료이자 비평가인 알렉스 니븐의 <서론>, 소설가로 피셔와 함께 제로 북스와 리피터 북스를 설립한 타리크 고더드의 <후기>가 수록되었다. 이번 한국어 2판에서도 이 글들을 번역해 실었고, 그 외에 본문 번역과 디자인을 소폭 손질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사회적 상상력을 거의 완전히 잠식했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쉬울 정도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뿐 아니라 생각의 지평까지 장악한 이런 상황을 이 책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스스로를 유일하게 유지 가능한 체계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모순과 비일관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지배에 균열을 낼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달리 말해 자본주의가 자신이 약속하는 바를 결코 지킬 수 없는 실패한 체계임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기존의 이론적 개념들을 이용해 각종 문화 현상을 명민하게 분석하는 이 책으로 마크 피셔는 동시대 영국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대열에 속하게 되었고, 당시 새롭게 등장한 정치 운동과 호흡을 같이하며 젊은 세대 공중의 지지를 얻었다. 나아가 ‘개인화된 정신 건강’, ‘새로운 관료주의’, ‘참신함을 만들어 낼 수 없는 문화적 무능’ 등의 쟁점은 우리 사회로 가져와 다시 읽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2판

«k-펑크» 1 디자인 후기

처음엔 «k-펑크» 표지를 디자인하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이 800쪽이지 원서가 너무 빽빽해서 이걸 한국어판으로 만들면 1,500쪽은 너끈히 나올 텐데, 이번 생엔 못 내지 않을까? ㅎㅎ 게다가 피셔의 압축적인 논리와 현란한 문체에 옮긴이 선생님들과 편집자 모두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ㅎㅎㅎㅎ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그사이 우리는 이 책을 네 권으로 분권해 하나씩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첫 권 번역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부턴 «k-펑크» 표지를 디자인하는 날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전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보다 멋진 표지를 만들기가 불가능해 보였고, 우리보다 먼저 번역본을 낸 스페인어판과 이탈리아어판이 내 기를 죽이며 엄청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기에… 거기다 분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한 번에 네 권을 디자인해야 했다. 각각이 독립적으로 시선을 붙들면서도 일관성을 담아낼 수 있도록. 무엇보다 나는 피셔가 이 책에서 논의한 책과 영화 중 본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갓반인이라고!

«k-펑크» 1 디자인 후기

«k-펑크» 1권에서 분석되는 작품들

마크 피셔가 «k-펑크» 1권에서 분석하는 책,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한자리에 모아 보았습니다.

차례만으로는 피셔가 어떤 작품들을 다루었는지 알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그의 논의 대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정리하고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한 목록이 «k-펑크» 1권이 아직 수중에 없는 독자뿐 아니라 이미 읽은 독자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목록은 피셔가 얼마간 비중 있게 논한 작품만 추린 거예요. 슬쩍 언급하고 지나가는 작품들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한마디가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는 것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언급들까지 궁금하다면 얼른 «k-펑크» 1권을 펼칠 시간이에요.

«k-펑크» 1권에서 분석되는 작품들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k-펑크» 1권을 내면서 오랜만에 국내 필자의 서평을 받았습니다. 대중 음악 비평가이자 블로거로 맹활약 중인 나원영 선생님께 서평을 부탁드렸고,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이라는 아름다운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마크 피셔는 오랫동안 ‘제집 같지 않음’unheimlich이라는 기분에 골몰했어요. 이 기분은 자신이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초래하지만, 거꾸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 나원영 선생님은 채 완공되지 못한 k-펑크라는 집을 둘러보면서 제집 같지 않음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냅니다. 나아가 피셔와 마찬가지로 제집이 없는 듯이 느껴졌던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고,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자신만의 집을 지으려는 시도를 긍정합니다.

서평은 “혼자서는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요”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말은 «k-펑크»를 지침서 중 하나로 추가하라는 권유인 동시에 함께 각자의 공간을 지어 나가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불안정하고 불균등할지언정 그렇게 개개의 집이 모여야만 공동체도 꿈꿀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유령론이란 무엇인가

사이먼 해먼드의 <k-펑크 전반>에 이어 이번에는 «k-펑크»에 수록되지 않은 피셔 자신의 글 한 편을 번역해 올립니다. «필름 쿼털리» 66권 1호(2012년 가을)에 발표한 <유령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에요. «필름 쿼털리»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Copyright © 2012 by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원문 링크: https://online.ucpress.edu/fq/article-abstract/66/1/16/29155/What-Is-Hauntology?redirectedFrom=fulltext

2000년대 중반부터 피셔는 정치와 문화 영역에서 점점 더 미래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20세기가 불러일으켰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잦아들고 그 자리를 향수가 점유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그는 자크 데리다에게서 유령론이라는 개념을 빌려 옵니다.

피셔에게 유령론이란 구체적으로 사회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자 한 ‘대중 모더니즘’의 약속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흔적을 표면화해 리얼리티를 교란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애초에 유령론 논의를 개시한 분야가 대중 음악(특히 전자 음악)이었다면, 여기서 피셔는 문학을 경유해 영화와 텔레비전 영역으로 범위를 확장합니다. 그런 다음 후반부에서는 60~70년대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유령론적 형식을 갖춘 동시대의 작업들도 일별하고 있어요.

«k-펑크»에는 피셔의 블로그 게시물과 각종 매체 기고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글을 싣고 있지는 않아요. 안타깝게도 «필름 쿼털리»에 기고한 글들은 «k-펑크»에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라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 글을 번역하기로 한 첫째 계기입니다.

피셔는 유령론 개념이 “제2의 (비)생명”을 얻었다고 평가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데는 피셔의 공이 상당히 크지 않을까 싶어요. 이 글은 그런 피셔의 유령론 이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고 있고,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을 소개하고자 한 둘째 계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셔는 무엇이 현실로 간주되느냐 자체가 첨예한 정치적인 문제라 생각했고, 현실 감각을 뒤흔드는 작품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구상 한편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반대편에는 대중 모더니즘과 유령론이 자리해 있었어요.

«k-펑크» 1권과 이 글은 피셔가 유령론적 작품들을 (재)발굴하고 개념들을 정교화한 과정을 기록합니다.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다루고 있는 이 글은 «k-펑크» 1권에 실린 몇몇 글의 후속작처럼 읽히기도 해요. 또 유령론 개념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라는 말년의 기획으로 이어지고요.

그의 첫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마지막 책인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만 소개된 한국에서는 그간 두 책이 이질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피셔의 일관된 관심이 두 권 모두에 담겨 있기도 해요. «k-펑크» 1권과 <유령론이란 무엇인가>가 둘을 잇는 가교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유령론이란 무엇인가

k-펑크 전반

오늘은 마크 피셔의 생애과 생각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사이먼 해먼드(Simon Hammond)의 <k-펑크 전반>(k-punk At Large)이라는 글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뉴 레프트 리뷰» 118호(2019년 7/8월)에 게재된 글로, 지은이와 «뉴 레프트 리뷰»는 무료로 번역을 허락해 주었어요. 이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Copyright © 2019 New Left Review, Simon Hammond)
원문 링크: https://newleftreview.org/issues/ii118/articles/k-punk-at-large

피셔가 사망한 후 그를 기리는 글이 여러 편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밟아 온 지적, 개인적 궤적을 사회문화적 변동과 연결한 작업은 아직 드문 편인데요. 해먼드의 이 글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해먼드는 한 편의 글이라는 한계 안에서 피셔의 삶과 작업을 돌아봅니다. 특히 앞선 세대의 주요 문화 이론가였던 스튜어트 홀과 피셔를 비교하면서 대처리즘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신노동당 집권기에 지적 경력을 시작한 피셔가 이전 세대와 얼마나 상이한 조건에서 활동했는지 드러냅니다.

피셔는 사적인 경험과 기억을 역사적 이행과 연결하는 감각이 비상한 비평가였습니다. 또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및 문화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때로는 뚜렷이 낙관적이고 또 때로는 비애감이 두드러집니다), 역으로 그의 글 상당수는 사회 변화나 사건에 개입하려는 시도였어요.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의 맥락을 밝혀 주는 문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 글이 마크 피셔의 사고가 어떻게 빚어지고 변화해 왔는지 궁금했던 분들에게 유용한 동행이 되지 않을까 해요. 열심히 작업했고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k-펑크»와 함께 즐겁게 읽어 주세요!

k-펑크 전반

«k-펑크» 1: 책, 영화, 텔레비전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유령론, 대중 모더니즘 같은 개념으로 새로움의 충격을 상실한 우리 문화를 독창적으로 진단하고, 과거와 현재의 문화 생산물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잃어버린 미래의 흔적들을 면밀한 주의력으로 찾아냈다. 그는 컬트 인사가 되었고, 그런 뒤에는 21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영국 비평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k-펑크라는 블로그에서 시작되었다.

2017년 피셔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후 그가 공동 설립한 리피터 북스에서는 2018년 블로그 게시물, 여러 잡지와 저널에 기고한 평론, 각종 매체와의 대담, 미발표/미완성 글 다수를 묶어 800여 쪽에 달하는 «k-펑크»를 펴냈다. 리시올 출판사에서는 10여 년의 시간과 방대한 영역을 아우른 «k-펑크»를 완역할 계획이며, 첫걸음으로 책, 영화, 텔레비전을 다루는 1~2부를 1권으로 선보인다.

«k-펑크» 1권은 밸러드, 버로스, 크로넨버그, 70~80년대 모더니즘 방송 체제, «샤이닝»과 «배트맨»과 «헝거 게임» 등 책과 영화, 텔레비전에서 피셔가 채굴한 가능성의 조각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읽으며 우리는 불안과 권태가 공존하는 현실에 구멍을 내고자 한 어느 명민한 정신이 사고의 건축물을 쌓아 올린 과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날카로우면서도 정서적이고, 도발적이면서도 관대한 피셔의 비평은 읽기의 기쁨을 선사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현실을 진단하고 현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다른 미래를 꿈꾸라고 부추긴다.

«k-펑크» 1: 책, 영화, 텔레비전

반-치료

오늘은 마크 피셔의 글 <반-치료>를 공유합니다. 제니퍼 M. 실바의 «커밍 업 쇼트»에 대한 일종의 서평이자 조금 더 확장된 논의를 펼치는 글이기도 해요. 번역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옮김 박진철 선생님이 맡아 주셨습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마크 피셔는 현실의 기저에 있는 ‘실재’들을 환기하는 것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대항하는 전략일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정신 건강’이라는 쟁점을 그런 전략적 요충지 중 하나로 설정했습니다. 이런 그에게 무드 경제와 치료 담론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커밍 업 쇼트»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커밍 업 쇼트»가 출간된 후 이 책을 소재로 몇 편의 글을 쓰거나 대담을 나누었으니까요. 오늘 번역해 블로그에 올리는 이 글도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반-치료>는 2015년에 진행한 한 대담을 전사한 것으로, 생전에는 출간된 적 없고 피셔의 유고집인 «K-Punk»에 수록되어 (영어로) 처음 공개된 글입니다. 여러 책에 대한 논평 형식을 취하는 이 글에서 피셔는 영국과 미국에서 감정 정치가 부상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 이 현상이 초래한 두 가지 문화적 곤란을 ‘치료적 상상계의 이율 배반’으로 진단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감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이 이율 배반을 넘어 대항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합니다.

미국과 영국에 만연한 (하지만 한국도 예외가 아닌) 치료 문화에 대한 «커밍 업 쇼트»의 분석을 조금 더 폭넓은 문화 정치/이론 맥락에 두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피셔의 «K-Punk»를 박진철 선생님의 번역으로 2021년 하반기에는 출간하고자 준비 중이에요. 그의 더 많은 글을 기다리는 독자들께 이 글이 갈증을 조금 해소시켜 주는 기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반-치료

«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 디자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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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커버)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영국의 문화 비평가 마크 피셔의 첫 책으로 자본주의의 실패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읽기 전엔 자본주의나 대안 어쩌구 하는 딱딱한 표현들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뛰어난 문화 비평가로 소문난 지은이의 글답게 논의를 영화나 음악 등 대중적인 소재들과 잘 엮어놓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른 학술서들에 비해 내용이 어렵지 않고 또 문장력도 더없이 훌륭하게 느껴졌는데, 지은이가 분명 마음 따뜻한 사람일 거라 확신하게 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고 곳곳에서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표현을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나는 이 책을 아주 감정적으로 읽고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피셔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재작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 디자인 후기

마크 피셔의 K-punk 블로그는 한 세대 동안 읽혀야 한다

마크 피셔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관한 마지막 블로그 글을 올립니다. 피셔가 사망한 후 음악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가디언»에 기고한 추도문입니다(https://goo.gl/4QXjZ5). 이 글에서 레이놀즈는 피셔의 블로그 K-punk가 2000년대에 영국 비평계에서 차지했던 위상과 역할, 피셔가 매혹되었던 문화적 대상들, 지칠 줄 몰랐던 열정을 동료이자 독자의 입장에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피셔를 잃은 슬픔과 더불어 그의 작업을 이어받은 정신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마크 피셔의 K-punk 블로그는 한 세대 동안 읽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