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리얼리즘≫ 2판 2쇄를 찍은 기념으로 마크 피셔의 글 한 편을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을 기반으로 한 예술 비평 저널인 ≪파스≫Parse(https://parsejournal.com/) 5호(2017년 봄)에 실린 <관리를 가속하라>Accelerate Management라는 글입니다. 번역 및 게재를 허락해 준 ≪파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가속주의accelerationism는 좌우 정치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느슨한 사고 운동이고, 여러 전선에서 논쟁과 비판을 초래했습니다. 기계적인 으스스함 때문인지 때로는 곡해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요. 이 글에서 피셔는 가속주의의 세 물결을 구분하고 최근 흐름인 좌파 가속주의 입장 편에 섭니다. 알렉스 윌리엄스와 닉 서르닉, 그리고 이들이 쓴 <#가속하라: 가속주의 정치 선언>으로 대변되는 좌파 가속주의는 좌파 내부에 널리 퍼진 이른바 ‘통속 정치’folk politics 경향에 반대하는 움직임입니다. 통속 정치가 과거(이전 단계의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 이전)나 바깥이라는 상상된 영토로 회귀하려 한다면, 좌파 가속주의는 새로운 것과 미래에 여전히 판돈을 거는 기획입니다. 이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자본주의가 생산한 것들에서 물러나는 대신 수중에 쥐고 이용할 것.
이 글에서 피셔는 좌파 가속주의 입장을 관리(혹은 경영)라는 쟁점과 연결합니다. 관리 문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식별한 새로운 관료주의(그리고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정신 건강) 문제의 다른 이름입니다. 신자유주의는 큰 국가를 몰아내면서 관료주의도 쫓아냈다고 자랑스레 외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정반대를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보여 주기식의 불필요한 관료주의 업무”가 노동 그 자체보다 중요시되며 우리를 질식시킬 지경인 현실을요. 그렇다면 이처럼 관료주의를 증식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관리 자체에 반대해야 할까요? 이에 피셔는 질문을 뒤집어 “너무 많은 관리가 아니라 너무 적은 관리가 동시대 자본주의의 문제”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좌파 가속주의 입장을 채택해 ‘다른 관리’를 상상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노동을 부과하는―저 자신의 노동 중독을 본보기로 이용해―관리자 대신 우리를 과도 노동에서 보호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미세 요구들로 우리를 질식시키는 관리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생각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이해하는 관리자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피셔의 정치적 입장이 늘 한결같은 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론 그도 반의회주의적인 태도를 취했고 정치 자체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습니다(그의 정치 관련 블로그 게시물을 모은 ≪k-펑크≫ 3권이 출간되면 전반적인 변화 과정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2009년의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이르면 “지속적인 사회 변형에 꼭 필요한 (잠재적이고 실제적인) 하부 구조들을 중심에 두는 정치”를 명시적으로 지향하게 되고 이는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았습니다(이와 관련해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9장과 말미에 실린 조디 딘과의 대담, ≪#가속하라: 가속주의자 독본≫에 실린 <터미네이터 대 아바타>, 피셔와 동료 제러미 길버트가 나눈 대담,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집필한 팸플릿인 ≪현대성 되찾기≫ 등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사망하기 얼마 전에 썼을 것이라 추정되는 <관리를 가속하라>에서도 그는 이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관리와 가속주의라는 쟁점을 검토하며 그는 우리가 지향할 바는 신자유주의가 내걸었지만 지키지 못한 약속들을 정확히 타격하는 것이라고, 자본주의의 산물들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좌파가 그 주역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간명하고 짜릿하며 도발적인 산문으로요. 최종적이지도 완벽하지도 않겠지만, 또 논쟁과 비판의 여지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입장일 겁니다.
원문 링크: https://parsejournal.com/article/accelerate-management/
… 관리를 가속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