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펑크» 1 디자인 후기

처음엔 «k-펑크» 표지를 디자인하는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이 800쪽이지 원서가 너무 빽빽해서 이걸 한국어판으로 만들면 1,500쪽은 너끈히 나올 텐데, 이번 생엔 못 내지 않을까? ㅎㅎ 게다가 피셔의 압축적인 논리와 현란한 문체에 옮긴이 선생님들과 편집자 모두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ㅎㅎㅎㅎ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그사이 우리는 이 책을 네 권으로 분권해 하나씩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악전고투 끝에 첫 권 번역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부턴 «k-펑크» 표지를 디자인하는 날이 영영 오지 않기를 바랐다. 전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보다 멋진 표지를 만들기가 불가능해 보였고, 우리보다 먼저 번역본을 낸 스페인어판과 이탈리아어판이 내 기를 죽이며 엄청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기에… 거기다 분권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한 번에 네 권을 디자인해야 했다. 각각이 독립적으로 시선을 붙들면서도 일관성을 담아낼 수 있도록. 무엇보다 나는 피셔가 이 책에서 논의한 책과 영화 중 본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갓반인이라고!

«k-펑크» 1 디자인 후기

«k-펑크» 1권에서 분석되는 작품들

마크 피셔가 «k-펑크» 1권에서 분석하는 책,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한자리에 모아 보았습니다.

차례만으로는 피셔가 어떤 작품들을 다루었는지 알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그의 논의 대상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정리하고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한 목록이 «k-펑크» 1권이 아직 수중에 없는 독자뿐 아니라 이미 읽은 독자께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목록은 피셔가 얼마간 비중 있게 논한 작품만 추린 거예요. 슬쩍 언급하고 지나가는 작품들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한마디가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한다는 것 다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언급들까지 궁금하다면 얼른 «k-펑크» 1권을 펼칠 시간이에요.

«k-펑크» 1권에서 분석되는 작품들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k-펑크» 1권을 내면서 오랜만에 국내 필자의 서평을 받았습니다. 대중 음악 비평가이자 블로거로 맹활약 중인 나원영 선생님께 서평을 부탁드렸고,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이라는 아름다운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마크 피셔는 오랫동안 ‘제집 같지 않음’unheimlich이라는 기분에 골몰했어요. 이 기분은 자신이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초래하지만, 거꾸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 나원영 선생님은 채 완공되지 못한 k-펑크라는 집을 둘러보면서 제집 같지 않음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냅니다. 나아가 피셔와 마찬가지로 제집이 없는 듯이 느껴졌던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고,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자신만의 집을 지으려는 시도를 긍정합니다.

서평은 “혼자서는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요”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말은 «k-펑크»를 지침서 중 하나로 추가하라는 권유인 동시에 함께 각자의 공간을 지어 나가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불안정하고 불균등할지언정 그렇게 개개의 집이 모여야만 공동체도 꿈꿀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유령론이란 무엇인가

사이먼 해먼드의 <k-펑크 전반>에 이어 이번에는 «k-펑크»에 수록되지 않은 피셔 자신의 글 한 편을 번역해 올립니다. «필름 쿼털리» 66권 1호(2012년 가을)에 발표한 <유령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에요. «필름 쿼털리»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Copyright © 2012 by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원문 링크: https://online.ucpress.edu/fq/article-abstract/66/1/16/29155/What-Is-Hauntology?redirectedFrom=fulltext

2000년대 중반부터 피셔는 정치와 문화 영역에서 점점 더 미래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20세기가 불러일으켰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잦아들고 그 자리를 향수가 점유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그는 자크 데리다에게서 유령론이라는 개념을 빌려 옵니다.

피셔에게 유령론이란 구체적으로 사회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자 한 ‘대중 모더니즘’의 약속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흔적을 표면화해 리얼리티를 교란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애초에 유령론 논의를 개시한 분야가 대중 음악(특히 전자 음악)이었다면, 여기서 피셔는 문학을 경유해 영화와 텔레비전 영역으로 범위를 확장합니다. 그런 다음 후반부에서는 60~70년대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유령론적 형식을 갖춘 동시대의 작업들도 일별하고 있어요.

«k-펑크»에는 피셔의 블로그 게시물과 각종 매체 기고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글을 싣고 있지는 않아요. 안타깝게도 «필름 쿼털리»에 기고한 글들은 «k-펑크»에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라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 글을 번역하기로 한 첫째 계기입니다.

피셔는 유령론 개념이 “제2의 (비)생명”을 얻었다고 평가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데는 피셔의 공이 상당히 크지 않을까 싶어요. 이 글은 그런 피셔의 유령론 이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고 있고,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을 소개하고자 한 둘째 계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셔는 무엇이 현실로 간주되느냐 자체가 첨예한 정치적인 문제라 생각했고, 현실 감각을 뒤흔드는 작품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구상 한편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반대편에는 대중 모더니즘과 유령론이 자리해 있었어요.

«k-펑크» 1권과 이 글은 피셔가 유령론적 작품들을 (재)발굴하고 개념들을 정교화한 과정을 기록합니다.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다루고 있는 이 글은 «k-펑크» 1권에 실린 몇몇 글의 후속작처럼 읽히기도 해요. 또 유령론 개념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라는 말년의 기획으로 이어지고요.

그의 첫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마지막 책인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만 소개된 한국에서는 그간 두 책이 이질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피셔의 일관된 관심이 두 권 모두에 담겨 있기도 해요. «k-펑크» 1권과 <유령론이란 무엇인가>가 둘을 잇는 가교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유령론이란 무엇인가

k-펑크 전반

오늘은 마크 피셔의 생애과 생각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사이먼 해먼드(Simon Hammond)의 <k-펑크 전반>(k-punk At Large)이라는 글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뉴 레프트 리뷰» 118호(2019년 7/8월)에 게재된 글로, 지은이와 «뉴 레프트 리뷰»는 무료로 번역을 허락해 주었어요. 이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Copyright © 2019 New Left Review, Simon Hammond)
원문 링크: https://newleftreview.org/issues/ii118/articles/k-punk-at-large

피셔가 사망한 후 그를 기리는 글이 여러 편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밟아 온 지적, 개인적 궤적을 사회문화적 변동과 연결한 작업은 아직 드문 편인데요. 해먼드의 이 글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해먼드는 한 편의 글이라는 한계 안에서 피셔의 삶과 작업을 돌아봅니다. 특히 앞선 세대의 주요 문화 이론가였던 스튜어트 홀과 피셔를 비교하면서 대처리즘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신노동당 집권기에 지적 경력을 시작한 피셔가 이전 세대와 얼마나 상이한 조건에서 활동했는지 드러냅니다.

피셔는 사적인 경험과 기억을 역사적 이행과 연결하는 감각이 비상한 비평가였습니다. 또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및 문화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때로는 뚜렷이 낙관적이고 또 때로는 비애감이 두드러집니다), 역으로 그의 글 상당수는 사회 변화나 사건에 개입하려는 시도였어요.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의 맥락을 밝혀 주는 문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 글이 마크 피셔의 사고가 어떻게 빚어지고 변화해 왔는지 궁금했던 분들에게 유용한 동행이 되지 않을까 해요. 열심히 작업했고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k-펑크»와 함께 즐겁게 읽어 주세요!

k-펑크 전반

«k-펑크» 1: 책, 영화, 텔레비전

영국 비평가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 유령론, 대중 모더니즘 같은 개념으로 새로움의 충격을 상실한 우리 문화를 독창적으로 진단하고, 과거와 현재의 문화 생산물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잃어버린 미래의 흔적들을 면밀한 주의력으로 찾아냈다. 그는 컬트 인사가 되었고, 그런 뒤에는 21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영국 비평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k-펑크라는 블로그에서 시작되었다.

2017년 피셔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후 그가 공동 설립한 리피터 북스에서는 2018년 블로그 게시물, 여러 잡지와 저널에 기고한 평론, 각종 매체와의 대담, 미발표/미완성 글 다수를 묶어 800여 쪽에 달하는 «k-펑크»를 펴냈다. 리시올 출판사에서는 10여 년의 시간과 방대한 영역을 아우른 «k-펑크»를 완역할 계획이며, 첫걸음으로 책, 영화, 텔레비전을 다루는 1~2부를 1권으로 선보인다.

«k-펑크» 1권은 밸러드, 버로스, 크로넨버그, 70~80년대 모더니즘 방송 체제, «샤이닝»과 «배트맨»과 «헝거 게임» 등 책과 영화, 텔레비전에서 피셔가 채굴한 가능성의 조각들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읽으며 우리는 불안과 권태가 공존하는 현실에 구멍을 내고자 한 어느 명민한 정신이 사고의 건축물을 쌓아 올린 과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날카로우면서도 정서적이고, 도발적이면서도 관대한 피셔의 비평은 읽기의 기쁨을 선사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현실을 진단하고 현재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다른 미래를 꿈꾸라고 부추긴다.

«k-펑크» 1: 책, 영화, 텔레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