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보기 챕터에 이어 «오늘 너무 슬픔» 옮긴이 후기를 공개합니다. 본인 또한 트위터 유저로서, 자신의 불안과 슬픔을 바라보며 말하고 쓰는 사람으로서, 위안을 주는 농담과 웃음의 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옮긴이 김지현 선생님이 전하는 이야기를 읽어 주세요.
“내가 솔직해질수록 더욱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고 지은이 멀리사 브로더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그렇게 타인에게 공감받을 수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로 내밀하고 사적인 자기 이야기로 파고들었을 때 역설적으로 찾아지는 공감과 연대의 끈을 밝혀 줍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말하면 정숙하지 못한 여자가 되고 마음 힘듦을 토로하면 사사로운 이야기를 멈추지 못하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는 현실 속 여성들을, ‘여성의 사적 경험이 곧 사회적인 것’이라는 선언에 기대어 연결시킵니다.
특히 옮긴이는 온라인의 ‘여성-정병러’들에게 “자신의 슬픔을 설명할 단어를 찾아 목소리를 내고 또” 내는 일이 우리 존엄을 위한 싸움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더 많은 «오늘 너무 슬픔»을 말해야 한다고 북돋웁니다. 이 메시지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독자에게 전해지길 바라며 이 글을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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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무 슬픔»에서 멀리사 브로더는 자신이 쓰는 이야기가 과연 읽을 가치가 있을지 자주 걱정한다. 이렇게까지 사적이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과연 누가 읽고 싶어 하겠느냐고. 세상에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많고—이를테면 전쟁, 기아, 자본주의, 지구온난화 등등—그에 비하면 자신의 욕망이나 고민 따위는 “배부른 속물”의 엄살에 불과한 것 같다고. 한 인터뷰에서는 이 책에서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밝힌 것이 부담된다며, 한 챕터를 통째로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저자로서 그런 걱정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오늘 너무 슬픔»의 에세이들은 정말로, 엄청나게 사적이다. 보통은 남에게 밝히지 않는 이야기들. 점잖은 대화 자리에서는 당연히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고, 막역한 친구끼리라도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늘 핵심에서 비껴 가게 되는 내밀하고 부끄러운 이야기들. 섹스하기 전에 똥을 눈 파트너 이야기, 토하는 걸 섹시하다고 느끼는 성적 판타지, 공황장애가 도질 때마다 빠지는 의문들, 성형 시술이나 왁싱을 받기까지 거친 망설임과 자괴감, 남몰래 오랜 세월 지속해 온 기벽들(코딱지 먹기에서부터 니코틴 껌 씹기까지), 술과 마약에 중독됐다가 끊기까지의 구질구질한 실패담, SNS에서 ‘좋아요’ 한 번에 천국에 간 기분이 드는 순간…….
나는 번역자이기 이전에 독자로서 솔직히 처음에는 호기심이 들었다. 타인에 대해 알 필요가 없는 것을 넘어서서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니, 약간의 관음증도 발동했던 것 같다. 남이 옷을 벗어 던지는 걸 멀찍이서 구경하는 입장이 된 것처럼. 하지만 책을 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입장에 처했음을 깨달았다. 알몸이 된 건 글쓴이뿐만이 아니라 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브로더의 위트 넘치는 고백들에 연신 웃으면서 책장을 넘기다 보니 점점 공감이 되었고,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 자신의 진실을, 애써 외면해 왔거나 또는 이해할 필요가 없거나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던 것들을 똑바로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의 성적 경험, 성적 판타지. 나의 다이어트, 섭식장애, 성형 시술. 나의 불안과 공포, 은밀한 기벽들, 중독과 페티시의 대상들. 그리고 그 모든 혼란스럽고 모호했던 것들이, 지극히 나만의 사적이고 내밀한, 설명 불가능한 영역에 있는 것이라 믿었던 경험들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책을 읽는 여자들은 모두 비슷한 공감대를 느낄 것이다. 유난히 아픈 나만의 ‘자유연애’라 믿었던 경험이 실은 다른 여자들도 같은 패턴으로 겪은 아픔이었다는 것. 혼자 화장실 칸 안에 틀어박혀 억지로 토하면서 몸무게가 1킬로그램만 더 줄어들기를 기도하는 동안, 똑같은 자세로 변기를 붙잡고 똑같은 기도를 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 내가 방 안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더 어려 보이는 화장법을 연구할 때 어떤 여자들은 성형외과 수술실에서 지방 주입을 하고 또 어떤 여자들은 피부과 관리실에서 얼굴 마사지를 받고 있다는 것.
여성의 사적인 경험은 곧 사회적인 것이다. 여자들은 모두 다르지만 한편으로는 모두 비슷한 곤경을 겪는다. 그들의 경험은 따로 떼어 놓고 보면 특수한 개인사로 인식되지만, 합쳐 놓고 보면 사회가 여성 일반에게 가하는 조직적인, 지속적인, 광범위한 압력과 착취를 증거한다. 2016년 트위터에서 벌어졌던 문화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그랬듯이, 그리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이 그렇듯이. 그러나 여자들의 경험은 아직 온전히 취합되지 못했고 증언은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여성의 사적인 경험 말하기는 여자들의 삶 그 자체만큼이나 억압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여자의 연애와 섹스 경험은 여성으로서의 가치를 떨어트리는, 그러므로 숨겨야만 하는 추문이었다. 여자의 내실과 화장실은 함부로 엿봐서도 내보여서도 안 되는 공간이었다. 배설이나 출산 등 생식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여자가 공공연히 입에 담기에는 남사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주제로 통했다. 여자들의 화장법은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드러내지 말아야 할 은밀한 비법이자 에티켓으로 전수되었다. 여자가 술・담배를 한다는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금기를 어기고 그렇게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감히 입 밖에 꺼낸 여자는 정숙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샀다. 그렇게 사사로운 이야기를 글로 쓴 여자들은 언제나 감상적이고 과격하고 어설픈 ‘문학 소녀’들로, 자기만의 작고 특수한 세계에 파묻혀 더 넓고 보편적인 인간사를 내다보지 못하는 ‘여류 작가’들로, 아니면 자기 파괴적인 고백을 늘어놓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그리고 멀리사 브로더는 이 모든 것을 다 한다. 그 모든 금기를 철저하게 어긴다. 세상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많으며 네 이야기는 책으로 낼 가치가 없다고 끊임없이 비난하는 ‘머릿속 위원회’의 목소리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그렇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의 사적인 경험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고, 우리 모두의 공통적 경험을 상기시킨다.
브로더는 자신을 늘 비난하는 ‘머릿속 위원회’가 타인들의 목소리, 사회의 목소리,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으리라고 추측한다. 나는 그 위원회가 모든 여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 다르지만 어느 정도는 비슷비슷한 질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네 슬픔은 말할 가치가 없어.” “징징거리지 마.” “네 고통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지금 아픈 건 네 잘못이야.”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넌 좆된 거야.”
누군가의 사적인 이야기는 나와 그 사람 간의 차이를 선명히 느끼게 해 준다. 그럼으로써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인과의 차이를 통해 비로소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멀리사 브로더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솔직히 이야기한다. 그는 구토 페티시가 있고, 풍만한 여자에게 성적으로 끌리고, 남자의 큰 성기를 갖고 싶어 하며, 자기보다 더 어린 남자들과 섹스하는 걸 좋아한다. 그는 자신의 취향이 어떤 결핍이나 욕구에서 기인하는지, 유년 시절의 어떤 사건과 연관되는지, 그로 인해 어떤 파트너들을 만나 어떤 사건을 겪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등을 이야기한다. 그 디테일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자연히 생각하게 되었다. ‘나도 이 사람과 비슷한 결핍이 있지만 이런 페티시는 없는데…… 대신 내겐 또 다른 판타지가 있지…… 생각해 보니 그 판타지 때문에 이러저러한 사람을 만났던 것 같네…… 나는 이러저러한 지점에서 특별히 쾌감을 느끼는 것 같고…….’ 그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나도 잘 몰랐던 내 고유한 성적 취향들을 재발견하는 과정이었다. 그것들은 흔히 말하는 전형적인 여성적 욕망들과는 많이 달랐다.
여자들은 저마다 독특한 욕망을 갖춘 개인들이다. 매력을 느끼는 인간 유형, 쾌락을 느끼는 패턴, 원하는 관계의 양상, 자기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 등이 다 다르다. 그러나 여성 개인들의 성적 욕망을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왔다. 여성의 욕망은 주로 남성에 의해 말해졌다. 여자는 이렇게 해 주는 걸 좋아한다더라는 풍문으로. 남자의 모습은 지워지고 여자의 흥분한 얼굴과 젖가슴만 클로즈업되는 포르노 화면으로. 여자에겐 지스팟이 있고, 여자가 노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예스이고, 여자는 남자들에게 보이기 위해 짧은 치마를 입고, 기타 등등……. 그렇게 여성의 성욕은 헤테로섹슈얼 연애관과 로맨스의 문법에 따라 직조된 스테레오타입의 형태로 주류 미디어나 문화적 관례를 통해 전해진다. 그리고 때로 여자들은 그 스테레오타입에 자신의 욕망을 이입한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고 추구하고 표현할 기회가 드물기에, 여자들은 흔히 그 스테레오타입이 자신의 것인 줄 착각하거나, 그 스테레오타입 밖에서 방황하곤 한다.
그런 상황에서 브로더의 거침없는 자기 고백들은 내게 무엇보다도 속 시원한 즐거움으로 다가왔고, 그다음으로는 계몽적인 영향력으로 다가왔다. 그의 에세이들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의 욕망을 더 명확히 알게 되고, 나만의 섹슈얼리티를 생각하고 이를 언어화하는 게 즐거워지고, 내 쾌락을 더 주체적으로 추구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성적인 차원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정신 질환의 측면에서도 그랬다. 브로더는 불안장애와 공황장애 환자로서 겪어 온 각종 증상과 감정, 그로써 생긴 인생의 질곡, 그에 대한 자신의 통찰과 대처법 등을 적는다. 또한 술과 약물과 담배 등에 중독되어 온 일대기를 밝히면서 그 중독물들이 자신에게 주었던 위안과 고통을 자세히 술회한다.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삶, 일상을 무너뜨리는 공포, 죽음이 아주 가까이에서 도사리고 있는 감각, 병과 중독 때문에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 극도의 외로움—그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브로더는 건조하고도 유머러스하게 써 내려 간다.
이런 이야기들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전문 상담사에게 털어놓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자신의 민감한 비밀들이 남에게 새어 나갈 염려가 없는 상담실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재단하지 않고 들어줄 것이라 믿을 수 있는 상담사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감 없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브로더가 말했듯이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고, “내 곤경을 통해 나 자신을 웃기고, 인터넷의 은총을 빌려 다른 사람들도 웃게 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브로더는 인터넷에서 트위터라는 SNS 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을 웃겨 왔고, 그러다가 에세이집을 써서 더 많은 독자들을 웃겼으며, 이제는 한국어판으로 한국 독자들도 웃기게 된 셈이다.
나 역시 트위터 유저인데, 한국 트위터 안에도 자신이 앓는 정신 질환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정신병자라는, 한국에서 욕설에 가깝게 쓰이는 단어를 희화화해서 스스로를 ‘정병러’라는 자조적 호칭으로 부른다. 호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들 정병러는 유머가 많다. 그들은 자살 충동, 각종 정신과 약물, 불안과 두려움과 환상, 자기혐오와 무력감과 절망 등을 거침없이 웃음의 소재로 삼는다. 사람이 너무 슬프면 어느 시점에는 한탄이나 분노도 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그러기에는 슬픔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다가는 익사할 것만 같기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슬픔으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두고 서서 농담하는 것밖에 남지 않는 때가 온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그 농담과 웃음의 힘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절망과 싸워 나간다.
트위터의 어떤 사람들은 ‘정병러’들의 자학적 유머가 우울을 전염시킬까 봐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받은 영향력은 그 반대였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우울에 파묻히기보다는 우울을 재발견했다. 그동안 외면하고 싶었던 내 슬픔의 정체를 점점 더 확실히 알아 가게 되었고, 그것과 더불어 잘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우리 안의 본원적인 슬픔은 없애 버릴 수 없다. 슬픔을 억누르거나 부정한다고 해서 삶이 더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잘 지내는 법을 익히면서부터야 우리는 비로소 진실한 자기 자신이 되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 ‘정병러’들은 그 방법을 함께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위급할 때, 자살의 위험에 가까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적절한 대응을 하고 구조의 손길을 뻗는 사람 역시 이들이다.
«오늘 너무 슬픔»에서도 나는 그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여성-정병러’만이 줄 수 있는 위안이 있었다. 슬퍼도 괜찮다는 것. 슬픔을 말해도 괜찮고, 슬픔을 글로 써도 괜찮다는 것. 세상은 슬픈 여자들에게 대체로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외로워도 슬퍼도 안 울고 참고 참으며 거울 속의 자신과 대화하는 캔디가 되는 선택지와 슬픔 속에서 목소리를 잃고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 인어 공주가 되는 선택지. 그 둘 중 하나로 떠밀리지 않기 위해, 우리 슬픈 여자들은 자신의 슬픔을 설명할 단어를 찾아 목소리를 내고 또 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슬플 뿐만 아니라 미친 여자들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럼으로써만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다면. 각기 무수히 다른 종류와 색채와 방향의 슬픔을 가진 개인들로서 자기만의 존엄한 싸움을 계속할 수 있다면.
이쯤에서 나는 멀리사 브로더의 의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너무 슬픔»이 가치가 있느냐고? 글쎄, 물론 브로더가 ‘오늘 너무 슬픔’이라는 트위터 계정을 만들고 쓰기 시작한 것은 트위터상의 여러 정병러가 그렇듯 그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트윗과 에세이를 쓰는 작업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병의 증상이자 대응 기제의 일환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지극히 사적인 감정의 배출구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세상에는 더 많은 «오늘 너무 슬픔»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