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추상: 현대 세계에 이론을 적용하기

오늘은 마크 피셔가 이론에 관해 쓴 짧은 글을 번역해 올립니다. 이 글은 영국의 예술 저널 «프리즈»Frieze 125호(2009년 9월)에 게재되었고, 피셔의 선집 «K-PUNK» 725~727쪽에 재수록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피셔는 자명한 것에서만 근거를 찾으려 하는 경험주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2009년 니콜라 부리요가 기획한 ‘얼터모던’ 전시를 둘러싼 논란 등에도 개입하고 있습니다. 자본은 현실을 추상적인 가치관계로 구조화합니다. 금융 위기의 결과는 고통스런 개인의 경험으로 나타나지만, 금융 위기 자체는 추상적인 관계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셔가 비판하는 경험주의자들은 눈에 드러나 있는 경험적 현실만을 강조하며 이론적 추상을 경시하곤 합니다. 피셔는 증거와 사실 등을 강조하는 이런 태도가 오히려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효과며, ‘현실 추상’을 드러내고 상대하려면 이론적 추상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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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추상: 현대 세계에 이론을 적용하기

2009년 9월 | 마크 피셔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옮김

최근 이스트 런던 대학에서 댄스 음악과 이론을 주제로 개최된 한 심포지엄에서 다수의 의견과는 거리를 둔 몇몇 저널리스트가 자신들은 이론에 잘 속는 얼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릿광대 경험주의자들”buffoon empiricists에 더 가깝다고 선언했다. 솔직하게 말하는 듯 보이는 자기 비하를 통해 이론을 멸시하는 이런 태도는 영국 문화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이론적 추상에 대한 멸시, 한때 경험주의─영어권 세계가 대부분 연관되어 있는─의 특징을 이루었던 멸시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하는 태도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조지 버클리나 데이비드 흄 같은 철학자의 경험주의는 이른바 실증할 수 없는 추상을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경험의 범주들을 승인하기보다는 오히려 침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령 잘 알려져 있듯이 버클리는 물질 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며, 흄은 자아의 존재를 논박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묘한 난해함과는 대조적으로 어릿광대 경험주의자들은 세계가 우리에게 직접 나타나는 방식을 옹호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들은 ‘증거’를 특권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는 실제로는 경험주의 철학자들이 부정하는 바로 그 범주들─즉 사람들과 (물리적) 사물들─의 자명함에 대한 호소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과 물리적 사물들만이 현실적이라면, 어릿광대 경험주의자들은 전 지구적 경제에 지금 막 벌어진 일에 대해 무엇을 사고할 수 있을까? 신용 경색과 불황을 이해하려면 추상이 현실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와 금융화를 가장 열렬히 받아들인 나라가 미국과 영국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릿광대 경험주의는 ‘대륙’의 이론적 전통에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그들이 보기에 대륙의 전통은 종종 앵글로색슨 특유의 유명론이 비난하던 저 복잡하고 모호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텍스트주의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예술계와 문화연구에 스며든 이론 유형─대중화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통속화된 들뢰즈주의, 나아가 이와 연관된 차이‧감각‧다수성 같은 모호한 반反개념들의 전시─은 어릿광대 경험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유의 반-총체적 사유가 어릿광대 경험주의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체계성에 대한 심원한 반감이다. 어떤 규정적인 주장을 내놓는 일은 무엇이 되었든 독단적이고 억압적이며 심지어는 전체주의적이라는 견해가 이제 널리 펴져 있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주장하듯이 이론적 명제들을 짜깁기하는 이런 접근 방식은 소비주의와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사실 제임슨의 유명한 주장을 따라 이것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확실한 점은 다양성과 관련된 모호한 수사들이 자본의 현실 추상real abstraction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냉철한 명료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는 1966년에 쓴 <크레모니니, 추상 화가>라는 에세이에서 ‘추상화’abstract painting와 ‘추상을 그리는 것’the painting of abstraction을 구별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화가 레오나르도 크레모니니는 자본의 추상들을 직접 묘사하는 것─이런 일은 불가능하다─이 아니라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규정적인 부재”를 보여 줌으로써 그 추상들을 드러낼 수 있었다. 벤저민 노이스는«부정의 존속»에서 알튀세르의 에세이를 논평하며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는 자본에 대한 어떤 이미지도 가지고 있지 않다. 자본 자체는 일종의 순수한 관계성이자 가치‧노동‧축적의 순수한 추상으로, 오직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이 추상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실 추상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더한 추상이 필요하다. [이론적] 추상은 직접적인 시야에서는 스스로를 감추는 이 순수한 관계성을 폭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현실 추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것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는 지난해에 은행들이 붕괴되었을 때도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은행에 대한 대규모 긴급 구제 조치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지속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은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라는 관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리얼리티[현실] 사이에 내재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일종의 반-신화적 신화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여러 사회의 기반을 이루던 이전의 모든 신화─왕의 신성한 권리든 역사 유물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이든─의 거품을 뺀다고 주장하면서 그 자신의 신화, 즉 선택을 실행하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신화를 제시한다. 추상에 대한 불신─마거릿 대처의 유명한 부정인 “사회 같은 것은 없다”는 표현이 이를 요약하고 있다─은 문화적 관념과 활동을 심리적 전기psychobiography로 환원하는 널리 퍼진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개인들의 ‘내면의 삶’이 현실의 가장 진정한 층위라 여기도록 초대받고 있다. 가령 리얼리티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지닌 호소력의 상당 부분은 참여자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을 보여 준다는 매혹적인 주장에 있다. 미디어에는 우리가 그들과 친밀한 사이라고 여기게끔 만드는 인물들이 넘쳐 난다. 주류 신문과 잡지의 특집 인터뷰들은 언제나 전기傳記적 잡담이나 사진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영국에서 예술가와 뮤지션 들은 전기적 방식으로 스스로를 표상하거나 아니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두 방식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추상적 관념─예술 자체의 관념이든 예술이 다루는 힘들이든─을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습관적으로 경멸과 이해 부족에 맞닥뜨리고 있다.

이런 경향은 타블로이드 신문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령 단호하게 ‘얼굴 없는’ 뮤지션으로 남고자 했던 베리얼Burial을 지난해 한 타블로이드 신문이 아웃팅한 사건은 심리적 전기로 환원하려는 이런 경향이 공격적으로 나타난 많은 사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영국 주요 일간지들의 기본적인 태도도 추상을 묵살하기는 마찬가지다. «옵서버»의 칼럼니스트인 닉 코언이 최근에 미술 전문 잡지 «프리즈»의 편집자인 댄 폭스에게 퍼부은 비난을 보라.[1] 그 글에서 코언은 폭스가 런던의 테이트 브리튼에서 열린 ‘얼터모던’Altermodern 전시를 다루는 주요 신문 기사들의 논점을 분석해 블그로에 올린 글을 비판한다.[2] 코언의 글은 “잉글랜드인들로 하여금 영국 해협의 길이가 천 마일이길 소망하도록 만드는 프랑스적 유형의 지식인”[3]을 향한 터무니없는 간접 비난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론은 대륙의 독소이며 앵글로색슨적인 상식이 그에 대한 해독제가 될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이 글은 또한 이론은 “증거와 같은 일상적인 무언가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는 식의 표준적인 불평을 하는 어릿광대 경험주의를 위한 선언문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험주의empiricism와 경험적인 것the empirical은 같지 않다. 훌륭한 이론은 경험적 자료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이론은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자료와 동일한 수준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알튀세르가 자신의 이론을 ‘과학적인’ 것으로 묘사했을 때 그는 앵글로색슨적인 유명론뿐만 아니라 시학과 담론을 자연과학보다 선호하는 경향이 있던 상당수 후기구조주의 이론에 의해서도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서의 개별 주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화는 어릿광대 경험주의가 사람들과 사물들이라는 개념을 경솔하게 전파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다. 철학자 레이 브래시어는 신경과학과 ‘대륙’ 이론가들의 작업에 기대고 있는 책 «풀려난 허무»에서 과학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진부한 허구에 불과함을 폭로한다고 주장한다. 브래시어가 옹호하는 유형의 철학적 리얼리즘은 자본주의 ‘리얼리즘’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실제로 그 철학적 리얼리즘은 이 이른바 리얼리즘[현실주의]이 왜 리얼리즘이 아닌가를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겉보기에 자명한 내면적 삶의 이 모든 요소(감정들, 자아 자체 등)가 우리를 속이는 고정관념이라고 주장하는 폴 처칠랜드와 토머스 메칭거 같은 신경철학자들의 연구를 발전시키고 있는 브래시어의 작업은 현실을 자처하는 어릿광대 경험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쇄신된 이론적 반격의 일부를 이룬다.

[1]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09/mar/01/tate-britain-bourriaud-art-market
[2]  https://frieze.com/article/altercritics
[3]  이 전시를 기획한 니콜라 부리요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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