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그립습니까? : 마크 피셔 인터뷰

마크 피셔는 사회 비평가인 동시에 음악·영화 비평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자신도 밝히고 있듯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는 음악을 거의 논하지 않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음악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인터뷰 한 편을 번역해 올립니다. 2014년에 «내 삶의 유령들»을 출간한 후 «크랙 매거진»과 나눈 인터뷰로(https://goo.gl/H1Pjfu), 여기서 피셔는 새로움을 낳지 못하는 최근 문화의 무능과 레트로 문화의 득세,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에 내재한 부정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 등을 언급합니다. 마크 피셔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관심을 가진 독자뿐 아니라 대중음악을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지 고심하는 분들께도 도움이 되는 인터뷰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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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그립습니까? : 마크 피셔 인터뷰

2014년 9월 12일 | 앤드루 브로크스
박진철, 리시올 편집부 옮김

2002년 데뷔 싱글 ‘우위를 잃고 있어’[뒤처지고 있어]Losing My Edge에서 밴드 LCD 사운드시스템LCD Soundsystem의 프런트맨 제임스 머피는 “잊힌 80년대를 향한 빌려 온 노스탤지어”를 노래했다. 이 노래는 브루클린 힙스터들을 조롱하는데, “꽉 끼는 재킷”을 입고서 미래가 아니라 팝의 황금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혁신의 결핍과 슬며시 잠입한 복고주의를 전형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2000년대 들어 일렉트로닉 음악이 팝 스타들을 위한 유로댄스 반주로 범속화되거나 (덥스텝dubstep이나 그라임grime 등의) 언더그라운드로 분화되는 사이 록은 개러지펑크나 포스트펑크 부흥과 더불어 레트로 시기를 맞았다.
지금도 그렇다. 레트로마니아는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자기 꼬리를 집어삼킨 우로보로스ouruboros처럼 가까운 과거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힙스터들을 탓하진 말자.
작가이자 비평가며 이론가인 마크 피셔가 보기에 명백히 21세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문화가 결핍된 현상을 분석하려면 이를 1980년대에 시작된 주요 정치 변동과 나란히 검토해야 한다. 전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피셔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지평들을 제약한 결과 이제는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기가 더 쉬워졌다고 주장한다. 또 그에 따르면 우리 의식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제약됨에 따라 새로운 미래들을 기획할 가능성이 줄어들어 버렸다. 최근작인 «내 삶의 유령들»에서 피셔는 문화적 시간이 중단돼 있고, 우리는 ‘새로움’과 ‘지금’을 생산하고 ‘다음’을 요청할 능력을 점점 잃어 가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의 끝자락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죽은 형식과 실패한 미래의 영원 회귀뿐이며, 우리는 홀린 듯이 무덤을 계속 파내고 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마크와 나는 음악과 정치, 비어 있는 미래의 진보적 가능성을 논했다.

앤드루 브로크스  당신은 «내 삶의 유령들»과 전작인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동일한 기획의 양면이며 이 기획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들에 내재한 부정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신작은 전작에 경의를 표하는 책인가요? 아니면 전작을 출발점으로 삼아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책인가요?

마크 피셔  «내 삶의 유령들»에 수록한 글 다수를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집필하던 것과 같은 시기나 그 전에 썼습니다. 그러니 분명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출발점은 아니에요. 가장 단순한 층위에서 보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음악을 거의 다루지 않죠. 반면 «내 삶의 유령들»에는 음악을 논하는 글이 아주 많아요. 제 생각에 음악은 문화적 병폐의 주요 증상들을 발견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저는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완전히 자연화된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뤘습니다. «내 삶의 유령들»에서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사회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상실되었던 미래들을 살피고 있어요.

앤드루 브로크스  당신은 향수nostalgia와 관련된 시간의 특징을 밝히려 시도하고 있나요?

마크 피셔  맞아요. 그런데 이건 심리학적 향수 자체가 아니라 오늘날 나타나는 향수의 형식입니다. 어떤 의미에선 둘 다기도 하지만, 더 문제가 되는 건 향수의 형식이라고 생각해요. 사물들이 반복되지만 그 사실이 인식되진 않으며 혼성 모방pastiche이 점차 자연화되는 거죠. 80년대 텍스트들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혼성 모방이 점점 만연해질 거라고 말했습니다. 선견지명이 돋보이는 지적이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부른 것의 초기에 혼성 모방은 분명 여전히 하나의 스타일이었고 사물들에는 여전히 인용 부호가 쳐져 있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에는 인용 부호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전용appropriation은 더 이상 주의를 끌지 못합니다. 그저 전제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이게 무엇의 향수일까요? 이를 고려하면 21세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21세기 문화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앤드루 브로크스  당신은 대중음악에 ‘미래 충격’future shock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악틱 몽키스Arctic Monkeys를, 특히 이 밴드가 레트로 그룹으로 자리 잡지 않았다는 사실을 논했습니다. ‘미래 충격’이라는 개념과 레트로의 의미를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마크 피셔  레트로는 매우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오랫동안, 최소한 70년대 초 이후에는 늘 레트로 그룹이 있었고 적어도 당시에 이들은 레트로로 자리 잡았죠. 반면 악틱 몽키스 같은 그룹은 역사성과 아무 관계도 맺고 있지 않아요. 이들은 분명 레트로 그룹이지만 레트로라는 범주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의 레트로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미래 충격이라는 감각이 사라져 버렸어요. 돌이켜 보면 미래 충격이란 사람들이 익숙하게 느끼던 스타일의 매우 급격한 전복이었죠.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건 포스트펑크 끝자락의 음악적 의식입니다. 그땐 가까운 과거를 대놓고 참지 못하는 태도가, 문화적 시간상으로 오래된 과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있었어요. 저는 이런 태도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포스트펑크 시기가―원문] 끝나고 다른 음악 영역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을 때 가장 주목할 만했던 장르는 정글jungle입니다. 정글을 듣고서 사람들은 “이런 건 들어 본 적이 없어”라고 느끼곤 했죠. 미래 충격을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이상과 같습니다. 물론 무언가가 정말로 무에서 생겨나지는 않으며, 새로운 종합에 포함된 요소들을 회고적으로 구축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종합들이 계속 산출돼 왔고, 제 생각엔 분명, 딱 2000년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2003년까지는 여전히 새로운 걸 들을 수 있었고 또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부터는 새로운 무언가를 들을 일은 없으리라는 생각에 점점 익숙해졌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근원적인 내재적 부정성의 의미입니다. 인정하든 아니든 우리의 기대들 안에는 이 부정성이 포함돼 있어요.

앤드루 브로크스  당신이 책에서도 논의한 베리얼Burial 얘기를 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의 데뷔 앨범이 악틱 몽키스의 데뷔 앨범과 같은 시기에 발매됐기 때문인데요. 미적 차이를 제외하면 베리얼과 악틱 몽키스는 어떻게 구분될까요? 악틱 몽키스는 현재 우리 문화의 증상이고 베리얼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한층 더 정확하게 묘사해 준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마크 피셔  분명 베리얼은 증상을 넘어섭니다. 진단이죠. 하나는 진단이고 다른 하나는 증상이라고 보고 싶네요. 베리얼이 우리가 증상에서 벗어나도록 해 준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누구도 그런 일을 해 줄 순 없어요. 하지만 제 생각에 베리얼은 시간을 인식하게 만들어 줍니다. 반면 악틱 몽키스는 문화적 시간을 지우며 록의 영원 회귀와 영원함에 호소합니다. 제가 보기에 베리얼이 중요한 이유는 가까운 과거와, 즉 사이먼 레이놀즈가 영국 언더그라운드 댄스 음악의 하드코어 연속체hardcore continuum라 부른 것―정글에서 개러지garage를 거쳐 투스텝2-step으로 이어지는―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후 몇 년이 채 안 돼 [베리얼을 통해] 이 연속체가 귀환했음을 감지했습니다. 지속될 수는 없는 귀환이었지만요. 사람들이 감지한 것은 훨씬 암울한 21세기 관점에서 90년대의 집단적 희열로 귀환했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베리얼이 21세기가 일종의 중단된 시간임을 조명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사실은 우리가 20세기에 기대했던 미래들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 점에 기초해 관점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90년대는 훌륭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관점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2차대전 종전 후의 문화에 빠르게 퍼졌던 하나의 흐름이 있습니다. 제가 대중 모더니즘popular modernism이라 부르는 흐름으로, 높은 기대를 낳았지만 이제는 종결되었죠. 20세기에 우리가 투사했던 건 미래들을 향한 갈망이었고, 제가 보기엔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반면] 21세기 들어 우리가 마주한 것은 동시대적인 것과 모던한 것의 혼동, 실제로는 동시대적인 것이 모던한 것을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깊이 없는 동시대적인 것만이 남았죠.
이 사실이 90년대에 이르러 실제로 분명해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90년대에는 블러와 오아시스를 경유해 새로이 등장한 부인된 레트로 문화disavowed retro culture들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 부각되었죠. 블러와 오아시스의 대립은 유사 대립이었고 평범한 스테레오타입들 간의 전투였습니다. 이언 펜먼이 블러에 대해 묘사했듯 꾀죄죄한 학생들[블러]과 말할 줄 아는 네안데르탈인처럼 묘사된 노동 계급 카툰[오아시스]이 대립했던 것이죠. 마치 이들이 유일한 선택지인 양 말이에요. 하지만 당시에 진정한 대립은 그런 음악들과 트리키나 정글 및 테크노 음악의 여러 반복 사이에서 벌어졌습니다. 90년대의 저 부인된 레트로 문화에 대한 대안들의 절대적 과잉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당시, 그러니까 1995년에 제가 분명하게 감지하기 시작한 사실은 80년대보다 이 시기[1995년]가 60년대와 더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오아시스는 80년대에도 존재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80년대였다면 작은 펍에서 열린 공연의 넷째 출연진 정도였을 테죠. 당시는 60년대와 비슷한 음악을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 서사에 대한 하나의 감각이, 어떤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는 감각이 있었던 거죠. 하지만 90년대 이래 시간은 점차 평평해졌고 그렇기에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앤드루 브로크스  당신의 비판은 지난 30년간 벌어진 문화적 시간의 이 평면화를 정치적 변동, 즉 신자유주의의 부상과 결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일 잠에서 깨어나 어떤 ‘새로운 것’과 대면해 있음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아니면 등장해야 할 새 문화를 향한 희망이란 내생적으로 사회-정치 체계의 변화와 결합되어 있을 뿐일까요?

마크 피셔  내생적으로 결합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두 방식 모두로 작용할 수도 있어요. 아마도 인과성은 두 방식 모두로 작용할 테죠. 문화는 근원적인 정치적 상황의 단순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 정치적 대역폭을 넓히는 조력자기도 합니다. ‘새로운 것’이 등장할 가능성은 늘 존재합니다. 사람들은 제 작업이 비관주의적이라 말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제 작업은 부정적입니다. 이미 거기 있는 부정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가깝죠. 하지만 이 부정성을 부정하고 부인하려는 막대한 노력이 가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여러 면에서 낙관적이지 않을 수 없지만, 제 생각에 우리는 사건 중심적 사고방식, 즉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갑작스런 단절이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을 피해야 합니다. 상황이 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꾸어 말하면 상황이 모든 층위에서 지금처럼 지속될 수도 없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경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반면] 문화적으로는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몇 년 전에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을 보러 갔을 때 제 친구이자 철학자인 레이 브래시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백 년도 가겠군.”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저는 그럴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형태의 단절이 생기겠죠.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저는 우리가 어딘가로 진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정치로 옮겨 가는 중이라면 도움이 될 테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공백기에 들어서고 있어요. 제 삶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입니다. 제가 살아온 시간은 언제나 우파가 장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돌이켜 보면 지금의 우리가 거대한 문화적 개화기(펑크나 포스트펑크 같은)였다고 생각하는 시기들에도 문화 분위기는 대중 모더니즘의 하락과 신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부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반면 지금 우파는 거의 힘을 소진한 듯 보입니다. 우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상황은 멈춰 세우지 않으면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를 음악 문화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앤드루 브로크스  제 생각에 새로움에 관한 이야기에서 핵심은 메인스트림에 도전한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만약 새로운 것이 순수하게 틈새 관심niche interest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무시해도 될까요? 도전을 제기하는 건 아니니까요.

마크 피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새로운 게 있는지 아직 우린 몰라. 새로운 뭔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아직 우린 모르는 거지.” 그런데 바로 이런 태도가 오류입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때 그걸 알아차렸습니다. 저런 태도가 참이더라도, 오늘날의 하이퍼-가시성 시대에 우리가 정말로 보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조금 기이할 겁니다. 우리가 잃은 것은 바로 새로움에 관한 모종의 대중적 경험이에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사라져 버린 거죠. 또 잃은 건 실험적인 것, 아방가르드, 대중적인 것의 순환입니다. 대신 우리는 ‘실험적인 것’이라는 상표를 얻었죠. 메인스트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저만의 틈새 시장을 보유하고서 확고히 자리 잡은 장르들 말이죠. 그리고 조직적인 선전propaganda에도 불구하고 메인스트림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과거보다는 한층 덜 도전받죠. 왜 그럴까요? 지금은 저 같은 사람도 저만의 틈새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정 부류의 청중이 필요해도 BBC에 나가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인터넷에 저를 위한 공간이 많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 사실 덕분에 사이먼 코월[텔레비전 제작자이자 진행자. 영국에서 <팝 아이돌>이나 <더 엑스 팩터> 같은 프로그램을, 미국에서는 <아메리칸 아이돌> 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심사 위원으로 출연했다] 같은 이가 메인스트림을 지배할 수 있는 거죠. 텔레비전, 특히나 영국 공영 방송은 전례 없이 처참한 상태입니다. 수많은 책이 음악만큼이나 텔레비전을 다루고 있죠. 중요한 예외는 HBO 등의 미국 텔레비전 방송입니다. 미국 텔레비전은 21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문화 형식을 산출하고 있다고 주장할 권리를 지닙니다. HBO 프로그램 같은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건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영국에는 박스 세트 멜랑콜리(제가 사용하는 명칭입니다)가 존재하며 그걸로 HBO 프로그램을 시청하지만 공영 방송을 함께 시청할 때와 비슷한 집단적 경험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더 엑스 팩터> 같은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동시에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죠. 이 앎은 우리를 북돋아 주는데 이때 사람들이 서로의 사회성을 향유하기 때문입니다. 따분한 재능 콘테스트는 구실에 불과해요.

앤드루 브로크스  당신과 스크리티 폴리티Scriti Politi의 멤버 그린 가트사이드가 나눈 대담에서 그는 ‘비판적 혼합’critiacl admixture이라는 훌륭한 용어를 제시했습니다. 음악 밴드들, 특히 펑크와 포스트펑크 밴드들이 철학과 사회운동에서 ‘비판적 혼합’이라는 아이디어를 빌려 와 여러 방면으로 메인스트림에 도전을 제기했죠. 이 ‘비판적 혼합’이 제거된 것일까요?

마크 피셔  맞아요. 제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이 점입니다. 멜랑콜리 역시 그와 결부된 것이죠. 저를 형성한 것이 바로 비판적 혼합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학교에서 배운 게 없어요. 학교를 증오했죠. 전 «NME»를 통해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제 생각에 «NME»는 채널 4와 비슷합니다. 지난 30년간 영국 문화가 쇠퇴한 과정을 확인하고 싶다면 NME가 그땐 어땠고 지금은 또 어떤지 비교해 보면 됩니다. 그땐 채널 4나 BBC 덕분에 공영 방송이라는 것이 존재했고 문화를 폭넓게 지원했습니다. 예술 대학도 큰 역할을 수행했죠. 그린은 리즈 예술 학교 출신입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예술 대학의 재부르주아화는 매우 중요한 현상이에요. 재정 지원 구조에서 일어난 명백히 범속한 변화들과 더불어 벌어진 일이죠. 사람들이 자신의 교육에 돈을 지불해야 했고 [이제] 우리는 그 결과들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사안 중 하나는 대중문화나 대중음악 같은 영역에서 나타나는 계급 지배입니다. 과거에 사립이었던 학교 출신의 다수가 현재 인디 신과 여타 영역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이들만이 그걸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들만이 문화가 발생하는 네트워크들에 진입할 여력이 됩니다. 신자유주의의 부조리한 신화는 창의성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고루 나누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원천이며, 창의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국가나 사회주의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정확히 그 반대죠. 창의성은 이런저런 종류의 집단적 조건들이 마련돼 있을 때만 발휘됩니다. 그리고 체계적으로 해체돼 온 것이 바로 집단적 조건들과 비판적 혼합이죠.

앤드루 브로크스  무언가를 향한 운동의 일부였던 펑크에서 비판적 혼합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경험은 이와 매우 상이합니다. 우리는 스타일들 사이에서 길을 찾는 개인들이고 그 어떤 하나의 운동에도 속해 있지 않습니다. 당신도 이런 경향을 인지하시나요?

마크 피셔  말씀하신 대로라고 점점 더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사실 매우 한정돼 있죠. 표면적으론 자아를 대체할 가능성이 무한히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 귀결은 무엇일까요? 사전에 마련된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죠.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를 집단적으로 생산하는 역량은 극단적으로 위축돼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운위되는 모든 것의 근원입니다. 무의미한 선택들의 무한성을 만드는 역량이 실제로 사태를 변화시키는 역량을 대체한 거예요. 그리고 무한한 대체 가능성이라는 감각의 근원에는 무엇도 다시 생겨날 수 없다는 압도적인 감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생각엔 이것이 현 순간의, 즉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핵심 변증법인데, 그 무엇도 고정돼 있지 않지만 그 무엇도 정말로 생겨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죠. 이 둘은 전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사이먼 레이놀즈가 이를 구분했는데 그에 따르면 일상생활의 속도는 빨라졌지만 문화의 속도는 둔화됐습니다. 최근에 조디 딘이 매우 감동적인 글을 한 편 썼어요. 이 글은 표면적으론 조너선 리섬의 책 «반체제 정원들»Dissident Gardens 서평인데요. 거기서 딘은 이 책을 당 소속이라는 문제와 결부시킵니다. 당에 소속되면 팸플릿 배부 따위의 재미없고 고된 일이 [견딜 만해—원문]집니다. [당에 소속된다는—원문] 서사를 갖게 될 때 이 단조로운 활동들이 근본적으로 변형됩니다. 삶 전체가 근본적으로 변형되는 거죠. 자본주의는 이런 변형과 비견될 만한 그 무엇도, 우리가 긍정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그 무엇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낙담 혹은 부인된 낙담은 무언가에 실제로 속하고자 하는 갈망 혹은 갈구의 징후예요. 자본주의는 충족할 수 없을뿐더러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는 갈망이나 갈구 말이죠. 그러므로 제가 하고 있는 일은 부분적으로 저 근원적인 부정성을 슬픔을 인식하는 수단이자 슬픔의 원인으로 표면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성을 드러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우울을 분노로 전환시키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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