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는 강연을 엮은 책이어서 장 말미나 중간에 학생들의 질문과 스피박의 답변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인 <교직과 자서전>의 질문 제목은 ‘비평적 내밀함’이에요. 이에 대한 스피박의 대답을 발췌해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철학적 읽기와 문학적 읽기의 구분에 대한 질문이 나왔던 같아요. 이에 그는 그런 차이는 부수적이라고,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냥 읽기가 있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이는 비평적 거리가 아니라 비평적 내밀함을 확보하는 읽기예요. 그가 애용하는 표현으로는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들어가는 읽기고요.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 파업»을 예로 들어 이것을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읽기란 요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텍스트’의 사적인 문법을 살피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읽기로 훈련받아야만 어떤 텍스트를 진정으로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고 스피박은 말해요.
그의 글이 종종 그렇듯 무심해 보이면서도 에너지 가득한 부분입니다. 읽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부분이라 생각하고요. 그리고 이 부분을 읽었다면 이제 강연의 처음으로 돌아가 스피박의 읽기에 들어서는 일만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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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적 내밀함
본서 서두에서 언급했던 몇 가지를 여기서 재고해 봅시다. 문학 텍스트와의 비평적 내밀함을 확립하는 것과 정전적인 설명 텍스트와의 비평적 내밀함을 확립하는 것, 이 둘을 어떻게 구별할까요? 제 전공 분야는 문학 비평이에요. 저는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읽어요. 저 자신의 읽기는 다른 이들이 묘사해 주길 바라요. 여하튼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걸 저는 피할 수가 없어요. 제 학생들과 저 자신에게 환기하는 건 단 하나예요. 설명 텍스트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문학 텍스트에서는 진실성을 자기 것으로 삼기와 맺는 관계가 설명 텍스트에서와는 상이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재직하고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총파업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남과 북», 로자 룩셈부르크, 두 보이스, 간디와 타고르, 벤야민, 소렐, 데리다, 그리고 다시 소설인 틸리 올슨의 «내게 수수께끼를 말해 줘»(1961)를 읽었어요. 저는 학생들에게 거듭 말했지요. 텍스트들에서 진실성을 자기 것으로 삼기는 상이하다고요(이것은 비-모순을 보편적인 것으로 재현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그리하여 사람들은 «서머타임»의 마르곳에게서 진실의 자리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부언했어요. “텍스트의 초대는 상이한 방식으로 진실성과 연관된다는 것을 언제나 유념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문학 텍스트가 그저 입증될 수 없는 것이라고 치부해서는 안 돼요. 거기에도 일종의 진실을-자기 것으로 삼기 즉 타당성을-자기 것으로 삼기가 있지요.”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 파업»(1906)은 독일 사회 민주당SPD에 러시아의 교훈을, 유럽 최강의 이 좌파 정당—마르크스 자신의 정당—에 러시아에서 1892년과 1905년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가르치고자 합니다. 이는 진실한 읽기를 주려는 욕망이었어요. SPD가 앎을 통해 권력의 위치에서 빠져나오는 걸 도우려는 욕망이었지요. 로자 룩셈부르크에 관한 한 학생의 발표문을 읽었을 때 우리는 그 학생이 할 수 있었던 전부가 이미지들에 대한 논평임을 알았어요. 그 학생은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들어가지 못했지요. 이 텍스트는 노조 운동, 정당, 부유한 프롤레타리아들, 하층 프롤레타리아들, 다양한 챕터에서 언급된 각각의 집단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읽을지를, 그리고 가깝고 먼 미래에 어떻게 상호 작용할지를 가르치려는 것이었고요.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그런 종류의 요약만 읽은 사람은 간과하게 되는 것이 있지요. 예컨대 텍스트 끝에서 룩셈부르크는 일종의 영원 회귀를 제시해요. 때때로 총파업의 인화점에 불이 붙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당을 생각할 수 있는 프롤레타리아트 중에서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상향 이동한 부문과 당과 노조가 그러한 이동엔 광기와 나쁜 정치가 놓여 있음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는 겁니다.
결정할 수 없음과 싸우면서 미래를 내다보는 건 또한 기록할 수 있음을 재현하고자 욕망하는 것이에요. 이 경우엔 역사의 광대한 흐름을 재현하려는 것이지요. 조심스럽게 프로토콜에 들어간다는 생각은 텍스트에 설정된 사적인 문법을 살펴본다는 거예요. 예컨대 룩셈부르크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논증보다는 반복을 사용하는 것이 그런 사적인 문법이지요. 엥겔스가 총파업과 바쿠닌, 기타 등등을 폄하하는 «안티-뒤링»(1878)의 어마어마한 조롱에 비하면 반복의 단순한 힘이 수사학적으로 더 나아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논지는 총파업이 불필요하다는 거예요. 노동 계급이 총파업에 나설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다면 굳이 총파업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요. 룩셈부르크는 사회 정의와 혁명을 놓고 대가들과 다투려 하지 않아요. 그녀는 가르침의 또 다른 기술을 밀지요.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기술을요. 그녀는 믿기 어려운 이 리스트들을 반복해요. 숱한 공장, 숱한 장소, 숱한 세월, 거듭해 다시, 새로운 리스트들, 새로운 요구들, 새로운 승리들.
예컨대 칸트의 철학 텍스트들의 프로토콜에 들어가면 그가 그룬트자츠Grundsatz라고 말할 때 뜻하는 것이 철학하는 주체의 프로그래밍 안에 있는 정립하는 조건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가 프린치프Prinzip라고 말할 때 뜻하는 것은 오성이 건드릴 수 없는 순수 이성적 원리예요. 그는 이런 식으로 라틴어를 사용해요. 마르크스의 라틴어 사용과 흡사하지요. 칸트와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는—독일의 고전적 전통 안에 있는 다른 철학자들 역시 그렇다고 저는 확신하는데—정확한 구조적 장소라는 의미로 다스 페어헬트니스das Verhältnis를, 단순히 그냥 관계라는 뜻으로 디 베치훙die Beziehung을 사용합니다. 이런 프로토콜들이 모든 유형의 텍스트에 적용되는 반드시 합리적인 규칙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우리가 이 프로토콜들을 알지 못하면 그 텍스트의 메시지를 읽어 내기 어려울 겁니다.
이러한 비평적 내밀함 같은 무언가를 확보하게 되면 (인종주의자로서의 칸트, 자본주의자로서의 헤겔, 성 차별주의자로서의 파농을) 변명하는 입장에 놓이지 않지요. (인종주의자로서의 마르크스, 성 차별주의자로서의 소크라테스, 계급주의자로서의 네루를) 비난하는 입장에 놓이지도 않고요. 오히려 텍스트를 굴리고 사용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해 목전의 기획을 위해 텍스트에 담긴 최상의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리를 찾아내지요.
변명도 말고 비난도 마세요. 입구를 확보하세요. 이건 철학이고 이건 문학이라는 식의 총칭적인 차이들은 우리처럼 문학적인 읽기로 훈련받은 사람에게는 여러모로 부수적이에요. 적어도 저로서는 그냥 읽기가 있는 거예요. 종별적으로 ‘문학적인’ 읽기라는 건 이제 없어요. 물론 읽기는 전공 분야에 의존하지요. 저는 철학함을 할 수 없고, 역사가처럼 쓸 수 없으며, 인류학적인 호기심이 없어요. 다른 이들은 저를 학제적이라고 부르는데 늘 그 이유가 궁금해요.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예요. 요컨대 진실함을 명확하게 자기 것으로 삼으세요. 진실함을 존중한 뒤에야 변명이든 비난이든 사용이든 하세요. 하지만 문학의 경우에 문학이란 문학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에 굴하지 마세요. 그런 건 우리에게 최상이 아니었던 시공간에서 나와요. 자본주의가 태동하던 시기에 시작한 칸트조차 말하지요. 미학적인 것 안에서 우리는 객관적인 받침 없이 재현하는 능력을 누릴 수 있다고요. 그러한 것이 우리가 판단을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요.
이제 철학과 문학을 구별해야 한다는 요청에 답해야겠네요. 정녕 대답은 단 세 마디예요. 전 알지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