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적 유토피아들

지난번 스피박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2018년에 니키타 다완의 사회로 스피박과 앤절라 데이비스가 나눈 대담을 공유합니다. 베를린에서 열린 어느 심포지엄을 마무리하는 토론의 일부로, «래디컬 필로소피» 2.05호(2019년 가을)에 <행성적 유토피아들>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어요. «래디컬 필로소피»의 허락을 받아 번역문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두 사람의 강연 및 대담 전체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희를 비롯해 데이비스와 스피박의 만남이 뜻밖이라고 느낄 독자분들도 있을 텐데요. 그런 만큼 이 대담은 두 사람의 동지애를 확인시켜 주는 한편 그들 사이에 난 좁힐 수 없는 거리도 극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데이비스가 미국의 상황을 중심으로 (특히 인종 문제를 둘러싼) 사회 운동과 정당 정치의 현실 및 새로운 가능성을 논한다면 스피박은 글로벌 남부 혹은 트리컨티넨트의 견지에서 데이비스의 논의에 집요하게 개입하고 있어요.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대담이라 흥미진진하면서도 주목을 요하는 내용이 정말 많아요. 스피박과 데이비스뿐 아니라 오늘날 정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이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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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적 유토피아들

앤절라 데이비스,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니키타 다완
리시올 출판사 편집부 옮김

이 대담은 베를린의 예술 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에서 열린 ‘식민의 영향’Colonial Repercussions 이벤트 시리즈의 하나인 ‘행성적 유토피아들: 포스트식민 세계에서 희망, 욕망, 상상들’Planetary Utopias: Hope, Desire and Imaginaries in a Postcolonial World 심포지엄(큐레이터는 니키타 다완)을 마무리하는 토론의 일부로 2018년 6월 24일에 녹화되었다. 안나 밀란이 대담 내용을 옮겨 적었고, 온라인 게재를 위해 수정을 거쳤다.

니키타 다완 지식인의 역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두 분에게 질문하면서 대담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포스트제국 정치를 촉진할 사고와 상상력 습속을 육성하는 데서 지식인에게 맡겨진 역할을요. 당신들은 영웅적인 개인주의와 메시아주의적인 리더십 모델을 이야기하는 걸 경고해 왔죠. 그런 것들이 사회 변화의 행위자로서 집단들의 기여를 삭제하니까요.

앤절라 데이비스 우리는 ‘리더들’이 남성적인 개인주의 관념에 부합해야 한다고, 영웅적 개인이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버릇이 있어요. 2014년의 퍼거슨 시위 기간에 베테랑 민권 운동 지도자 몇몇이 퍼거슨을 찾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우호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어요. 운동과 리더에 관해 이들이 내세운 가정이 민권 운동 경험에서 얻은 것이었거든요. 이들의 입장은 퍼거슨 시위자들이 리더십을 결여하고 있으며 눈에 띄는 단일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거였어요. 시위자들에게 “당신들에겐 눈에 띄는 지도자가 없어요”라고 말했죠. 사실 거기엔 리더십이 있었고 리더 자리에 있던 다수가 여자였어요. 베테랑 ‘리더들’의 눈에는 여자들이 리더 자리에 있는 것이 리더십의 부재나 마찬가지였던 셈이죠.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대엔 여자들이 리더십 자리를 점하곤 합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날 청년 활동가들은 상이한 리더십 패러다임들을 탐색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집단적인 리더십 형태를 개발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궁리하고 있죠. 이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일천할 따름이고요. 오랫동안 혁명적 행동주의에 관여한 우리도 영웅적인 남성 리더라는 관념으로 단련돼 왔어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리더십 형태를 상상하고자 애쓰는 젊은 세대에게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사람들이 전례 없는 방식으로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리더십을요. 전례 없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 리더십이 자아 전체를 운동에 가져가도록 사람들을 초대하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각자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동반한 채로 운동에 참여하라고 초대받죠. 과거에 우리는 혁명적 활동가가 되려면 혁명적 헌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요구받았고요. 그래서 저는 이 순간이 매우 짜릿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리더십 형태―집단적 리더십, 공감적 리더십―을 목도하는 중이니까요. 발표 때 저는 의도해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 등장 인물인 로런 올라미나와 그의 초공감 증후군hyper-empathy syndrome이라는 사례를 사용했어요. 리더십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들은 흔히 자기 돌봄―저는 더 나은 단어가 필요하다고 봐요. 이 말이 너무나 은어처럼 통용되니 말예요―이라 불리는 것을 급진적 변화를 위한 운동들을 개념화하고 조직하는 과정에 포함하고자 애쓰고 있어요.

가야트리 스피박 저도 동의해요. 그렇지만 또 이걸 덧붙이고 싶네요. 포스트식민 세계에서 진짜 문제는 ‘리더들’이라는 영어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관해 프란츠 파농이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3장에서 쓴 내용이라는 것을요. 그들은 민주주의 구조를 사용해 베버라면 신가산 사회neopatrimonial society라 부를 법한 것을 유지할 수 있어요. 오늘날 투표는 인원 집계예요. 그 결과가 우리가 아는 리더들, 즉 두테르테, 에르도안, 트럼프죠. 이런 건 더는 제3세계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유럽도 그 길을 따라 우회전하고 있으니까요. 농촌 학교에서[1] 우리는 ‘리더들’을 키우려는 경향을 억누르려 애씁니다. 폭력의 행위자가 되리라는 특수한 의미의 리더를요. 이것이 탐욕스럽기 마련인 농촌 중간 계급에게서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에요. 이들은 이것에 속아 넘어가곤 하죠. 정답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매번 대답하려 손 드는 멋진 아이가 있다고 칩시다. 저는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할 거예요. “얘, 그거 아니, 정말로 현명한 사람은 가만히 있는 법을 안단다. 답을 죄다 알고 있지만 그걸 꼭 말하지는 않는 거지. 그러니 나랑 같이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애들이 네 생각과 같은 걸 말하는지 지켜보자꾸나.” 제 선생님들도 모든 질문에 답하려 드는 학생을 억누르도록 훈련받은 분들이었어요. 이 아이들의 지성에 보상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이들은 지성이 무엇인지 듣게 되죠. 이것이 아비올라 이렐레Abiola Irele가 «아프리카 학자»The African Scholar에서 말한 바예요. 사망 직전에 그는 자신의 이 마지막 책 서문을 제게 부탁했어요. 대단히 영광스러웠죠. 이 책에서 그는 그것을 팔로워십이라 불러요. 좋은 리더는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뒤따르니까요. 리더십과 관련해 검토되지 않은 어떤 발상이 지천에 널려 있어요. 정말이지 여러분은 무언가를 해내는 모든 사람에게서 무엇이 나오는지 봐야 해요. ‘당신들은 이걸 해야 해요. 우리가 아는 이것 같은 운동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요. 저는 이걸 봉건제 없는 봉건성feudality without feudalism이라 불러 왔어요. 봉건성, 충성심. 그러니 저는 앤절라와 함께합니다. 완전히요.

니키타 다완 우리가 두 분에게서 배운 대단히 유익한 또 다른 가르침은 투쟁의 풍경들을 특징짓는 도구, 개념, 어휘, 조직화 실천을 향한 비판적 자세를 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을 매달 마지막 자본가는 우리에게 밧줄을 판매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기막힌, 아마 출처 불명일 말도 있잖아요. 부정의한 구조들을 바꾸는 데 사용해야 하는 도구들을 바로 그 구조들에서 물려받는다는 이 이중 구속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앤절라 데이비스 그 도구들이 우리가 가진 것이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동시에 의문에 붙이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어요. 따라서 비판적 습속, 자문하기라는 습속을 발전시키는 과정도 결코 끝이 없죠. 그리고 지금 우리는 수많은 걸 새로이 배우고 있어요. 특히 트랜스젠더 공동체들의 행동주의에서 배우죠. 너무나 정상적이라 질문할 필요조차 없다고 여겼던 범주들에 도전을 제기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관해 정말 많은 걸 배우는 중이에요. 실제로 이 범주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무대를, 우리 사고 방식의 토대를 구성하죠. 그렇기에 트랜스젠더 쟁점을 둘러싼 운동들을, 유색인 트랜스젠더 여자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맞선 운동들을 살필 때 우리는 이들이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더 다양한 형태의 폭력―국가적, 사적, 개별적 등등―에, 더 끈질긴 폭력에 노출되는 바로 그 인구 집단을 구성한다는 걸 깨달아요. 그렇게 우리는 이원적 젠더 구조에 도전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제가 선호하는 대명사로 절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 경우처럼 종종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지만요. 이건 좋은 어색함이고 생산적인 어색함이에요. 질문하는 법을 알지 못했던 것에 질문을 던지도록 만드니까요. 그 무엇도 저 과정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가장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것,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축된 것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다룰지를 묻는 이 질문을 우리가 정식화하는 방식들조차 저 과정에서 면제되지 않죠. 그리고 제 짐작에 이는 교육 문제예요. 가야트리가 말한 종류의 교육이죠. 글로벌 자본주의 기계에 능히 참여할 수 있는 숙련된 주체를 생산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한 교육에 대립하는 교육이고요. 마지막으로 저는 정의를 위한 투쟁들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져야 하는 용어들에 정말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사라 아메드가 어제 다양성이라는 용어를 논했죠. 저는 다양성 관념이 정말로 싫어요. 이 관념을 견딜 수가 없어요. 대개 이 관념이 이전에 [글로벌 자본주의] 기계에 의해 배제됐던 이들을 기계가 더욱 효율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려는 노력을 뜻하니까요. 누가 인종주의 제도에 동화되길 원하겠어요? 인종주의 제도가 자신의 인종주의 구조를 계속 유지할 때라면요. 이것이 우리가 어휘들을 과도할 정도로 의식해야 하는 이유예요. 저로선 무덤까지 가져가고픈 실천이고요.

가야트리 스피박 맞아요, 전도에 의한 정당화legitimation by reversal죠. 이전에는 그들이 전부 나빴던 반면 지금은 전부 선하다는 식이니까요. 제가 ‘글로벌 남부’가 전도된 인종주의 용어라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진정으로 자기 구축된 토착 정보원도 일부 있어요. 이런 곳들에서 스스로를 판매하면서요. 그렇지만 작업하는 데 쓸 방법론이 온통 오염돼 있다는 이 쟁점과 관련해 저는 그런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작업하니까요. 긍정적 사보타주죠.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허물 수 없다고 오드리 로드가 말했을 때 그는 뉴욕 대학의 처우에 극도로 분노한 상태였어요.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와 비슷한 거예요. 격분에 찬 선언이죠. 많이들 이를 과제를 회피하기 위한 변명으로 삼습니다. ‘안 돼, 안 되지, 주인의 도구는 일절 읽을 필요가 없어. 어림도 없지, 그걸로는 주인의 집을 허물지 못할 거야.’ 로드는 지적 노동을 절약하는 공식을 제공한 게 아니에요.
저 맥락에서 주인들은 이론 계급의 여가를 확보했다고 말하고 싶네요. 이들은 우리 등에 올라타 온갖 여가를 누리며 이 이론들을 발전시켰죠(우리 일부도 이들과 어울리며 우리의 언어로 협업했고요. 그러니 단순히 지적질에 그치진 맙시다). 또 주인들은 초기 자본주의 시절에 그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 이론들을 천천히 발전시킨 반면, 생산 양식 없이 착취 양식만을 가졌던 다수의 식민지는 내부적으로 그런 발전을 꾀할 수 없었어요. 우리는 충분히 발전한 저 방법들을 취해 우리의 과거 주인들을 말하자면 우리의 종복으로 만들고, 그것들을 우리 위에 놓는 게 아니라 이용하며, 그것들 안에 능란하게 거주하고, 그것들을 회전시켜야 해요. 비난도 말고 변명도 마세요. 그것들을 애초 용도가 아닌 무언가를 위해 사용하세요.
제 말은 지금 제가 인도 관련 무언가를 제시하면 여러분은 ‘오 가야트리, 요가!’라고 말하리라는 거예요. 인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세요. 제 종교는 대량 학살적인 것이 되고 있어요. 신정 정치고요. 그리고 글로벌 남부의 모든 엘리트 개개인은 대안 에피스테몰로지들을 판매하고 있죠. 그걸 사양하세요! (묘사적인 대안 에피스테몰로지들을 제시하는 건 매우 좋은 일이죠. 저는 작업을 검열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 더 있어요. 여러분은 제가 인도의 학생들에게 어떻게 영어를 가르치는지 알죠. 물론 영어가 없으면 그들의 삶은 엉망이 될 거예요. 그들 집에는 책이 한 권도 없어요. 숲에서 똥을 누죠. 그들은 식민주의를 몰라요. 카스트 체계는 알죠. 백인을 본 적이 없어요. 벤 베어Ben Baer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은 벤이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어요. 제 학생들과 그들 부모는 대부분 기차를 본 적이 없어요. 제 학교의 교사 중 적어도 한 명은 기차를 탄 적이 없고요. 저는 그들에게 말해요. 우리 언어의 철자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 않느냐고요. 정말 그렇거든요. 오래전에 츠베탕 토도로프가 제게 말한 것처럼 우리 언어가 기원전 500년에 혹은 언제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산스크리트어 체계를 확립한 고대 인도의 문법학자] 파니니Pānini 생전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졌을 때 구조주의자들은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르렀어요. 대단히 아름답게 구조화된 언어죠. 그래서 그들에게 말해요. 보라고요, 놀라울 정도로 꽉 짜여 있는데 우리는 이것들을 사용하지조차 못한다고요. 책을 만들어 온 사람들조차도 이 언어가 어떤 언어인지 깨닫지 못해요. 그저 그걸 망칠 뿐이죠. 우리는 우리의 모어를 사랑해요. 우리의 어머니고 훌륭한 언어죠. 저는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어째서 영어가 승리한 걸까? 이 지도를 보렴. 이 부분이 우리가 벵골어를 사용하는 작은 지역이고, 다른 거대한 지역 전체에 사는 모든 사람이 영어로 말한단다. 어째서 이들이 승리했을까? 영어 철자가 스물여섯 개밖에 안 돼서 그런 것 아닐까?’ 영어 사용자들은 스물여섯 개의 철자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cut’ 끝에 e를 붙여 cute를 만들고 plan을 plane으로 만들죠. 영어 교사인 제가 이 아이들에게서 무언가를 박탈하는 걸까요? 저는 그들에게 말하죠. ‘보렴, 우리 모음 체계에는 장음 a가 없거든. 그런데 영어에는 장음 a가 있어. P-L-A-N은 플랜이고 P-L-A-N-E은 장음 a를 써서 플레인이라 읽는 거야. 우리한텐 오이oi와 오우ou가 있지만 그들에겐 에이ai가 있어.’ 그러면 아이들이 매우 흥미로워하죠…
제 학교들에서 영어 수업은 영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요. 어느 중국 남자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이 영어를 잘하는 건 영국이 당신을 복종시켰기 때문이라고요. 저는 말했죠. ‘형제여, 당신이 옳아요. 그리고 당신이 여기 있는 건 세계 무역 기구가 당신을 복종시켰기 때문이고요.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영어를 사랑함으로써 영어를 물리쳤다는 사실이에요. 이게 제가 당신에게 할 말이에요. 하나의 언어가 그 자체로 범죄 언어인 건 아니에요. 당신이 그것을 회전시키잖아요.’ 언어에 이런 식으로 접근하도록 절 가르친 게 바로 이 아이들이에요. 이런 식으로 가르쳐진 언어는 그들 모어의 확장이고요. 이에 관해 와이 치 디목Wai Chee Dimock과 토론한 적이 있어요. 이것이 위대한 아랍 번역가들이 그리스 고전을 번역한 방식이라고요. 이른바 ‘외국’ 언어를 ‘외국화’하기보단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거죠.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지점에서 교사는 엘리트와 서발턴이 만나도록 만들 수 있고요.

니키다 다완 오염된 구조들과 ‘긍정적 사보타주’에 관해서라면 프랑크푸르트에서 앤절라와 제가 대화를 나누기도 했죠. 국가를 어떻게 해야 할지와 관련해 우리가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가야트리, 행성성planetarity이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앤절라, 당신은 국가가 감옥-산업 복합체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왔고 폭력 독점을 통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형태의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와 처벌에 관한 다른 발상들을 다시 상상하고 구상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는데요. 아나키스트로서 당신의 입장과 국가가 소멸하는 포스트국가 세계라는 당신의 유토피아를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취약한 시민들의 이해 관계를 대표할 수 있는 국가를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이 서발턴 시민들이 자신에게 봉사하길 요구할 수 있는 국가를요.

앤절라 데이비스 그건 얼마나 먼 미래를 염두에 두는지에 달려 있어요. 오늘날 사람들의 필요에 말을 걸도록 국가를 강제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경우들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또 저는 미국 사람들이 나라 전역의 수용소 바깥에서 데모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에 진정 짜릿함을 느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저는 부르주아 국민 국가 모델, 자본주의에 안착한 이 모델이 정의를 보장하는 작업을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당분간은 국가와 거래해야겠지만 그러는 와중에 극소수 권리만을 보장하는 이 제도와는 매우 다른 무언가를 상상하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독려하는 조직화와 행동주의에도 관여해야 해요. 가야트리가 지적한 것처럼 국민 국가는 부의 압도적 다수가 소수의 수중에―여덟 명의 억만장자가 세계 인구의 절반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있으니까요―집중된 세계에 봉사하죠.

가야트리 스피박 빌 게이츠 재산이 930억 달러라더군요.

앤절라 데이비스 맞아요. 제 말은 우리로선 그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가 얼마 전 홀 푸즈Whole Foods를 인수했어요. 제 말은, 자본주의가, 이것이 또 다른 대화의 시작일 텐데요… 자본주의의 이런 소유적 본성 때문에 사람들이 더더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니에요, 저는 저 국가의 어떤 측면도 유지할 수 없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가야트리 스피박 여기에 지지를 보태고 싶군요. 그렇지만 제 생각은 약간 다르기도 해요. 제게 하나의 모델이 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 스타일의 사회 민주주의일 거거든요. 통상적인 정당이 아니죠.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정당도 아니고요. 마르크스주의 정당은 1차 대전 때 전쟁에 찬성했어요, 그렇죠? 운 좋게도 마르크스는 죽은 뒤였고요. 저는 앤절라의 입장이 매우 진지한 입장이라고 생각해요. 저와 대립하지 않는 입장이고요. 우리는 분명 우리가 미래에 국가의 무용함을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우리의 동맹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러는 내내 국가는 약이자 독이에요. 이른바 국제 시민 사회―이전에 말한 바 있듯 ‘시민 사회’라는 단어는 단순히 그들이 학교에서 시민 수업을 듣고 정부가 아닌 무엇이든 시민 사회임을 안다는 것을 뜻해요―에는 아무런 사회 계약도 없으니까요. 이들은 스스로 선출한 도덕적 기업가예요. 종종 기업으로부터 재정을 지원받고요. 역사는 개인의 선의보다 크고 마르크스주의는 무릎 쏘기kneecapping와 무관해요. 그러니 저는 비정부 기구 체계 내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의문시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아는 훌륭한 사람만 여럿이에요. 예를 들어 음포 은데벨레Mpho Ndebele가 있어요. 그는 전적으로 어느 비정부 기구 내부에서 작업하고 있죠. 나쁜 수단들을 선한 목적에 사용하고 있어요. 긍정적 사보타주죠. 그러니 이건 개인적인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국가를 무시한다면 국가의 탁한 측면인 민족주의, 세계 언어들의 풍요로움에 기반한 이것을 저지할 수 없으리라는 거예요. 그렇기에 저는 추상적인 복지 구조들의 보다 권역적인regional 판본을 훨씬 더 강하게 제안합니다. 국가로서는 동시대 정세하에서 사용할 수 없는 이 판본을요. 지금 국가는 글로벌 자본을 관리하고 있어요.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자본과 국가 자본을 가르는 장벽들을 제거하죠. 그런 뒤 인권 쪽 사람들이 들어와 국가를 비난해요. 하여간 국가란 나쁘기 마련이라고요.
그람시의 정의에 따르면 서발턴은 역사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소규모 사회 집단이에요. 우리의 작업은 서발턴을 시민권 회로에 삽입하고자―그러니 ‘서발턴’은 잠재적으로 일반화 가능합니다―갖은 일을 다 하는 것이고요. 이것이 저 구조와 더불어 이들이 작업하고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예요. 제가 계속 말하듯 국가란 우리가 결국 제거해야 할 무언가라고 보는 이 세계의 앤절라 데이비스들은 우리의 동맹이에요. 우리의 적수가 아니라요. 그럼에도 당장은―그리고 우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조차 비목적론을 견지합니다―서발턴과 함께하는 작업은 시민권을 위한 거예요. 매우 고된 작업이죠. 추가적인 실행이 뒤따라야 하고, 국가는 시민권이 이런 식으로 작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요. 제가 이걸 어떻게 알까요? 58년간 미국에 살았지만 저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았어요. 58년 된 그린 카드가 있죠. 기본적으로 인도에서 투표하는 걸 좋아하거든요. 또 저는 인도의 농촌 학교에서 계속 가르치고 있고, 컬럼비아 대학의 업무에 지장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가능한 한 자주 인도를 방문해요. 그 덕분에 제가 54년간 교직에 있으면서 학생 수백 명의 투표 활동에 관여할 수 있었던 것이고요. 그래서 저는 시민권이 얼마나 불균등한지, 어떤 종류의 입체 지도인지 볼 줄 알아요. 메트로폴리스 세계의 여행자인 제가 볼 수 있는데 하물며 서발턴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세계가 매일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대로의 시민권은 우리가 끈질기게 보호해야 할 하나의 자원이에요.
이것이 서발턴화와 더불어 일어난 일이에요. 월가 점령 시위와 더불어 일어난 일이고요. 왜냐하면 레이건과 부시가 집권한 80년대에 뉴딜의―상업 은행과 투자 은행을 분리한 글래스-스티걸법을 포함해―복지 구조 전체가 무효화되었고, 2007년의 붕괴는 가족 가치의 물질적 텍스트 위에서 발발했으니까요. 그 텍스트는 ‘우리는 우리 가정을 사랑합니다’예요. 더 많은 자본을 생산하는 1부문을 개별 소비를 생산하는 2부문과 착각한 고전적 오류죠. 주택 구매 과정에서 개인들이 다량의 금융 수단을 자본 회로로 내보낸 건 우연이 아니에요. 이것이 이데올로기에 대한 물질적 묘사예요. 주택 산업을 가족 가치를 위한 하나의 자원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죠.[2]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연루와 더불어 작업할 필요가 있어요. 국가를 독이 될 수 있는 약으로 전략화하면서요. 정치체를 거듭해서, 언제나 오직 부분적으로만 치유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이것이 제가 순전히 실천적인 관점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따르는 까닭이에요. 제가 대단히 흠모하는 인물이죠. 제 감독관이자 선생 등등인 [서발턴]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해요. ‘국가라는 맥락에서 저는 당신들의 적이에요. 제가 선한 사람이고 제 부모님이 선한 사람이더라도 두 세대의 걸친 선함으로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지적 노동권에 대한 거부를 해지할 수 없으니까요. 이것이 우리가 겪어 온 일이죠. 제가 지금 여기 있기 때문에 국가가 당신들에게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정말로 애쓰고 있는 바는 저 없이도 국가가 당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국가가 당신들의 종복인 장소에 당신들이 물질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까요?’
제 감독관 중 한 명이 판차야트(지역 농촌 자치 단위) 선거에 마르크스주의 공산당 후보로 나갔어요. 그에겐 후보 등록조차 허용되지 않았죠. 힌두 민족주의 폭력 때문이었어요. 저런 종류의 맥락에서 저는 아직 국가를 포기할 준비가 안 됐어요. 그렇지만 맞아요, 국가 경쟁보다는 권역주의regionalism죠. 저는 중국처럼 생각하려 애쓰고 있어요. 얼마 전에 저는 제가 ‘실크 로드를 다시 상상하라는 명령들’Imperatives to Reimagine the Silk Road이라 부르는 걸 했어요. 제 미국 인격personship이나 인도 인격 바깥의 저를, 경쟁적인 민족주의에 물든 인격 바깥의 저를 상상하고자 애쓰기 위해서였죠. 이런 노력에서 국가들은 누가 더 큰지 판가름하기 위해 싸우는 링 내부에 속박돼 있지 않아요. 우리는 비판적 권역주의를 더 높은 층위에서 고취해야 해요.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ASEAN이나 남아시아 지역 협력 연합SAARC 같은 권력 집단은 단순히 경제적이어선 안 돼요. 예를 들어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는 그렇게 초라하게 구상되어선 안 됐어요. 이런 사례를 끝없이 나열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이것이 제 실질적인 실천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예를 들면 토지 개혁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 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쯤 하겠습니다.

니키타 다완 이런 고찰들에 비춰 볼 때 두 분은 동시대 세계에서 국제적 조직화와 초국적 연대의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앤절라 데이비스 우리가 독일에 있다는 걸 계속 유념하려 해요. 독일은 활발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과 BDS[보이콧, 투자 철회, 제재 운동] 지지를 생성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곳이죠, 그렇지 않나요?[3] 퍼거슨 시위가 아주 새로운 하나의 운동, 흑인의 자유를 위한 운동, 흑인의 생명을 위한 운동,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하던 2014년에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보인 연대 작업을 고려하면, 미국 흑인을 위한 새로운 역사적 계기의 생산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는지 깨닫게 돼요. 팔레스타인 기층 활동가들이 퍼거슨 시위 극초반에 소셜 미디어로 시위자들과 접촉해 연대를 보냈을 뿐 아니라 최루탄에 대처하는 법을 조언해 주었음을 여러분도 아시리라 생각해요. 흥미롭게도 이들은 퍼거슨 시위의 시각 이미지들을 보고 최루탄 용기―미국의 컴바인드 택티컬 시스템즈Combined Tactical Systems에서 제조한―가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 사용된 용기와 같다는 걸 알아봤어요. 이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연계를 더 상세히 조사하는 기폭제로 기능했어요. 이 연계가 흑인 공동체에 대한 경찰 활동―무기 교환하기, 미국 퍼거슨 같은 작은 도시의 경찰들에게 ‘반테러’ 전략 훈련시키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니까요. 그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은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운동과의 국제적 연대를 개시했죠. 팔레스타인 사람들 덕분에 연대가 확장되지 않았다면 과연 현재 미국 흑인 운동이 우리가 아는 그 모습일지 모르겠어요. 또 팔레스타인 사람들과의 연대가 앞선 시기의 남아프리카 연대와 마찬가지로 현 시기 모든 사회 정의 투쟁의 중심으로 인정돼야 해요. 앞선 시기에 우리는 관여한 방식은 달랐어도 모두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들고 일어났죠. 남아프리카와의 연대는 정녕 우리가 하고 있던 작업의 중요성을 재는 척도였어요. 우리가 여성 문제와 씨름했든, 교육 행동주의를 실천했든, 반억압 활동을 벌였든 간에요. 팔레스타인은 우리 시대의 남아프리카예요.

가야트리 스피박 오늘, 또한 로힝야족을 이런 식으로 생각합시다. 부디 로힝야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해 주세요. 그들은 어떤 연대도 표하지 못해요. 너무나 심할 정도로 교육받지 못했거든요. 이들은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몰라요. 남아프리카나 팔레스타인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물론 저도 BDS 운동의 일원이에요. 그렇지만 로힝야도 생각합니다. 누구도 진정으로 그들을 생각하진 않아요. 뭐라도 합시다. 마리아 도 마르 카스트로 바렐라Maria do Mar Castro Varela는 2월 26일에 베를린에서 훌륭한 컨퍼런스를 조직했어요. 그 덕분에 우리는 리스트에 그들의 이름―로힝야족―을 추가합니다. 오늘날, 본국 송환이라는 자기 고취적 약속들과 더불어, 우리가 염두에 둬야 하는 건 미얀마가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에요. 인도에서는 벵골 무슬림의 시민권이 취소되고 있고요. 어느 경우엔 심지어 인도 군대의 참전 용사도 시민권을 철회당했어요.

앤절라 데이비스 당신 말이 전적으로 옳아요. 로힝야족의 곤경을 가시화해야 한다는 꾸준한 강조에 정말로 고마움을 느껴요, 가야트리. 또한 사람들이 흔히 깨닫지 못하는 것 하나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들이 퍼거슨에서 시위에 참여했다는 거예요.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운동은 종종 흑인만의 운동으로 여겨지죠. 사람들은 2014년에 마이크 브라운이 살해된 뒤 흑인들만이 시위에 나섰다고 가정해요. 하지만 거기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었어요. 거기엔 라틴계 사람들이 있었죠. 거기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있었어요. 다인종적이었죠. 한편 이 기회를 빌려 ‘반흑인성’anti-blackness이라는 통념이 여행해 온 방식에 관해 한마디 하고 싶어요. 이 개념이 중요한 작업을 한다는 건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흑인이 인종주의에 종속된 가장 중요한 집단임을 가리키는 이 개념의 함의들에는 최대한 신중을 기하고 싶어요. 때로 ‘반흑인성’은 ‘유색인’ 범주에 대한 암묵적인 비평으로 사용됩니다. 유색인 공동체들의 ‘반흑인성’을 지적하는 데 말이죠. 물론 인종주의는 어디에나 있어요. 그리고 흑인도 반흑인 인종주의에서 자유롭지 않고, 또 인종주의에 기반해 여타 유색인에게 가해지는 이데올로기적 공격에서 면제되지 않아요. 그렇기에 흑인이 언제나 인종주의의 일차 표적이라는 가정에 신중히 접근해야 합니다. 반흑인성에 대한 논의는 종종 고통과 상처를 중심에 놓죠. 당연히 그것들은 사소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연대의 발전을, 우리가 이야기해 온 것과 같은 공감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벽을 세울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 입각점에서 말하건대 만약 미국 흑인 역사들의 중요성이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지속적인 자유 투쟁에 있다면, 흑인 투쟁들의 중심성은 흑인성보다는 자유와 훨씬 더 관계가 깊을 거예요.

가아트리 스피박 질문이 하나 있어요. 아프로-비관주의Afro-pessimism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에 대한 당신의 의견이 굉장히 궁금해요.

앤절라 데이비스 음, 지금 내용이 제 방식대로 아프로-비관주의를 말한 거라 할 수 있어요.

가야트리 스피박 아 그렇군요, 좋아요. 좋은 의견을 들은 것 같아요. 좋습니다, 좋아요, 저는 백 퍼센트 당신과 함께예요.

앤절라 데이비스 유럽의 많은 장소에서 이런 발상들이 빠른 속도로 여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가야트리 스피박 시작은 프랑스였조.

앤절라 데이비스 맞아요, 프랑스와 네덜란드였죠. 그리고 제 생각에 아프로-비관주의는 모종의 흑인 민족주의와 연결돼 있어요. 흑인 운동들이 언제나 따르는 입장인 듯이 보이는 민족주의와요. 우리가 아무리 다툼을 벌이더라도 정기적으로 민족주의에 굴복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언제고 돌아오는 것인 셈이죠. W. E. B. 두 보이스는 반제국주의가 민족주의보다 효과적이라고 주장했어요. 흑인 민족주의의 위험 하나는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작업이에요. 국가와 다툼을 벌이고 있다고 믿는 우리 다수를 통해 도리어 국민 국가 패러다임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작업 말이죠.

가야트리 스피박 그렇죠, 그것은 하나의 저항 대상이에요, 앤절라, 그래서 제가 약이자 이라 말한 것이고요. 저 피투성이 구조를 사용하려면 끊임없는 훈련을 거쳐야 해요. 끊임없이 그람시적인 영구 설득자가 되어야 하고요. 그럼에도 그건 막대한 해를 입힐 수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국가가 그와 비슷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서발턴 유권자층에 공을 들이는 우리에게는 말이죠.

니키타 다완 앤절라, 당신은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적이 있죠. 그러면서 어떤 계획을 세웠을 법도 한데요…

앤절라 데이비스 제가 당선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승리하는 게 의도도 아니었고요. 선거 과정을 파열하는 게 목적이었죠. 선거 정치가 정치 지형 전체를 차지할 수는 없음을 증명하는 것도요. 그리고 다른 경우라면 거론되지 않을 쟁점들을 선거 영역으로 끌고 오고 싶기도 했어요.

니키타 다완 그럼 만약 당선됐다면 당신은 무엇을 했을까요?

앤절라 데이비스 그건 공정한 질문이 아니에요. 무죄를 선고받기 몇 년 전―아시다시피 저는 세 건의 중죄로 기소되었고 세 차례 사형을 선고받았죠―에 만약 무죄가 된다면 보안관 선거에 나갈 거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요. 제가 수감 생활을 한 마린 카운티의 보안관으로요. 물론 농담이었죠. 그래도 저는 선거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뉘앙스를 살리는 방식으로 그래야겠지만요.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우리가 급진적 뿌리를 배신했다고 여겨요. 트럼프가 당선되기 전에 저는 사람들이 투표할 필요가 있다고, 투표소에 가서 트럼프에 반대해 투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어요. 한번은 [2016년에 텍사스 대학에서 열린 어느 컨퍼런스에서] 그 효과를 언급하기도 했어요.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할 수 없을 정도로 제가 나르시시스트인 건 아니라고요. 그 말이 온갖 소셜 미디어에 퍼졌고 저는 급진적 뿌리를 배신한 셈이 됐어요. 제가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하리라는 거였죠. 그래서 나머지 대담 시간 내내 힐러리 클린턴이 좋은 대통령감이 아닌 이유를 설명해야 했어요. 제 요점은 미국이라는 국가와 선거 정치 맥락 내에서 우리는 대단히 다른 종류의 급진적 정치 정당을 상상하고 세울 필요가 있다는 거였어요. 우리에게는 노동 계급의 이해 관계를 대표하는, 페미니즘적인, 반인종주의적인, 이성애적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이 모든 걸 펼치는 정치 정당이 필요해요.

가야트리 스피박 여기선 당신과 함께할 수 없네요.

앤절라 데이비스 좋아요. 그럴 수 있죠. 여기선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군요.

가야트리 스피박 저는 정당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앤절라 데이비스 당신이 옳아요. 저도 당신이 옳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는 다른 종류의 리더십을 보유한, 다른 종류의 구조를 갖춘 정당을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앞서 페미니즘적 리더십에 관해 우리가 나눈 논의가 하나의 정당 형성party formation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하나의 형성을 상상하는 걸 도울 수 있어요. 이 형성은 우리가 정치 정당으로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테고요.

가야트리 스피박 그렇죠,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저는 국가에 관해서도, 우리가 국가라고 알고 있는 것에 관해서도 동일한 종류의 논변을 펼치고 있고요. 그러니, 좋아요, 제 말은 다시…

앤절라 데이비스 당신이 우리와 함께일 거라고요?

가야트리 스피박 하나의 정당을 위해서요? 그건 아니에요. 왜 그런고 하니 당신이 미국에서는 “우리에게 …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국가에 관해 발언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인도는 사정이 다르거든요. 인도에는 열일곱 곳의 좌파 정당이 있고, 서벵골주에는 제2인터내셔널 공산주의가 있으며, M. N. 로이가 멕시코 공산당을 설립했고 등등이죠. 또 제가 프런티어 집단에게 지도받은 방식과 의회주의 좌파에 대한 극좌 정당의 비판도 있고요. 모든 곳이 똑같지는 않죠. 국가가 중심이 아니었던 어떤 식민화된 나라가 그런 것처럼요. 미국은 세계의 모델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국가별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예요. 방금 당신은 미국에서는 “우리에게 …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어요. 이는 좌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반면 인도의 경우 하나의 정당이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니 제가 당신과 대립하는 건 아니겠지만 제 신념을 거기에 두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그람시를 정말로 많이 좋아하지만 정당이 현대의 군주일 수도 있다는 그의 주장엔 동의할 수 없어요. 정당―그건 반국가 논거였죠.

앤절라 데이비스 하지만 우리가 하나의 형성―당신이 말한 것과 같은 영향을 국가에 미칠 수 있는―을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요? 그리고 물론 이것은 지금 미국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와 관련된 매우 실천적인 질문이에요.

가야트리 스피박 볼셰비키와 중국 공산주의자 들은 우리가 글로벌 남부라 부르는 걸 트리컨티넨트Tricontinent라 부르곤 했어요. 트리컨티넨트의 사례에서 누군가는 가장 광범위한 유권자층에 초점을 맞춰요. 정당들은 이들에게 정말로 나쁜 짓들을 벌이죠. 그러니 투표하도록 폭력적으로 등을 떠밀리고 있는 이 수백만을 위한답시고 하나의 대안 정당을 세우는 건 물고기를 잡겠다며 자전거를 가져오는 거예요. 아프리카에서 선거 캠페인 활동가들은 체계화되지 않은 모어들을 가지고 캠페인에 나서요. 그래서 선거 직전에 민족 폭력이 불거지죠. 그러니 누군가는 정당이 그 자체로 의문시되지 않는 선이 아님을 봐야 해요. 미국에서는 코넬 웨스트가 새로운 정당을 밀어붙이고 있어요. 좋은 일이죠… 저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에서 58년간 살았어요. 그래서 이런 요구가 어디서 유래하는지 이해해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미국의 문제 중 하나는 때때로 스스로를 세계로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급진파조차도 정당이 무엇이 될지를 [독단적으로] 판단해 버리죠.

앤절라 데이비스 당신이 전적으로 옳아요. 그리고 대부분의 삶을 미국에서 보낸 우리에게는 응구기 와 티옹오가 마음의 탈식민화decolonising the mind라 부른 것을 작업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활동가들조차, 급진적 활동가들조차 미국 예외주의에, 미국이 세계라 생각하는 경향에서 면제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미국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구체적 곤경을 협소하게―보편적으로가 아니라―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이 곤경은 세계 전역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만요. 앞으로 2년 동안 우리는 뭘 하게 될까요?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요? 어떻게 되든 그때 우리에게 또 다른 정당이 있지는 않을 거예요. 민주당이 대단히 잘해 낼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요.

가야트리 스피박 저는 월가 점령 시위에 관한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그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 왔거든요. 아주 대담하고도 거친 질문이죠. 그런데 그 글에서 저는 주 정부들이 오바마를 부추겨 2007년 위기를 해결하려 나서도록 만들었음을, 연방 의회 의사록이 대출 신드롬의 불안정화를 언급했을 때조차 오바마는 금융 자본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 말고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음을 이야기했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는 우리는 선거 정치가 더 이상 그 자체로는 어디서건 그 무엇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이해해야 해요. 이 정치를 여전히 사용해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요.

앤절라 데이비스 당신 말에 완전히 동의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해요. 저는 토착민 쟁점을 대화에 끌어오고 싶어요. 포스트식민성들에 관해 말할 때 분명 우리는 처음부터 식민화 과정의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저는 가야트리의 말을 듣고 있고, 대안 에피스테몰로지들에 관해 당신의 주장대로, 즉 사람들이 언제나 대안 에피스테몰로지들을 찾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려 애쓰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우리가 희망을 생성하길 원한다면 토착 우주론indigenous cosmology들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생전lifetime이라는 시간 길이 견지에서가 아니라 여러 세대 및 수백 년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많은 토착민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또 오늘날 우리가 하는 작업이 우리가 자유라 불러 온 것의 방향으로 운동하는 어떤 운동의 지속성을 어떻게 보장해 줄 수 있는지를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 우리는 생전에 그것을 성취할 것이라고 상정해선 안 되죠.

가야트리 스피박 하지만 다른 무언가도 말하고 싶네요, 앤절라. 저는 토착민―인도에는 300개가 넘는 소위 오스트로-아시아계 부족이 있죠―과 함께 작업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문화적 순응cultural conformity을 혁명적 비전과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돼요.

앤절라 데이비스 전적으로요.

가야트리 스피박 이것이 우리를 잘못으로 이끈다고 생각해요. 다시 말하거니와 전도에 의한 정당화죠. 우리의 이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그렇듯, 사회적 배제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비르붐에서 저화 함께 작업하는 이가 있어요. 고등학교 교사고, 약간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고, 기타 등등인 인물이죠. 그는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전 전통들을 수집해요. 그는 수집에 나섰고, 그러므로 그람시가 서발턴 지식인에 관해 말한 그것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자신은 노래를 지어요. 구전 전통의 노래를 배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배웠고, 그곳 사람들은 그를 한 명의 진지한 송라이터로 여기죠. 이렇게 그는 내부로부터의 이 문화적 순응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도입하고 있고요. 특히 젠더와 관련해서요. 그가 지은 구절 하나는 이래요. “우리는 강철 시타를 요구하네.” 이곳에 라마야나에 관해 뭐라도 아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지은 이 구절, 그들의 문화적 순응이 작업하는 방식에 부합하는 이 구절은 그들이 다르게 생각하도록 만들 거예요. 이들은 역사적 변화로부터 보호받지 못해요.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무언가예요. 생태적 사고 방식과 다른 의식 구조를 근거로 그들을 상찬할 때조차도요. 그렇지만 저 문화적 순응을 혁명적 의식 구조와 착각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되죠.

앤절라 데이비스 제가 제안하지 않으려는 건… 당신도 알다시피 이 대화는 끝없이 이어질 수 있을 거예요. 그저 저는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신자유주의에 어떻게 비판적일 수 있는지,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을 다가올 세대들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상상하는 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하고 싶어요.

가야트리 스피박 우리가 계획한 대로는 아니겠지만요.

앤절라 데이비스 그렇죠, 우리가 계획한 대로는 아니겠지만요. 1970년대에 우리는 우리가 혁명을 일으킬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 어디쯤 왔는지 보세요. 그럼에도 우리는 일정한 변화를 이뤘어요. 무언가가 일어났고 저는 이런 식의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을 생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1] 스피박은 1986년 이래 서벵골주에서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비문해자 달리트들을 위해 다섯 곳의 초등 학교를 세워 지역 교사들을 가르치고 훈련시켜 왔으며, 고등학생들도 코치해 왔다. 그는 세금의 용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의 지적 문제를 풀고자 애쓰는 장기적인 연구 과제: 공동체 기반의 교사와 감독관을 가르치고 교육함으로써 최대 유권자층을 이루는 매우 빈곤한 이들의 자녀를 민주주의 직관들에 삽입하는 것이 가능한가?”
[2] Karl Marx, “The Two Departments of Social Production”, in Capital: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2, trans. David Fernbach, London: Penguin, 1992, pp.471~474.
[3] 이 대담 이후인 2019년 5월 독일 하원은 “BDS 운동의 주장과 방법 패턴이 반셈족주의적”임을 천명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직) 구속력은 없지만 BDS 친화적인 집단에 대한 자금 지원 중단을 요청하는(‘독일을 위한 대안’은 이 집단들을 불법화해야 한다고 제안하지만) 이 움직임은 이미 독일 내부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담론에 상당히 유해한 효과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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