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은 개인사를 자신의 논의에 종종 포함하는 비평가입니다. 이는 자신이 어디서 왔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즉 자신의 주체 위치를 표시하는 시도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스피박의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살아온 여정에도 호기심을 품게 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인터뷰가 있어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안줌 카티알Anjum Katyal이 스피박의 여든 번째 생일을 기념해 기획한 인터뷰로, 올해 2월 인도의 ‘Scroll.in’ 지면에 게재되었습니다. Scroll.in의 허락을 받아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이 인터뷰는 스피박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해 학창 시절과 미국 유학생 시절을 돌아보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번역과 그의 학문적 여정을 짤막하게 회고합니다. 그뿐 아니라 페미니즘과 서발턴 계급, 마하스웨타 데비에 대한 그의 생각, 그가 인도 농촌에 세운 학교들의 의의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이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그는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끊임없이 이동해 온 사상가예요. 이제 여든이 되었고 그래서 죽음을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인터뷰 속 그는 여전히 힘이 넘칩니다.
홍콩에서 한국 여성 노동자들을 만난 일화나 그의 인도 학교에 얽힌 이야기들은 무척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목을 읽고 나면 커다란 벨트로 운전자와 자신을 결속하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농촌 마을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기가 어려울 거예요.
이 인터뷰가 스스로 “탈조직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르게 결정되어” 있다고 평하는 스피박과의 비평적 내밀함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길, 그리하여 «읽기»를 비롯한 그의 저작에 들어서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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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행복한 늙은 소녀예요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80세 생일 기념 인터뷰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안줌 카티알
리시올 출판사 편집부 옮김
이것을 탈구축해 보자: 1월 26일은 인도가 식민 지배에서 해방된 지 75년이 되었음을 기리는 공화국 건국 기념일이다. 나는 콜카타에 있고 콜카타는 저명한 ‘포스트식민’ 학자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교수의 고향이다. 그는 무릎 관절 수술을 받고 회복하기 위해 뉴욕시의 어느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우리는 컴퓨터 스크린을 이용해 얼굴을 맞대고 접속한다. 규격화된 푸른 (글로벌) 환자복 너머로 손으로 수놓은 (지역색이 매우 강한) 베이지색 숄이 보인다. 라즈나가르Rajnagar 지구의 블록[인도의 행정 단위] 개발 책임자가 그에게 선물한 것이라 한다. 라즈나가르 지구는 자르칸드Jharkhand주의 접경 지역으로 그가 세운 학교들도 이곳에 있다. 스피박 뒤편에는 진부하기 마련인 병원 벽면 대신 저 학교 건물 중 하나의 디지털 이미지가, 그가 선택한 욕망의 장소가 보인다.
다가올 여든 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직접 준비한 기표들이 겹겹이 쌓인 이 드라마틱한 배경을 뒤에 두고 그가 말한다. 이 대화가 이번 생일에 대한 여러 축하 인사 중 처음이라고. “제가 여든 살이 된 걸 축하해 준 첫 사람이 당신이에요! 기본적으로는요”라고 그가 말한다. “저를 정말로, 정말로 행복하게 만드는 건 제가 이렇게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에요. 저는 생일 파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저한테 생일 파티를 열어 주고 있어요.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여든이라니, 동그랗게 생긴 근사한 나이죠. 여기가 지금 제가 있는 곳이고요.”
우리는 충만히 살아온 어느 삶의 길고 구불구불한 여정을 여기부터 저기까지, 사실상 두서없이, 거닐어 보기로 결정했다. 굽이와 전환, 예기치 못했던 우회로 들을 따라, 경험과 기억에 흔적을 남긴 기념비적인 사건들마다 멈춰 서며. 그가 말하길 “우린 자유롭고 편하게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을 거예요―당신이 절 따라오면 제가 당신을 따라가는 식으로요”. 이 인터뷰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저는 우연찮게도 공화국 건국 기념일에 우리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당신은 독립 인도보다 다섯 살이 많은데요. 말하자면 자정 이전의 아이였던 것이죠. 여기서 시작해 볼까요?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제 어린 시절은 모든 면에서 정말이지 완벽했어요. 과거를 돌아보며 이제야 그걸 실감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가족이었어요.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대단히 많은 관심을 쏟았죠. 버나드 윌리엄스는 이를 도덕적 행운Moral Luck이라고 개념화했어요. 그런 부모님 슬하에 자란 것이 제 도덕적 행운임을 정말로 강하게 느껴요. 제가 살면서 뭐라도 이뤘다면 모두 어린 시절에 그토록 사랑받고 자란 덕분일 거예요.
제 어린 시절은 또 대가족이 끝을 향하던 시기이기도 했죠. 어머니 쪽 가족 집(즈난 마줌다르Jnan Majumdar의 집)이 저희 집이기도 했어요. 저는 큰삼촌인 프라툴 마줌다르Pratul Majumdar의 아이언사이드가Ironside Road 6번지 집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즈난 마줌다르 사라니Jnan Majumdar Sarani로 불리는 곳이죠. 제 할머니인 두둔Dudun, 라셰스와리 데비Rasheshwari Devi도 같이 살았죠. 할머니가 가장이었어요. 대가족의 일원으로 사는 건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었죠.
언젠가 크리스마스에 저는 자매에게 전화해 노래를 하나 불러 주었어요. ‘만백성 기뻐하여라’God rest you merry gentlemen라는 찬송가를요. 저희 둘 모두 위안comfort과 기쁨joy이 필요했거든요[‘만백성 기뻐하여라’는 ‘위안과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던 할머니가 배운 노랜데, 저희는 이 노래에 푹 빠져 많이도 불렀고 그러면서 무시무시한 신의 인도를 받는 아이로 변했어요. 나머지 가족과는 매우 다른 존재가 됐죠.
저희는 종교적인 집안이 아니었어요, 전혀요. 여기저기서 푸자puja[힌두교의 종교 의례]를 치르긴 했지만 종교적인 집안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이 노래(“네가 쥔 것을 조심해야 한단다, 작은 손이여”)를 불렀던 거죠. 제 자매와 제가, 크리스마스에, 자매는 델리에서 저는 뉴욕에서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배운 지 백 년 가까이 된 노래를요.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모든 게 제 어린 시절이었죠.
물론 그 뒤 나라가 독립했어요. 저희에게 독립은 소요였고 기근의 끝이었어요. 그런데 기술적으론 기근이 종식되었지만 기술적으로 끝났다고 해서 정말로 기근이 끝나는 건 아니죠. 불행히도 제가 경험한 독립은 소요와 기근이에요. 너무나 생생했고 또 폭력적이었던…
당신이 아버지에 관해 말했던 것이 기억나요. 의사였고 소요 기간에 도움을 나누었죠. 제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맞나요?
맞아요. 아버지가 나서서 집 문을 열어 주었고, 오늘날에는 저소득층 주택이라 불리는, 하지만 사실상 빈민가인 곳에서 무슬림들이 저희 집에 들어왔죠. 저희 집이 작은 편이라 엄청나게 꽉 찼던 게 기억나요. 여자와 아이 들은 아래층에 머물렀고 남자들은 위층 테라스에서 지냈죠.
아버지는 전적으로 비폭력적인 남자였어요. 총을 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분이죠.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하두 마마Hadu Mama(나중에 콜카타 시장이 되는 라젠 마줌다르Rajen Majumdar) 소유였던 더블 배럴 라이플이 집에 있었어요. 아버지는 쏘는 법도 모르는 라이플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가 이렇게 말했죠. “파레스 차크라보르티Pares Chakravorty가 살아 있는 한 아무도 여러분을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이건 상징적인 제스처에 가까웠어요. 그렇지만…
매우 중요하죠.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뒤 우리는 그가 “환상적인 경험”이었다고 말한 성 요한 교구 여학교St. John’s Diocesan Girls’ School에서 출발해 형성기라 할 학창 시절을 돌아보았다. 그 자신이 헌신적인 교사임을 감안할 때 그가 애정 가득한 존경심과 찬탄으로 회상하는, 그의 기억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이들이 여교사였다는 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얼마 전에 비노이 마줌다르Binoy Majumdar를 다룬 글을 하나 읽었어요. 그런데 이 글이 저에 관해서도 약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이 글은 저를 “수녀원 소녀”로 묘사하고 있어요. 이는 교구 여학교 소녀가 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죠. 그 학교는 수녀원이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전부 벵골 사람이었어요. 기독교화된 서발턴이었죠.
저는 부모님이 매우 현명한 분들이었다고 생각해요. 이 선생님들이 비범한 교사라는 걸 미리 알아봤거든요. 실제로 그랬죠. 선생님들은 상층 카스트 힌두와 잘 자리 잡은 엘리트 무슬림을 가르치는 건 통상적인 교육과는 다른 무언가임을 알아차리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분들은 마치 내일이 없는 듯이 가르쳤죠.
수십 년을 교사로 보낸 지금 와 돌아보니 그분들이 교사로서 얼마나 비범했는지, 그분들의 삶이 잘 가르치는 것에 얼마만큼이나 의지하고 있었는지 알겠어요. 교장이었던 차루발라 다스Charubala Das 선생님은 점점 더 제 롤 모델이 되었어요. 가슴에 걸린 커다란 호루라기로 학생들을 불러모으곤 했어요. 경이로운 분이었죠. 교구 학교 경험은 저라는 사람을 만드는 오랜 과정의 한 단계였어요. 저는 종종 말해요. 교구 학교가 절 만들었다고요.
그다음이 레이디 브라본 칼리지Lady Brabourne College예요. 1학년 때는 프레지던시 칼리지Presidency College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3학년이 되어야 그럴 수 있었죠. 제 학번이 졸업한 뒤에는 여학생들도 1학년부터 입학할 수 있게 됐지만요. 브라본 생활도 제겐 환상적인 경험이었어요. 모든 선생님이 고취된 여성 교사였거든요. 그중에서도 제 눈에 정말로 돋보였던 분은 수쿠마리 바차타르지Sukumari Bhattacharjee 선생님이었어요. 저희에게 영어를 가르치셨죠. 나중에는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치셨고요.
그분은 산스크리트어로 이샨 장학금Ishan Scholarship을 받지 못했어요. 기독교인이었거든요. 제7일 안식일 재림파였죠. 그리고 조소의 제스처로 그 뒤 다시 이샨 장학금을 받았어요. 이번에는 영어로요! 탁월하고 자신감 넘치며 무심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여성에게 영어를 배운 경험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선생님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더 놀라웠던 건 자신의 아름다움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였어요. 외면에는 전적으로 무심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죠. 오직 내면의 삶에만 집중하는 분이었어요.
1956년에 절 토론 대회에 내보낸 것도 수쿠마리 선생님이었죠.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어요. 저 애가 토론할 줄 아는지는 모르지만 영어는 굉장히 잘한다고요. 그러니 저 애를 내보내라고요. 그렇게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열린 토론 대회에 나갔고 우승했어요. 모두가 놀랐죠. 열네 살이었거든요. 상으로 차 테이블에 올려놓는 책을 받았던 게 기억나요. 그걸 껴안았던 것도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발리건지 파리Ballygunge Phari에 내려 혼잣말했던 것도 떠오릅니다. “히히! 내가 일등이라니! 일등을 했다고!”
그때 절 따라온 사람이 있는데요. 그 남자애는 제가 어디 사는지 알고 싶었대요. 나중에 그가 말하길 제가 책을 껴안고 기쁨에 가득 차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대요. (웃음) 그런 아름다운 나날이었어요.
10대였던 그가 당대의 우수 교육 기관인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보낸 경험은 복합적이었다. 앞으로 보겠지만 뜻밖의 기쁨과 우연이 인생 행로에 여러 차례 끼어들어 그의 진로를 굴절시켰다. 프레지던시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것도 그런 경우였다.
저는 이과 학생이었어요.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었고요. 물리학 입학 시험은 통과했는데 수학에서 떨어졌어요. 물리학과에 가지 못했죠. 그래서 이렇게 생각했어요. 좋아, 중간 고사에서 영어로 1등 했으니까 영문과에서 날 거부할 수는 없을 거야. 수쿠마리 선생님을 대표했던 영어가 이제 저도 대표하게 된 거예요! 저는 영문학 전공으로 들어갔고 2주 만에 이게 딱 제 전공이라는 걸 알게 됐죠.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있나요?
그럼요. 타락 나트 센Tarak Nath Sen이 있었죠. 얼마 전에 그에 관해 뭔가를 쓰기도 했어요. 모두가 그를 흠모했죠. 하지만 의도론의 오류Intentional Fallacy, 즉 누구도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을 실제로 대표하지 않는다는 저 냉전 이데올로기에 그가 표한 경멸을 저희가 이해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최근 저는 그의 글을 몇 편 다시 읽었어요. 그가 얼마나 비범한 남자였는지 깨달았죠. 그는 정말로 저희에게 읽기를 가르쳤어요. 여러 면에서요.
또 수도브 선생님도 있었네요. 수도브 찬드라 센굽타Subodh Chandra Sengupta 선생님은 산스크리트어 문헌들을 경유해 버나드 쇼 등등을 분석한 지식인이었어요. 아말 선생님―아말 쿠마르 바타차르지Amal Kumar Bhattacharji―도 있었고요. 그때 저희는 이들을 [손위 사람을 뜻하는] 다다dada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모두 [선생님이나 씨를 뜻하는] 바부babu였죠. 또 셰익스피어를 대단히 훌륭하게 가르쳤던 타라파다 선생님―타라파다 무케르지Tarapada Mukherjee―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 탁월한 교사들에 대한 따스한 기억은 다른 면에선 훌륭했던 이 기관, 그가 열여섯 살이던 1957년부터 열아홉 살이 된 1961년까지 재학한 이 기관의 특정 측면에 의해 빛이 바랜다. 애정 넘치는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들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이 10대가 여자로 존재하기의 부정적 함의들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프레지던시 칼리지는 제게 매우 중요했어요. 하지만 불행히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젠더 멸시를 의식하게 됐죠. 갈수록 저는 선생님들이 제 외모가 괜찮아 저를 예뻐한다고 느꼈어요. 정작 총명했던 건 SS라는 남학생이었거든요. 집에서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었어요. 제 어머니부터가 철두철미하게 지성적인 분이었거든요.
프레지던시 칼리지는 저를 지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어요. 지금도 그 불안정성에 시달리고 있고요. 부조리하죠. 제가 훌륭한지 형편없는지 제가 말할 계제는 아니지만 불안정하다고 느낄 까닭은 없거든요! 그런데도 그래요. 이걸 극복하지 못했고요.
나는 1961년부터 시작된 그의 미국 대학 시절이 궁금했다. 콜카타 출신의 이 젊은 여자에게 캠퍼스 생활은 무엇이었을까? 매우 강렬한 시기였다.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민권 운동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으며 중등 학교와 대학 교내가 인종 분리에 반대하는 투쟁의 심장부가 된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국제 관계도 긴장투성이였다. 이 해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고 피그스만 침공이 발발했으며 미군의 베트남 주둔이 시작되었다. 그처럼 영리한 젊은 여자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시기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할 법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어요”라고 그는 말한다.
린든 존슨이 이주 쿼터제 폐지와 외국인 등록제 등등을 개시하기 4년 전이었죠. 이때는 이른바 문화 차이 전통이 없었어요. 이주자들이 자신의 고통 등을 아름다운 필치로 쓴 소설도 없었고요. 레이먼드 윌리엄스라면 이렇게 말할 텐데, 소설이란 무엇보다 감정 구조들을 수립하죠. 그래서 그때 전 제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어요. «타임»지를 읽었으니까요! 아무 문제도 느끼지 못했어요. 고작 열아홉 살이었잖아요.
이어 추가적인 우연이―원한다면 도덕적 행운이라고 말해도 좋을―이어져 그의 학문적 미래로 그를 이끌었고, 이는 그에게 어마어마한 학문적 명성을 안겨 주었다. 그가 비교 문학으로 옮겨 간 다음 자크 데리다의 프랑스어 저작을 번역한 것이다.
코넬 대학에 다니고 있었어요. 겨우 스무 살이었고요. 아무런 재정 지원도 받지 못했고 조교도 할 수 없었어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요. 그땐 폴 드 만이 새로운 비교 문학 프로그램의 학과장으로 임명된 직후였어요.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재정 지원 자리를 하나만 빼고 모두 채웠어요. 그는 신임이었고, 재정 지원 자리를 전부 채우지 못하면 그의 신용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예요. 또 재정 지원이 끊길 수도 있었고요.
그러니 제가 적당한 리스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죠. 제가 제대로 해내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문화 차이 탓으로 돌릴 수 있었으니까요. 그가 그 자리를 원하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그렇다고 답했어요. 물론이라고요! 제겐 취업 허가증도 돈도 없었어요. 강제 추방되기 직전이었죠. 그래서 그렇다고 답한 거죠. 그렇게 비교 문학과에 가게 됐고요!
그는 제게 할 줄 아는 외국어가 있느냐고 물었어요. 영어를 할 줄 안다고 답했더니 영어는 외국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콜카타에 있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프랑스어를 한 학기 배웠고, 또 어느 벵골 자유 투사의 독일인 부인이었던 바두리 여사에게서 독일어를 석 달 배웠다고 말했어요.
그리고 여기서 다시 한번 우연이 끼어드는데, 그 뒤 프랑스어에 정통해진 그가 완전히 낯선 저자가 쓴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된 것이다.
그때 저는 아이오와 대학의 조교수로 있었어요. 어쩌다 제목이 매우 매력적인 책을 발견했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라는 제목이었어요. 저자도 굉장히 생소했어요. 충동적으로 그 책을 구입했죠.
1967년이었어요. 저는 스물다섯 살이었고요. 몹시 어려운 프랑스어를 구사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책이 매우 훌륭하다는 걸 알아챘어요. 이 책에 관해 뭔가를 쓰고 싶었죠. 하지만 무명의 조교수가 무명의 남자―저는 데리다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가 쓴 책에 관해 써 봤자 아무 소용도 없으리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뭘 할 수 있을지 궁리했죠.
그 뒤 매사추세츠 대학 출판부에서 번역서들을 출간하다는 소식을 접했어요. 좋아, 이 책 번역을 제안해 보자, 그리고 논문 양식의 해제를 싣도록 허락해 줘야 번역할 거라고 말하자, 라고 생각했죠. 생각한 대로 제안했고 출판부에서도 크게 반겼어요. 제게 기회를 줬죠. 이렇게 시작된 거예요. 저는 그가 누군지 몰랐고, 제가 그를 번역한다는 걸 아무도 몰랐어요.
출간되자마자 제 해제는 한 편의 고전으로 여겨졌어요. 저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저는 제가 그 책에서 저항에 관한 논의 다수를 놓쳤다고 생각해요. 또 정보학Informatics에 대한 그의 논의도 굉장히 많이 놓쳤고요. 그 논의가 무척 중요한데도 말이에요. 영어권 독자 대중은 대부분 이 논의를 살피지 않아요. 그건 분명 제가 해제를 썼기 때문이고요. 그래서 저는 그 해제를 유감스럽게 여겨요. 그럼에도 그 글은 아이콘이 되었죠. 저만의 삶을 가졌고요. 그 글이 프랑스어로도 번역됐다고―확실히는 모르지만―알고 있어요. (생글거림)
당신은 저자를 언제 만났나요? 첫 만남을 기억하나요?
그럼요. 4년 후인 1971년에 그를 만났어요. 그는 마흔하나였고 저는 스물아홉이었죠.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만났어요. 힐리스 밀러가 절 강연자로 초청했거든요. 그가 말했죠. 가야트리, 당신은 이 남자를 만나야 해요. 저는 대답했어요. 당연히 그래야죠, 저도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힐리스가 저를 강연자로 초대한 것이죠. 데리다도 그 강연에 왔어요. 저는 그가 청중석에 앉아 있다는 걸 몰랐고요. 그를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거든요. 강연을 마치고 힐리스가 데려간 파티에서 그를 만나고야 그게 그였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와 직접 대면한 기분이 어땠나요?
그가 상당히 놀랐던 것 같아요. 자신의 책 옮긴이가 그렇게나 이국적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저 시절에 사리를 입은 여자는 글로벌 지식인이 아니었죠. 무슨 뜻인지 아시리라 생각해요. 다른 한편 일단 만난 뒤에는 제가 이국적인 사람이 아님이 분명해졌어요. 그는 대단히 근사했고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됐어요.
그 뒤 당신은 학계의 스타덤에 올랐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학자 중 한 명’ 같은…
아 그건 데리다였어요. 저는 아니었죠. (웃음) 제가 유명해진 건 데리다를 번역하고 해제를 쓴 덕이었어요.
그건 과도한 단순화 같습니다. 당신의 작업이 훌륭하지 않았다면 서투른 불발에 그치고 말았겠죠. 당신이 얼마나 엄밀한 학자인지는 저도 알아요. 당신의 작업은 최고 수준의 온전함integrity을 갖추고 있어요.
그렇죠, 저는 제가 온전함을 절대적으로 내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학자는 아닐지언정 제가 하는 일에, 가장 넓은 의미에서, 잘못된 건 전혀 없으니까요. 이만큼의 세월을 거치면서 그렇게 내세울 수 있게 됐어요.
대단한 학자는 아니라고? 이것이 그의 불안정함을 논하는 자리였던가? 그는 인문학계에서 제일 앞에 놓이는 지식인 중 한 명이고, 견고한 작업들에 기반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오히려 사람들은 그가 어느 정도는 너무 지성적이라고, 무디고 빽빽하며 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여기지 않는가.
그렇지만 이런 솔직하고 비판적인 평가가 그의 특징이다. 이 평가는 그가 학문적 여정의 다음 국면을, 그중에서도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과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두 편의 글―“데리다에 대한 제 작업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명성을 안겨 준―을 숙고할 때 다시 주제로 떠올랐다.
이 글들에는 저만의 한계가 있어요. 그 한계들은 메트로폴리스에 온 디아스포라 비평가에게 있어 전형적인 위기 지점crisis point이었죠(저는 여전히 인도 시민이고, 서류 작업에 의해 디아스포라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한 명의 시민은 단순히 서류 작업이 아니고요). 제 위기란 제가 외국의 것들에 대한 전문가가 되고 있었다는 거예요.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 비판>은 발견에 관한 글이에요. 예전에 수차례 읽은 텍스트들에서 식민주의의 표식을 발견하는 글인 거죠. 그 글에서 제가 놓친 것, 알아채지 못한 건 노예제의 표식이에요. 중심 텍스트로 삼았던 «제인 에어»의 로체스터는 자메이카의 설탕 플랜테이션과 노예 수천 명을 소유한 인물이에요. 그 시점의 영국 역사를 세심하게 들여다봤다면 단순히 식민주의의 표식이 아닌 저 표식을 알아봤을 거예요.
지금 저는 식민주의 연구가 노예화 연구와 완전히 분리된 것에 커다란 애석함을 느껴요. 그런데 저 텍스트가 유명해진 건 바로 누군가의 공모를 보지 않고 단순히 “저들은 나쁘고 우리는 선해”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이죠. 이 글은 여전히 많이 인용되고 있어요. 이 글이 저를 서발턴 연구Subaltern Studies 회로로 내던졌고 또 제게 데리다에 대한 작업을 넘어서는 명성을 안겨 주었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훨씬 더 큰 위기의 산물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제가 프랑스 이론과 탈구축 전문가가 되었다는 위기 말이죠. 저는 거기서 빠져나오고 싶었어요. 제 할머니의 자매인 부바네스와리 바두리를 선택해 빠져나왔죠. 그리고 그 글을 편집자에게 보내―제가 수없이 되풀이한 스토리예요―글이 너무 길어졌다고, 너무 어려워졌다고, 덜어 내게 도와달라고 이야기했어요. 편집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초고 상태 그대로 출간했어요. 사람들은 글이 너무 길다며, 너무 어렵다며 불만을 표했고요!
편집 의무를 완전히 방기한 셈이었어요. 비록 터무니없을 정도로 오해받지만―너무 길고 너무 어려우며 제가 거기서 말하고자 애쓴 바를 사람들이 이해하지 않으니까요―그 글은 다른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데리다와 관련되지는 않는 모종의 명성으로 절 밀어 넣었어요. 물론 그와 동시에 데리다주의자들, ‘탈구축 수행원들’은 제가 자신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저는 프랑스에 관한 걸로 박사 학위를 받지 않았고 이방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절 ‘제3세계’로 만들려고 애썼죠.
그렇게 그는 한 명의 ‘이방인’ 탈구축주의자, 진화하는 포스트식민 비평가가 되었고, 뿐만 아니라 마하스웨타 데비Mahasweta Devi의 벵골어 소설 영역자이기도 하다. 그는 번역을 어떻게 느낄까? 더 많은 번역 작업을 원할까?
번역은 고된 노동이죠. 그들[시걸 북스 출판사]은 제 여든 번째 생일에 맞춰 제 번역에 관한 책을 묶으려 해 왔어요. 저는 거듭 얘기해요. 번역이란 가장 내밀한 읽기 행위라고요. 그냥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죠. 데리다 다음에 저는 마하스웨타 데비의 작품을 번역했어요. <드라우파디>를 번역해 보면 어떻겠냐고 라나지트 구하가 제안했거든요.
그렇다면 마하스웨타 작품 번역이 당신 경력에서 그다음 이정표인 건가요?
설마요! 국제적인 경력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았죠. 제가 마하스웨타 번역을 즐긴 건 분명하지만 그게 제 작업의 중심은 아니었어요. 저는 데리다의 작업과 더불어 더 나아갔고, 그걸 이해하려 애쓰면서 철학과 문학―그리고 세계 일반―을 향한 어떤 접근을 발전시켰어요. 이 접근은 그의 사유에서 비롯한 것이죠.
이 비범한 두 여자는 여러 면에서 굉장히 다르지만 또 수많은 특징을 공유한다. 특히 두드러지는 건 둘 모두 가부장제의 비승인이 가하는 가혹한 공격에 맞선 굳건한 방어를 힘겹게 얻어 냈다는 것이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발전한 긴밀함과 유대를 봤고, 또 점점 더 벌어지는 거리도 봤다. 그가 이에 관해 이야기할지 궁금했고, 그는 말해 주었다.
당신을 시걸 북스 사무실에서 만났던 게 기억나요. 마하스웨타 자매Mahasweta di에 대한 작업 때문에, 그리고 물론 당신의 학교들 때문에 여행차 이곳에 왔을 때였죠.
마하스웨타 자매와 제 관계는 고통스러운 관계였어요. 저로서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 무언가죠. 그를 만났던 게 지금도 아주 기뻐요. 그래도 특이한 관계였죠. 여러 면에서 마하스웨타 자매 역시 [저처럼] 대단히 재능 넘치는 부모 슬하에서 굉장히 애정 가득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죠.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정말로, 정말로 다르게 컸어요. 마하스웨타 자매는 끝까지 [아버지인] 마니시 가탁Manish Ghatak의 금지옥엽으로 남은 반면, 저는 제 가족의 경계들에서 확연하게 벗어났거든요. 그리고 정말이지 저는 누군가를 숭배하는 사람이 못 돼요. 그의 주변에는 숭배자로 구성된 커다란 서클이 있었죠. 저는 거기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던 적이 결코 없고요. 그래서 특이한 관계였다는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왜 그랬는지는 전적으로 이해하지만―제 학교들을 지원할 수 없었어요.
그의 학교들. 참된 교육에 대한, 독립적인 정신이자 한 명의 개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깊은 신념으로 세운 이 학교들은 점수와 등수, 시험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곳이다. 다시금, 그의 중심부에서 유래한 무언가, 그로선 되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던 교사.
학교들을 실제로 설립한 건 해당 지역의 청년 활동가였던 프라샨타 락시트Prashanta Rakshit가―아무 도움 없이 온전히 제 힘으로 그곳에 갔을 때―제가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는 걸 알아차린 덕분이었어요. 그게 제 방식이었죠. 아마도 제가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음? 샤란티! 왜 당신 이름을 그렇게 쓰나요? 당신은 이 ‘i’를 써야 해요.” 아니면 잔가지를 하나 들고 먼지 속에서 쉬운 숫자 문제를 풀어 줬을지도요.
그래서 그가 제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죠. 선생님, 단순히 돈을 주는 대신 이곳에 학교 두어 곳을 세우면 어떨까요? 그렇게 제가 거기서 작업하는 동안 그들 자신의 힘으로 학교를 만들었죠. 그곳들은 갖가지 정치적인 이유로 문을 닫았어요. 저는 푸룰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20년간 벌인 작업을 잃었어요.
저는 마하스웨타가 그들을 제게 소개해 준 걸 정말 감사하게 생각해요. 마하스웨타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그 지역에 들어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학교들은 그가 염두에 둔 무언가도, 심지어는 지원할 만한 무언가도 아니었어요. 물론 그도 작은 학교 건물들 일부를 지었죠. 여러 지역에서 돈을 모으고 자금을 지원받는 식으로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한 그가 학교 내부에 있었던 적은 없어요. 그리고 마하스웨타 자매는 저를 지원하기 위해 나서지 않았고요.
하지만 전적으로 이해해요. 그로서는 농촌 지역에서 확립된 어떤 연합을 저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절 도울 수 없었던 거죠. 그러니 우리의 관계는 별난 관계였죠.
저는 막 그의 <프테로닥틸, 푸란 사하이, 피르타>Pterodactyl, Puran Sahay, and Pirtha에 관한 또 다른 글을 탈고한 참이에요. 분명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죠. 제 에세이는 라다 차크라바르티Radha Chakravarty가 편집한 선집에 포함돼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출간될 거예요. 당신도 이 글을 꼭 읽으면 좋겠어요.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성장했고 이 작품은 또 제 안에서 얼마나 성장해 왔는지 보려면요. 제가 번역한 적 없는 글이 하나 있어요. <자고모한의 죽음>Jagomohaner Mrityu이라는 글인데 코끼리를 다루죠. 후! 저로선 이런 작품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요. 그가 쓴 특정 텍스트는 정말이지 환상적이죠.
그는 여러 면에서 비극적인 인물이에요. 취약한 인물이고요.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그렇게 여기지 않아요. 그들은 그를 어떤 다른 유형의 영웅적 인물로 보죠. 조만간 사람들이 마하스웨타의 리얼리티를 다소 다른 식으로 생각하게 될 거라고 믿어요. 그렇지만 저와 그의 관계는, 아까 말했듯, 고통스러운 관계였죠.
여기서 그가 한 명의 페미니스트, 한 명의 활동가라는 주제로 옮겨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가야트리 자매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아니나 다를까 우리는 예상외로 홍콩에서 광둥어를 배운 것으로 시작한다. 뭐 어떤가?
1984년부터 홍콩에 자주 갔어요. 한때는 홍콩 과학 기술 대학에서 가르쳤고 그러려면 광둥어를 배워야 했죠.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저는 언제나 활동을… 음, 판매를 위한 무언가로,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지 않는 활동가였어요. 그래서 늘 저 측면에, 나중에 창의적 행동주의imaginative activism라고 부르게 된 저 측면에 초점을 맞췄죠.
그곳에 한국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어요. ‘종신 비정규직’permanent casual이었고 절대로 노조에 가입할 수 없었죠. 이들은 다니던 기업에 저항해 일부 혜택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어요. 그 기업은 미국에서 막대한 장학금 등등을 운용하던 곳이었죠. 그러니 제일 아래쪽에서는 한국 여성 노동자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억압하고 제일 위쪽에서는 ‘청년들을 돕자’ 따위를 한 거죠. 대단히 전형적인 현상이고요.
그때 저는 홍콩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카오룽에는 환상적인 저널이었던 «아시아 레이버 모니터»Asia Labour Monitor 사무실이 있었어요. 저는 그 사무실에 찾아가 양쪽 끝에서 고통받는 여자들이 어떻게 여자로서 저항할 수 있었는지 정말로 파악하고 싶다고 말했죠.
거기 있던 노동자 한 명이 제게 말하더군요. 스피박 교수님, 누구도 그런 걸 물은 적이 없어요. 이 여자들이 이렇게 작업하도록 만든 이들의 정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아요. 당신이 진정 그들과 가까워지고 싶다면 광둥어를 조금이라도 배워야 해요. 왜냐하면 우선 당신은 그들 가슴의 언어로 그들에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그들이 당신보다 무언가를 더 잘 알 터인데 이는 당신이 그들이 하는 일뿐 아니라 광둥어를 결코 더 잘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관계를 전환할 거예요.
그들이 제게 뭘 해 준 건지 생각해 보세요. «아시아 레이버 모니터» 사무실에 있던 여성들이 말예요! 어디서부터 사태들을 배울 수 있는지 알려 준 거예요! 진정으로 저는 대단히,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를 배웠고, 여전히, 예를 들어 제 학교들에서, 그 배움과 더불어 작업하고 있어요. 행위 능력을 서발턴 수중에 쥐여 주는 것을요. 이것이 매우 중요하죠.
당신은 또 우리 시대의 가장 놀라운 일부 페미니스트 및 활동가 여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앨리스 워커와 가깝고 주디스 버틀러와 아는 사이죠. 다른 사람도 많고요.
‘페미니즘’―이 단어는 사람들이 하나의 진정한 레퍼런스 없이 사용하는 일종의 약칭이죠. 페미니즘에는 지도자가 없으니까요. 마르크스주의에는 마르크스가 있죠. 페미니즘에는 아무도 없어요. (생글거림)
처음부터 제 안에 있었던 하나의 페미니즘 흐름이 있어요. 제 어머니가 언제나 스스로의 힘으로 행동한 분이었거든요. 제가 열다섯 살 때 어머니가 저한테 얘기했어요. 그때 저는 프레지던시 칼리지에 막 입학했고, 키가 큰 소녀였어요. 외모도 훌륭했고 좋은 집안에서 자랐죠. 아버지는 2년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마흔세 살의 벵골 과부였어요. 어머니가 스물여덟 살에 절 낳았거든요.
어머니가 그러더군요. 있잖아 가야트리, 중매 결혼이 꼭 나쁜 건 아니란다. 어머니는 벵골어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진지할 때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벵골어로 말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어머니의 벵골어 수준을 감안할 때 어머니가 사용한 단어들을 ‘리비도적 선택’ 정도로 번역할 수 있어요.
어머니가 말했어요. 사람들의 리비도적 충돌들, (이른바) 사랑에 빠지는 것, 그 선택이 반드시 하나의 선택인 건 아니야. 괜찮은 중매 결혼을 하면 부모가 아이의 미래에 무엇이 좋을지 찾으려 세심하게 노력을 기울인단다. 수없이 많이 조사하지. 그건 무엇보다 하나의 사회 계약이거든. 중매 결혼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모가 자녀를 충분히 잘 알아서 어떻게 하면 자녀가 행복할지를 아는 거야.
그런데 너는 이미 가족 바깥의 삶을 가지고 있고, 나는 어떻게 하면 네가 행복해질지 몰라. 나는 중매를 설 수 없어. 상상해 보세요. 어머니는 또 제게 몸을 돌봐야 한다고―수영, 운동―이야기했어요. 저 시절엔 상당히 드문 조언이었죠. 사람들이 어머니 앞에서 저를 비난하면서 제가 정말로 어머니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을 때―아시다시피 저는 남편이 없었고 아이도 없었으니까요―제 어머니는 저한테 말했던 것처럼 말했을 거예요. 먼저 가야트리에 관해 말할 권리를 얻고, 그런 다음에 제게 말하세요, 라고요. 페미니즘의 손길.
또 하나 말해야 할 게 있어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한 명의 지식인임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아버지는, 물론 이렇게 대조하는 건 무리지만, 어머니가 자신보다 똑똑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줄 알았어요. 어떤 종류의 감정도 느끼지 않으면서요… 이것이 제가 거주했던 일종의 원형적 페미니즘 상황이에요. 프레지던시 칼리지에서 있었던 일들은 앞서 얘기했고요.
그 뒤 저는 학계 페미니스트 1세대의 일원이 되었고 주디스 버틀러, 베티 프리단, 제인 마커스, 글로리아 스타이넘―모두 훌륭한 인물이고 일반적으로 말해 리버럴 페미니스트죠―와 친구가 됐어요. 그리고 이들과 함께일 때 우린 모두 평등했어요. 베티 프리단이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합당한 이유로 저보다 훨씬 유명했지만 그들과 함께일 땐 저도 평등했어요. 이 감정이 제 페미니즘에 매우 큰 흔적을 남겼죠.
그리고 다른 유형의 페미니즘은 방글라데시 쪽에 있었어요. 파리다 악타르Farida Akhtar―파리다와 저는 1994년에 카이로에서 열린 유엔의 첫 NGO 포럼에 그의 NGO였던 프라바르타나Prabartana 회원으로 참석했어요. 매우 다른 종류의 경험이었죠. 파리다와 함께 저는 특정 유형의 벵골 페미니즘에 아주 능동적으로 참여했어요. 그때 서벵골 페미니즘에 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고요. 그래서 현재 뉴욕 타임스에서 일하는 저널리스트인 소미니 센굽타Somini Sengupta의 이모와 함께 사우스 24 파르가나스South 24 Parganas부터 마디암그람Madhyamgra 등지까지 내내 걸었어요. 이것도 환상적인 경험이었죠.
제가 인도 페미니즘을 논할 계제는 아니에요. 인도에도 매우 강력한 페미니즘 운동이, 여자들의 운동이 있지만 이 특정한 현상과 많은 연계를 맺지는 못했어요. 저는 그 운동을 흠모해요. 할 수 있다면 합류할 거고요. 하지만 제 두 측면은 우선 방글라데시를 통한 글로벌이고 다음으론 미국 학계 페미니즘 2세대 혹은 1세대예요. 특이한 조합이죠.
그가 피곤함을 느낀다. 마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이야깃거리―그리고 웃음거리―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이제 여든 살이 되는데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고.
두 보이스를 다룬 책 집필을 마무리하려 애쓰고 있어요. 생각보다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하지만 반드시 그 책을 마무리해야 해요. 그를 이해하려 애쓰고 또 애써 왔어요. 실제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제목이 몹시 생경해요. ‘내 형제 버가트’거든요. W. E. B. 두 보이스, 윌리엄 에드워드 버가트 두 보이스니까요. 그가 버가트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경위가 정말로, 정말로 흥미로워요. 그래서 이 책을 그렇게 부르고 있어요.
또 우리는 벵골어 대역 판본들을 만들고자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어요. 여전히 재정을 확보하려 노력 중이죠. 매우 짜릿한 프로젝트고, 이걸 기대하고 있어요.
‘글로벌리티를 방출하기’Radiating Globality라는 프로젝트도 있네요(세네감비아와 프랑스령 인도에서 소위 글로벌화의 전사前史들). 락슈미 수브라마니안Lakshmi Subramanian과 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결합한 프로젝트죠. 작고한 하리 바수데반Hari Vasudevan도 함께했고요.
그리고 제 학교들이 있어요. 비상하기 시작한 곳들이죠. 저는 인지적으로 파괴된 지성들이 어떻게 하면 일반화할 수 있는 지성으로 빚어질 수 있는지, 가장 광범위한 유권자층이 어떻게 하면 투표하는 법을 깨우칠 수 있는지, 오늘날의 거대한 기후 재난 시대에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인 동시에 아마도 그런 피해를 가장 받아서는 안 되는 사람임을 어떻게 하면 이들에게 이해시킬지를 파악하려 애쓰면서 배워 왔어요.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정말 그래요.
그렇게 많은 변화를 낳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저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어떤 식으로 당신들과 접촉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당신들을 대해 온 방식이 있으니까요. 다른 한편으로 나는 당신들을 낭만화하고 있지 않아요. 프레이리가 말했듯―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모든 걸 이야기해요―피억압자는 하부 억압자가 되고 싶어 하니까요. 그러니 당신들도 우리만큼이나 탐욕으로 가득하죠. 그런데 우리는 도덕적인 격분을 느껴요. 왜냐하면 우리에겐 돈이 있거든요. 당신들은 돈벌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탐욕을 통제할 수 없죠.’ 우리는 이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요.
이런 유형의 프로젝트들이 제게는 너무 중요해 여전히 가능한 한 자주 그곳에 가요. 아직은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을 수 있어요. 이젠 너무 늙어서 73인치짜리 큰 사이즈 벨트를 하나 샀지만요. (생글거림)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을 때 떨어지지 않도록 운전자와 저를 결속하려고요.
저는 시차를 심하게 타는 편이에요. 그래서 짐을 콜카타에 던져 놓고 [오토바이에 앉아] 출발해 목청껏 노래를 불러요. 잠들지 않으려고요. 그래 봤자 도움은 안 되지만요. 이 벨트를 가져갔더니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수닐 로하르Sunil Lohar가, 그곳 사람들이 “육중한 오토바이 운전사”라고 부르는 (웃음) 그가 말하더군요. 이거 좋은데요. 저는 늘 선생님이 뒤에 앉아 있다가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어요. 이제 이 벨트로 동여매면 되겠네요.
이제 여든이에요.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죠. 계속 살아 있고 싶어요. 저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린 현실주의자가 되어야겠죠. 시간이 얼마 없다는 기분이 이 기획들에 일종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또 제 삶을 채워요. 저는 행복한 늙은 소녀예요. (생글거림) 쓸모 있고자 노력하면서 행복함을 느꼈죠.
이것이 우리의 맺음말이 되었다. 나는 벨트로 운전자와 자신을 단단히 동여매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미지의 것을 향해 달리며 목청껏 노래 부르는 그의 이미지를 간직한다. 생일 축하합니다. 여든 살의 록스타인 당신. 언제까지고 “행복한 늙은 소녀”로 남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