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의 우울, 신자유주의, 피투자자라는 조건

오늘은 «피투자자의 시간»에 진입하기에 앞서 읽어 볼 만한 인터뷰 하나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피투자자의 시간» 출간 후에 미셸 페어가 웹진 «퍼블릭 세미나»Public Seminar와 나눈 짧은 인터뷰로 이 책을 집필한 동기를 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지은이 미셸 페어와 «퍼블릭 세미나»의 허락을 얻어 번역문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원문 링크: Left Melancholy, Neoliberalism, and the Investee Condition

이 인터뷰에서 페어가 말하는 동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처음에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자유 방임으로의 귀환으로 여겼지만 신자유주의는 국가에 시장 관계를 활성화하고 기업가적 주체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 귀결을 분석하는 것이 하나의 동기라 할 수 있어요.

둘째, 일부 좌파는 신자유주의 이전의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로 돌아가려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향수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날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빚은 주체성을 전유해야 한다는 것이 페어의 중요한 주장입니다.

셋째, 위의 둘 모두 미셸 푸코 덕분에 가능해진 논변이지만, 페어는 또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 1979년의 푸코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웠던 어긋남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자유주의 이론/정책의 의도와 결과, 즉 신자유주의와 금융화 사이에 무거운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이 세 가지 논점 모두 앞으로 더 상세히 소개할 예정이에요. 이 짤막한 인터뷰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금융화의 차이가 뭔지,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고 조건들을 전유하는 전략이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걱정은 금물. «피투자자의 시간»과 말미에 수록한 <피셸 페어와의 인터뷰>는 풍부하고 명료한 언어로 페어의 동기와 이론적 논점, 실천적 함의를 설명하고 있어요. 이 매력적인 인터뷰에 흥미와 궁금증이 일었다면 이제 «피투자자의 시간»을 집어들 시간입니다!

* * *

좌파의 우울, 신자유주의, 피투자자라는 조건
미셸 페어와의 인터뷰

리시올 출판사, 조민서 옮김

퍼블릭 세미나(PS): 어떤 동기로 «피투자자의 시간»을 집필하게 되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미셸 페어(MF): 음, 대략 세 가지 동기가 있었어요. 첫째 동기는 오래된 것인데, 한참 전에 신자유주의에 대한 푸코의 강의록을 읽은 다음 신자유주의를 푸코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됐어요. 하지만 얼마 후 이 강의들이 1979년 것이고 마지막 강의는 대처가 처음 당선되기 2~3주 전에 행해졌다는 걸 깨달았죠. 푸코의 강의들은 신자유주의 시대가 아직 시작하기 전 혹은 신자유주의가 도래한 원년에 진행된 것이고, 그러므로 신자유주의 의제를 신자유주의 학자들이 전개한 그대로 다루고 있어요. 그러니 그런 개혁들이 실제로 시행된 뒤 신자유주의가 무엇이 되었는지가 이 강의들에 나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저는 이 사실에 골몰했고 이것이 제 작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이 작업을 처음 구현한 것이 2009년 «퍼블릭 컬처»Public Culture에 발표한 글이었고요. 거기서 저는 신자유주의 체제 혹은 신자유주의 통치 기술이 구성하는 주체 유형이 신자유주의 학자들이 염두에 둔 유형이자 푸코가 묘사한 유형과 상당히 다르다고 논했습니다. 달리 말해 푸코의 강의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기업가라는 개념은 실제로 전개된 무엇이 아니에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주장합니다. 이 개념이 전개되지 않은 까닭은 신자유주의 의제가 [애초 의도대로] 현실화되는 대신 신자유주의 정책이 금융화를 추동했기 때문이고요. 이 어긋남이 제 기획의 시작이었어요.

PS: 이 최초의 관찰에서 출발해 당신의 기획과 논의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나요?
MF: 이중의 기획으로 이어졌어요. 하나는 이제 막 출간된 작업[«피투자자의 시간»]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이 어긋남을 전개하려 했어요. 또 그것이 정치적, 사회적 액티비즘과 저항의 견지에서 무엇을 뜻했고 무엇을 함의했는지를 심사숙고하고자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주된 동기는 몇 가지 이유에서 좌파의 비판에 느낀 특정한 불만이었고요. 우선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좌파의 첫 비판이 제기되었어요. 기본적으로 사회 민주주의가 저 옛적 야생 상태의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로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이에 대응해 좌파도] 자본주의의 이전 단계[사회 민주주의]로 돌아가고자 했어요. 그리고 이에 도움이 된 요소가 몇 있었어요.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던 1920년대 이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수준으로 불평등이 심해졌다는 점에서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뒤 [신자유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최초의 개정이 이루어졌어요. 대체로 푸코의 강의록이 읽히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진 이 개정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란 사실 구래의 자유 방임 자유주의로의 귀환이 아닙니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자들이 설파한 것은 경쟁적인 시장 경제가 최적화된 사회 체계긴 하지만 자연적인 사회 체계는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들은 국가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았어요. 대신 국가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이는 정부 역할의 완화나 철수가 아니라 개편을 뜻했고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케인스주의적인 혹은 사회 민주주의적인 정부, 즉 시장 관계의 난폭함에 맞서 가장 취약한 인구 집단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정부가 아니라 인민을 꾀는 대중 선동에 맞서 취약한 시장 메커니즘을 보호하는 정부라는 것이었어요.

다른 하나 역시 푸코에게서 비롯한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에는 사회 공학이라는 하나의 요소가 있다는 것이죠. 이 공학은 정부, 기업, 개별 시민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경제적 행위자를 기업가로 빚으려 합니다. 기업가적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기업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특히 중요했죠. 자유 민주주의에서 살아가는 상황에서 만약 임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임노동자와, 즉 재산 수탁자property trustee[자산 계급]들의 이해 관계와 대립하는 존재와 동일시한다면 사회주의의 도래는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에요. 이를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민주주의를 억압하거나(칠레 같은 일부 나라에서는 실행되었지만 북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그러지 못했죠) 임노동자를 개조해 그/녀가 스스로를 임노동자와 동일시하는 것을 그만두고 기업가의 사고 방식을 택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기획은 금융화를 생산했고, 금융화는 다시 상이한 종류의 어떤 주체[피투자자]를 생산했어요. 또 정부의 우선 순위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단순히 모든 시장이 아니라 금융 시장을 유지해야 하게 되었으니 말이죠.

물론 2008년의 여파로 금융과 금융화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좌파가 전투를 계획하기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이들은 금융화된 경제가 그 자체로 문제라는 데 초점을 맞췄어요. 터져 버릴 버블을 생산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 그 자체가 언젠가 터지고 말 버블이라고 말이죠. 이는 버블이 곧 터질 것이고 우리는 1970년대의 문제와 희망 들을 상대하고 있었던 1978년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이 좌파의 시야임을 뜻했습니다. 이에 맞서는 것이 제 동기, 이 책의 궁극적인 동기였어요.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주체 형성이 신자유주의 의제와 같지 않음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액티비즘과 관련해 또 다른 푸코적 걸음을 내딛는 것 말이죠.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틀을 짜고 형성하고 빚은 주체성 유형을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동일시하면 핵심은 그것을 전유하는 것, 다른 목적을 위해 전환하고자 시도하는 것이 되리라는 걸음을요.

PS: «피투자자의 시간»에서 시작된 작업을 이어 갈 향후 기획을 계획하고 있나요?
MF: «피투자자의 시간»을 집필하면서 그보다 훨씬 장기적인 기획을 구상하게 되었어요. 아직 완료하지 못한 이 기획에서 저는 기본적으로 야심ambition의 계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스케치하려 해요. 달리 말해 조건―저는 이를 신자유주의 조건이라 부르곤 했지만 지금은 피투자자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에 선행하는 조건들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죠. 왜냐하면 사회 공학 차원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어긋남을 발견할 수 있거든요. 신자유주의자들의 목적이 어느 정도는 자유주의 주체를 복원하는 것, 달리 말해 자신의 이해 관계를 추구하고 만족 극대화를 추구하는 이해 관계의 주체를 복원하는 것이었던 반면, 제가 보기에 [현실에서 구현된] 신자유주의 주체는 신용을 추구하는 주체, 포트폴리오 추구자로서 자신의 가치 상승을 우선시하는 주체라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어긋남을요. 여기서 가치 상승은 만족과 다른 무언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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