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의 분배와 자본의 가치 상승: 새로운 사회 문제의 밑그림

어제에 이어 오늘은 «피투자자의 시간» 본문 일부를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들어가며>의 한 부분으로 신자유주의와 금융화를 구분해야 한다는 결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은 주주 가치를 기업의 핵심 과제로 격상했고, 각종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미셸 페어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의제들의 시행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의도하지도 예견하지도 못했던 결과를, 즉 경제의 금융화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와 금융화는 사이가 매우 좋습니다. 때로는 동의어로 여겨지기도 하죠.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둘이 빚어내는 ‘주체성’이 다르다는 것이 그 차이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론가와 정치가들은 ‘자립적인 기업가적 주체’를 생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금융화된 결과 대부분의 경제적 행위자가 ‘(상호) 의존적인 피투자자’가 되었어요.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가치 상승’을 꾀하는 피투자자로 살아가도록 강제됩니다.

이처럼 «피투자자의 시간»은 금융이 헤게모니를 쥐면서 사회적 불만, 적수, 저항 방식, 투쟁 목표 등이 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금융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피투자자들이 반격을 개시할 수 있다는 발상을 고수하고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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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의 분배와 자본의 가치 상승: 새로운 사회 문제의 밑그림
«피투자자의 시간»의 <들어가며>에서 발췌

신자유주의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들이 신자유주의의 통치 기술을 해부하고 이 기술이 의기양양하게 전진해 나간 과정을 기술한다면, 비대해진 금융을 다루는 문헌들은 새로운 자본 축적 체제가 부상한 과정을 되돌아본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서구 경제는 사회학자 제럴드 데이비스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묘사한 것을 통과해 왔다. 더 이상 경제는 포드주의 시대처럼 수직적 통합이나 내적 성장을 통해 번영을 이루고자 하는 산업 기업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기업과 그들이 구성하는 경제는 거대한 종합 은행과 기관 투자자가 지배하는 금융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선진 공업국 경제의 금융화는 GDP에서 금융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 금융 기관이 다른 기업에 비해 벌어들이는 이윤의 양, 그리고 비금융 기업의 회계에서 상업적인 자금 흐름 대비 포트폴리오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을 통해 측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물 경제’에서 투기적인 금융 회로로 대규모 자금이 이전되었다는 테제를 뒷받침해 주는 이런 지표들보다 한층 명확하게 신용 공급자의 우위를 드러내 주는 것은 자금을 조달받을 자격이 있는 프로젝트를 선별하는 이들의 능력이다. 신용 공급자가 행사하는 권력은 궁극적으로 실물 경제에서 자원을 빼내 오는 것보다는 실물 경제가 무엇으로 구성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힘에 있다. 그러므로 금융의 헤게모니는 금융을 경험하는 이들의 품행과 기대를 변형시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만약 오늘날 경제적 행위자들의 주된 목표가 투자자에게 비치는 자신의 매력도를 높이는 것이라면, 이들은 아마 직업 활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수익보다는 그런 활동에 필요한 신용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위자들의 행태가 바뀌었음을 보여 주는 첫째 증거는 상장 기업의 전략이다. 지난 30여 년간 ‘기업 거버넌스’corporate governance라고 불려 온 것은 장기간에 걸쳐 매출로 발생하는 수입과 생산 비용의 차이를 최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기업 거버넌스의 유일한 목표는 아주 가까운 미래에 금융 시장이 주주의 주식에 할당하는 가치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기업의 진정한 성공은 그것이 생산한 재화나 서비스의 판매로 창출되는 이윤이 아니라 다음 지분 매각으로 발생하는 자본 이득에서 비롯한다. ‘바람직한’good 거버넌스를 실행하는 이들이 재원의 상당 부분을 자사주를 ‘매입하는’buy back 데 쓰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관행은 상업적 혹은 산업적 전략으로 보면 터무니없지만, 자신이 투자하는 기업의 주주 가치에만 신경 쓰는 투자자를 끌어모아 ‘경쟁력’을 갖추고자 하는 CEO에게는 타당한 전략이다.

〔이윤에 대한〕 신용의 우위는 민간 부문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자국 국채 소지자의 선호에 부응하는 것 역시 국가 통치의 주된 관심사로 자리 잡았다. 공직자들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에 바탕한 경제로의 전환을 추진하거나 성장 동력을 다시 확보하는 대신, 자국 영토가 채권 시장에서 평가받는 매력도를 끌어올리는 데 전념한다. 책임감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자 하는 이들 공직자는 채권 소유자의 불신—장단기 국채treasury bills and bonds 금리의 인상으로 표출되는—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 시장을 유연화하거나,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축소하거나, 법인세나 자본 이득세를 대폭 낮추거나, 금융 기관에 대한 모든 유의미한 규제를 유보함으로써 채권자의 그 뻔한 입맛에 맞추려 한다.

마지막으로 신용도가 중요해지면서 한때 안정적인 일자리, 정기적인 임금 인상, 사회 복지를 통해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려 했던 개인들의 품행도 영향을 받는다. 투자자의 신뢰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기업 고용주와 정부는 더 이상 피고용인과 유권자에게 평생 직장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높이 평가받는 기술이나 매력적인 인맥을 홍보하든, 그럴 수 없는 경우에는 〔언제든 일할 수 있다는 의미의〕 가용성availability과 〔어떤 고용 형태든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의〕 유연성flexibility을 내보이든 이제 구직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구직자가 일자리를 구하는 능력은 임금이나 노동 조건에 대한 집단적인 합의보다는 인적 자본에 부여된 신용에 좌우된다.

채용 조건이 바뀌면서 물질적 불안정성이 발생하면 수많은 사람이 부동산에 접근하기 위해, 학업을 이어 가기 위해, 소비재를 얻기 위해, 혹은 단지 생존하기 위해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출을 받으려면 담보를 제시해야 한다. 일정한 자산 없이 대출을 바라는 이들은 보통 자신이 구매하고 싶은 주택이나 취득하고 싶은 학위가 창출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소득 같은 미래의 담보에, 혹은 이전에 대출을 상환해 축적한 신용도라는 평판에 의존한다. 대출자는 실제로 가지고 있는 자원, 긍정적 평판 기록, 신중한 계획 등 무엇을 통해서든 부채를 상환할 능력을 입증해 금융적 신용도뿐 아니라 도덕적 신용도를 유지하고, 이를 통해 계속 돈을 빌려 달라고 채권자를 설득한다.

[…]

이렇듯 지난 40여 년 동안 신자유주의 개혁과 이 개혁이 천명한 목표가 경제에 대한 금융의 통제를 강화하고 정당화해 왔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게다가 금융화의 수혜자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의 지적 계승자 들은 대개 사이가 좋다. 한편으로 노동 시장을 더욱 유연하게, 세법을 더욱 기업 친화적으로, 공공 영역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려는 신자유주의 정부의 노력에 열정적으로 호응하는 것은 투자자들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금융 시장과 금융 기관이 부과한 규율은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실행하는 데 확실한 우군이 되어 준다. 요컨대 경영자는 주주 가치를 추구하느라 노동 조합과 타협할 수 없게 되고, 공직자는 채권 소유자의 신뢰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재선에 필요한 지출을 늘리지 못하며, 민간 대출을 받은 개인은 빚 때문에 금리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있는 정치적 의제를 지지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몽펠르랭 협회의 지도자급 회원들이 처음 기틀을 잡은 처방이 투자자의 권력이 강화된 현상과 완벽하게 양립한다고, 즉 금융화가 신자유주의라는 계획의 일부였고 지금도 신자유주의적 의제가 계속 승리를 구가하는 조건이라고 여겨야 하는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저명한 지식인으로 인간 사회를 “인간 의도가 실행된 산물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결과”라고 본 애덤 퍼거슨을 즐겨 인용했다. 얄궂게도 퍼거슨의 발언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행된 사회들에 유독 잘 들어맞는다. 왜냐하면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고 공급을 진작하는 방안을 고민했던 정부들이 우리의 금융화된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 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사회 공학이 빚어내고자 의도한 인간 유형에 제대로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사회주의”에 맞서 자유주의 정치체를 지키려고 한 몽펠르랭 협회의 지식인들은 기업가적인 에토스의 매력을 되찾고 더 결정적으로는 이런 에토스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한 조치들을 고안했다. 이들은 개개인이 직종과 무관하게 각자의 삶을 하나의 사업으로 대하도록 유인하면 이들의 열망aspiration을 재계의 이해 관계에—그리고 정치적 대표자들에게—맞게 재구성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투자자가 행사하는 선별 권력과 끊임없는 등급 평가rating에 종속된 경제적 행위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자기 사업의 이윤율profitability 상승이 아니라 신용도creditworthiness 향상이다. 이 행위자들은 잠재적인 자금줄〔투자자〕이 기대하는 바를 예측해야 하고 또 그런 기대에 영향을 미쳐야 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가보다는 자기 포트폴리오의 가치를 투기하는speculate 자산 관리사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적 행위자의 안녕welfare을 좌우하는 매력도attractiveness는, 비록 이 행위자가 활동으로 창출하는 수입과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주로 부동산, 기업 주식, 기술, 인맥처럼 이들이 보유한 자원의 가치 상승appreciation에서 비롯한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단체 협상이나 기존에 확립된 권리보다는 공리주의적 계산을 활용해 소득을 극대화하는 개인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반면 금융 자본주의의 주체들은 자신의 자본을 구성하며 끊임없이 평가의 대상이 되는 물질적, 비물질적 자산의 가치를 통해 번영을 도모하려 한다.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시장에 대한 규제 완화였기에 이 개혁을 선도한 이들은 금융을 자유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답례로 금융 시장의 헤게모니는 이들의 바람을 대체로 충족해 주었다. 투자자들 덕분에 이제는 결사의 자유나 보통 선거권 같은 유서 깊은 제도를 인정하더라도 사회주의라는 여우가 자유주의라는 닭장에 난입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금융화는 서로 주고받으며 이익을 보는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매우 중요한 사실은 금융화가 투기적 도박speculative wager에 열중하면서 신용을 추구하는 거래자를 만들어 내며, 이는 신자유주의가 빚어내고자 했던 기업가—합리적 기대에 따라 움직이며 이윤을 추구하는—와 다르다는 것이다. 임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둘 중 어느 유형과 동일시하든 이들의 계급 의식이, 그리하여 노동 과정에서 창출된 부의 분배와 관련해 이들이 참여하는 사회적 투쟁이 심대한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그런데 경제적 행위자들이 기업가적 에토스를 장착하는 대신 금융 시장과 기관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자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대립이 약화된 동시에 또 다른 종류의 갈등이 촉발되었다. 투자자와 그의 후원에 의존하는 ‘피투자자’investee가 신용 할당을 둘러싸고 빚는 갈등 말이다.

한때 진보적이라고 불렸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고안하고 정부가 이들의 시각을 수용해 실행한 ‘탈프롤레타리아화’ 프로그램이 성공하면서 오늘날의 사태가 초래되었다고 본다. 이런 사태를 마주하고 있는 정당들은 현재 도무지 화해할 수 없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다. 빌 클린턴, 토니 블레어, 게르하르트 슈뢰더 같은 1990년대의 ‘제3의 길’ 개혁가들 이래 사회 민주주의 교리의 관리인 대부분은—때로는 가련하게도 체념 어린 한숨을 내쉬면서, 때로는 최근의 전향들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듯 뻔뻔하기 그지없는 열정적인 어조로—기업과 신공공 관리new public management에서 ‘경쟁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추구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여긴다. 자본주의와 단절하자고 완고하게 주장하는 이들의 경우에는 역설적이게도 이전 세대의 반자본주의자들이 인간 소외의 정점에 달한 덫이라고 비난했던 바로 그 전후 사회 협약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파편들을 보존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정치에 미련을 둔 좌파 성향의 유권자들이 제3의 길이라는 기회주의적 투항과 과거에 대한 향수가 서린 반자본주의적 저항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우울에 빠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언뜻 보면 금융이 우위를 점하면서 만들어진 쟁점과 기대가 신자유주의 사회 공학의 목표와 달라졌다는 사실이 딱히 위안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실제로 투자자의 권력이 강화되면 임노동자가 기업가적 에토스를 장착하게 될 때보다 ‘느슨한’ 재정 정책, ‘경직된’ 노동 시장, ‘나태함을 조장하는’ 사회 수당을 더욱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상 만인을 이윤을 추구하고 효용을 극대화하는 기업가로 변모시킴으로써 계급 전쟁을 제거해 버리려 한 기획과는 상반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산을 걸고 능수능란하게 투기적인 도박을 일삼으며 신용을 추구하는 거래자들이 형성되면서 소득 분배보다는 자본의 가치화valorization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투쟁〕 전선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고용주와 피고용인이 아니라 투자자와 피투자자가 주인공인 갈등 구도를 활용하면 좌파가 우울을 떨쳐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해야 한다.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이 주장을 따져 보기 위해 주주 가치의 상승에 골몰하는 기업에 이해 관계자들이 제기하는 도전, 채권 시장의 등급 평가에 종속되어 버린 정부의 상황에 맞서기 위해 피통치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시도해 볼 만한 기획, 그리고 신용이 할당되는 조건을 바꾸려 하는 피투자자들에게 금융화된 경제가 불러일으키는 정치적인 열망과 상상을 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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