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군산 북페어에서 소책자로 선보인 얼리사 바티스토니의 <스페이드워크: 정치적 조직화에 관해>를 블로그에 공유합니다.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된 적 없지만, 바티스토니는 기후 및 환경 정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미국의 정치학자예요. 그의 저서 «Free Gifts: Capitalism and the Politics of Nature»를 «피투자자의 시간» 옮긴이인 조민서 선생님의 번역으로 리시올에서 출간할 예정입니다. <스페이드워크>도 조민서 선생님과의 대화 과정에서 알게 된 글인데요. 이 글의 존재를 알려 주고 또 지은이에게 저작권 허락까지 받아 주신 조민서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스페이드워크>에서 바티스토니는 대학원 시절 노조 조직화에 뛰어든 경험을 회고합니다. 정치 이론 전공생이었던 그는 이론이 삶에서 진정 의미를 띠려면 매일매일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닫습니다. 바티스토니는 수년간 싸움을 계속하며 기쁘고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이하는가 하면 숱한 회의와 비관에 잠기곤 하는데요. 이러한 깨달음과 감정의 부침이 20세기 이후 좌파 운동의 역사를 조망하는 시선 아래 그려집니다.
최종적인 승리를 보지 못하고 몸과 마음이 소진된 채로 운동 현장을 떠난 바티스토니는 에세이 말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삶이 비극적이리만치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 글을 끝내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하면 다시 정치적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아내려 하면서 맺고 싶다.” 원하는 세계를 만들어 가려는 투쟁 한가운데서 그가 목도한 “승리와 실패”, “애착과 상처” 주위를 맴돌던 “희망과 멜랑콜리”가 여러분께도 짙은 여운을 남기길 바랍니다.
Spadework: On Political Organizing © 2019 Alyssa Battistoni
원문 링크: https://www.nplusonemag.com/issue-34/politics/spadework/
* * *
스페이드워크
정치적 조직화에 관해
얼리사 바티스토니
리시올/플레이타임 편집부 옮김
2007년, 스물한 살이던 나는 토머스 프리드먼의 칼럼 한 편을 읽고 분노에 찬 항의 서한을 «뉴욕 타임스»에 보냈다. 프리드먼은 우리 세대가 잠자코만 있다고 고발했다. “자신을 위해서라곤 해도 지나치게 조용하고, 지나치게 온라인에만 머문다.” 나는 이렇게 반박했다. “우리 세대는 용기나 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 권력으로 이어질 조직화—온라인에서든 대면 관계에서든—라는 지난한 작업을 제대로 훈련하거나 경험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나부터 무언가를 정말로 조직해 본 경험이 전무했다. 그즈음 나는 워싱턴 DC에 소재한, 지역 사회를 조직하는 어느 비영리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버락 오바마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 사회 조직가 자리에 오르기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가 배운 것은 조직화하는 법이 아니라 조직화의 언어를 구사하는 법—담당자들에게 조직화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편지를 쓰는 법—이었다. 얼마 뒤 나는 학부를 졸업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세계 경제가 붕괴했다. 그로부터 몇 년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집회와 시위에 결합했다. 주코티 공원에 갔고, 온전히 성사되지는 못한 오클랜드 총파업 현장에 함께했다. 런던에서는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에, 뉴욕에서는 경찰 폭력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행동과 참여를 촉구하는 글도 더 많이 썼다. 하지만 그때까지 옹호해 오던 일을 실제로 실행하는 법을 배운 건 노조 승인을 위한 캠페인이 3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던 예일 대학원에 들어와서였다.
나는 본업에 가까울 정도로 조직화 활동에 몰두했다. 때는 2016년 봄이었고 다른 분야들에도 수많은 동행이 있었다. 전국 각지의 잡지사, 패스트푸드점, 요양 병원에서 노조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전에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했던 이들은 버니 샌더스 대선 캠프에 합류하고 당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던 미국 민주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에 가입했다(이 조직의 구성원이 되면 ‘공식 사회주의 조직가’라는 직함이 새겨진 낡은 명함을 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의 조직가organizer—활동가activist와는 구분되는—들은 러브인[1]을 모의하는 히피나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블랙 블록[2]과 단호하게 선을 긋는다. 조직가들은 직업 혁명가 전통에서, “대중이 조직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는 무다. 대중이 조직되는 순간 프롤레타리아는 전부가 된다”라는 레닌의 촉구에서 영감을 찾는다. 달리 말해 조직화란 부끄러움 따윈 모른 채로 권력을 추구하고 획득하는 작업이다. 조직가는 권력을 행사하려면 수많은 사람을 설득해 대의에 동참하고 스스로를 조직하기 시작하도록 만들어야 함을 안다. 조직화한다는 건 이기기 위해 전부를 건다는 뜻이다.
한데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까? 역사 유물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반란을, 어쩌면 혁명까지도 촉발한다. 우리가 월가 점령 시위와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의 분출, 에스파냐와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발발한 봉기, 영국 학생들의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에서 목격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좌파가 종종 쓰라린 경험을 통해 깨달았듯 그 이후 장기간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침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격변이 찾아와 가능성이 어른거리던 순간들에 좌파는 안토니오 그람시에게 기대곤 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을 뒤따른 유럽의 노동 계급 반란들이 파시즘으로 이어진 원인을 이해하려 한 인물이다. 그람시는 자신이 속한 질서가 상식처럼 보일 때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종속에 동의하며 심지어 그래야 마땅하다고 여긴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노골적인 강압보다 더 미묘하고 만연한 헤게모니는 일상 생활의 리듬에 스며든다.
1983년 스튜어트 홀은 자신의 세대가 마주한 낙담—10년간 노동조합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음에도 상식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한 세력이 대처와 신우파인 까닭은 무엇인가—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헤게모니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헤게모니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는 습관,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 좋은 삶을 상상하는 방식을 빚는다. 헤게모니적 기획은 삶의 “모든 전선을 점유”하고 “인간 존재의 실천적 의식에 난 틈새들로 스며들어야” 한다. 좌파보다 이 사실을 더 또렷이 이해한 대처리즘은 “자신이 침투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한 개개의 전선에서 투쟁에 돌입”했고, 경제에서 언어, 도덕에서 문화에 이르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이론”을 내놓았다. 좌파가 부르주아적이라며 일축한 영역들은 사실상 지배 계급이 승리를 구가하던 영역이었다. 하지만 홀이 상기시키듯 헤게모니를 만들어 내는 건 “까다로운 작업”이다. 결코 어느 한쪽의 전유물이 아닌 “그것은 항상 쟁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경제 모순이 심화한다고 저절로 혁명이 발발하지는 않는다. 대신 서로 모순되는 완고한 특수성들을 지닌 채 구체적인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 행동하는 법과 공동의 지반을 찾는 법—혹은 그러지 않는 법—을 알아내는 것은 우리 몫이다. 그람시와 홀은 우리가 사물과 사람을 끈질기게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가혹하리만치 정직하게 향후 전망을 받아들이고, 효과가 있으리라 믿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조직가를 위한 이론가다.
⁂ ⁂ ⁂
사실 이론을 읽어야 조직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묵직한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길 바라며 정치 이론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데 이론이 나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대학원—일반적인 일터와는 조금 다르다고 예일 대학 행정실에서 끊임없이 강조한—에서의 경험이 그 무언가를 주었다.
나는 첫 수업에 들어가기도 전에 동아리 박람회의 대학원 피고용인 및 학생 조직Graduate Employees and Students Organization, GESO[3] 부스에 들러 노조 가입부터 했다. 모든 형태의 노조를 지지하는 나로선 너무나 당연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이에 더해 학부 시절 룸메이트가 예일에서 수년간 조직화 활동을 벌인 전력이 있기도 했는데, 당시에 룸메이트는 내게 투쟁과 승리의 경험을, 노조 조합원과 지지자 들이 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도록 전해 여름 내내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고 다닌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 노조 가입 신청서에 서명하고 며칠 뒤에는 학과 신입생들을 환영하는 노조 점심 모임에 갔다(열일곱 명 중 나 포함 세 명밖에 오지 않았다). 피자를 앞에 두고 담당 조직가가 랩을 하듯 리듬감 있게 노조의 장점을 설명했고 나는 그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닥거렸다. 내겐 설득이 필요 없었다.
하지만 몇 주 지나 다른 조직가가 노조 커뮤니케이션 팀에 합류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나는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도저히 완독할 수 없을 것 같은 수백 쪽 분량의 읽기 자료, 읽은 텍스트에 대한 발제문 작성과 발표 준비,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학과 워크숍과 강연에 이미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내가 공황에 빠지지 않도록 그가 달래 주었고 나는 작은 일—우리가 되살리려던 뉴스레터에 싣기 위해 조합원 한 명을 인터뷰하기—을 맡는 데 동의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프로젝트—다음 인터뷰 진행하기, 새로운 웹사이트에 올릴 홍보 영상 제작하기—를 하나씩 늘려 갔다. 대학원 생활 첫해가 끝날 때쯤 제일 친한 동기가 노조의 지지 후보로 시 공직 선거에 출마했고, 이번에는 내가 선거 운동을 위해 이곳저곳 문을 두드리며 여름을 보냈다. ‘방문 활동’의 일환으로 다른 조직가들과 함께 당시 진행 중이던 청원에 서명해 줄 이들을 찾아 캠퍼스를 돌아다녔고 우리 학과의 조직 위원회에도 합류했다. 그 외에도 참 많은 회의에 참석했고 곧잘 울음을 터뜨렸다.
지내고 보니 대학원은 정치를 배우러 갈 만한 곳이 아니었다. 대학원의 의례들이 내 직관과는 달리 지적인 대화보다 가십과 업무 이야기를 선호하게끔 설계된 듯해 혼란스러웠다. 동기나 선배 집에서 열리는 파티, 학과에서 주최하는 친목 행사에서는 우리가 읽거나 생각한 것을 화제로 삼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신 우리는 그 주에 발제문을 얼마나 많이 썼는지, 신청 마감이 가까워지고 있는 장학금이나 여름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은지, 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두고 불평을 쏟아 냈다. 정신 건강에 대한 의료 접근성 문제, 아이를 기르기엔 턱없이 부족한 생활비 보조금, 급격히 위축된 일자리 시장, 점점 늘어나는 시간 강사 인력같이 보다 민감한 주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는 이런 대화를 절실히 원했고 조직화를 통해 실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의식 고양 집단처럼 대화를 조직함으로써 정중함과 프로 의식이라는 미명 아래 오랫동안 억눌러 온 불만을 소통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주되는 곳에서 정치를 위한 공간을 창출할 수 있었다. 핵심은 일반화된 비참 아래 무력함이라는 근본적인 경험이 감춰져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과로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음에도 대화를 조직하다 보면 우리가 정말 노동자가 맞냐는 질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우리에게도 노조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람시에 따르면 개인의 인격은 “이상한 합성물”이다. 여기에는 가족사, 문화 규범, 공식 교육에서 습득한 신념, 사고 방식, 이념이, 당대의 우세한 이데올로기를 통해 해석된 삶의 경험이라는 필터에 걸러진 채로, 뒤섞여 있다. 이 전제에서 출발한 홀은 노동 계급이 혁명적 사상을 옹호하는 데 실패하고, 여성이 페미니즘을 포용하는 데 실패하고, 유색인이 반인종주의를 지지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그들이 허위 의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의식이 참되거나 거짓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홀에 의하면 의식은 언제나 “복합적이고 단편적이며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좌파에게도 사실이었다. 1988년 홀은 “우리도 모두 조금씩 대처리즘 기획의 어딘가에 속해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우리 모두 전심전력으로 헌신하고 있다. 하지만 한 번씩—토요일 아침, 어쩌면 시위 현장으로 향하는 길에—세인즈버리 슈퍼마켓에 들르고 그렇게 조금씩은 대처리즘적 주체가 된다.”
대처리즘 기획은 그때 이후로 훨씬 정교해졌고 우리는 그것의 지시를 내면화했다. 우리는 살아온 내내 모범적인 학생이 되는 법을 익혔다. 대학원에서는 ‘시장에’ 우리 자신을 내놓기 전 주말과 방학 동안 스스로를 착취하는 법을 배웠다. 능력주의가 우리를 배신한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절감하면서도 우리 다수가 여전히 능력주의를 믿었다. 학업 조건이 나빠질수록 모두가 더 열심히 일했고 그 조건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게다가 우리는 운 좋게도 이곳—바로 예일!—에 있었다. 다른 많은 대학원생보다는 상황이 괜찮은 편이었고, 저쪽에서 일자리가—자리가 나기만 한다면—분명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이런 우리가 어찌 불평할 수 있었겠는가? 예일에서 대학원생 노조를 조직하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특권에 심취한 눈꼴신 작태로, 아이비 리그 자칭 급진주의자 무리의 노동자 코스프레로 비쳤다.
그러므로 예일도 우세한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들 추상적으로는 노조를 좋아했지만 다른 누가 아닌 우리가 만든 노조가 말이 되는지에는 의구심을 표했다. 우리는 대개 독립적으로 일했고(책 읽으면서 돈까지 받다니!) 각자의 작업에 통제권을 행사했다—적어도 그런 날이 오리라 믿었다. 우리는 거의 모두 교사 노조가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교육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들으며 자랐다. 가족 중에 조합원이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전에 노조 활동을 해 본 사람도 극소수였고 그나마도 나쁜 경험을 들려주곤 했다. 명목상으로 공감을 표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노조가 좋은 건 맞지만…”이 흔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진짜 어려움은 노조에 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조를 함께 조직하는 데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노조를 만들고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노조 가입 신청서에 서명해 달라고, 또 친구들에게도 가입을 권유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 조직가와의 정기 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고, 조직 위원회에 합류하고 회의와 집회에 지인들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많이도 부탁했다—너무 많이 부탁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기꺼이 노조에 가입하고 때때로 서명 운동에도 동참해 주었지만, 그 외의 회의에 참석하거나 동료들에게 노조를 홍보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바빴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노조를 지지한다고 말은 했지만 노조가 자신을 내버려두길 원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대학원생을 조직할 때 직면하는 특수한 어려움처럼 느껴졌다. 대학원생은 한편으로 격무에 시달리기로 악명이 높고 근무 외 시간도 따로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적어도 예일에서는—궁핍하지는 않다(이러한 여건은 사실 학교가 노조에 대한 욕구를 약화하고자 수년간 대학원생 생활비 보조금과 복지 혜택을 늘려 온 결과였으니, 그것〔사람들이 조직화에 소극적인 것〕은 성공의 대가였다). 하지만 이내 어느 조직화에나 따라붙기 마련인 어려움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즈음 짐 크로 법이 적용되던 남부의 시민권 운동 조직화를 다룬 찰스 페인의 «내겐 자유의 빛이 있어요»[4]를 읽었는데,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 선거 운동원들이 1960년대 초 미시시피주 흑인들이 선거인 등록을 꺼린 이유를 정리한 대목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대학원생이 대는 구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어서”, “투표에 관해 토의할 시간이 없어서”, “투표 결과가 어찌 되든 정치인들 마음대로 할 것 같아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너무 바빠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지금 상황에 만족해서”.
물론 우리가 짐 크로 법과 싸우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예일은 여러모로 진절머리나고 봉건적이었지만 우리는 그곳에 일시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머물고 있었다. 우리 다수가 지도 교수를 두려워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구실은 같을지 모르나 현실 또한 같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조직화 캠페인의 특정 역학은 유사했다.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거라고—그것도 완벽하게 합당한 이유를 들어 가며—사람들이 말하면 우리는 그들이 행동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바빴다. 하지만 이것이 꼭 시간 문제는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시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너무 바쁘다는 건 노조 활동에 시간을 들일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조직가의 역할은 사람들이 삶에서 어떤 변화를 바라는지 알아낸 다음, 그 목표를 위해 무언가를 실천하기로 결단할 필요가 있다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문제 자체가 중요하다고 설득하는 것과 다르다. 그들도 문제의 중요성은 안다. 필요한 작업은 바로 당신이 중요하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평소엔 그렇게 대우받지 못한다는 걸 이들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 ⁂ ⁂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이런 관찰을 제시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 초보자는 언제나 그 언어를 자신의 모국어로 다시 옮긴다. 하지만 모국어를 상기하지 않고 새로운 언어를 사용할 때만, 그리고 본연의 언어를 망각할 때만 새로운 언어의 정신을 체화하고 그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조직화를 하려면 내 것이 될 정도로 정치의 언어에 숙달해야 한다. 여느 언어를 익힐 때처럼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시로 어색함과 자신감 부족을 느낄 것이다. 이 단계에는 예컨대 연속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는 ‘쟁점, 요건, 실행’ 연습법을 활용해 볼 수 있다: “뭐가 관건이지?”, “승리하려면 뭐가 필요하지?”, “나는 뭘 해야 할까?”. 나와 내가 조직하는 사람에게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를 고심하는 데서 시작해야지, 우리의 활동이 얼마나 힘겨울지, 그럼에도 이걸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로 섣불리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이런 연습은 유용하지만 경직되거나 인위적일 수 있는데, 진정으로 정치를 이야기하고 있다기보다는 여전히 번역 중이기 때문이다. 신출내기 조직가가 약간은 로봇 같은 어투로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배웠을 내용을 되풀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도 그러다 보면 이런 도움닫기를 뒤로하고 나 자신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터득하는 순간이 결국엔 찾아온다.
그렇지만 또한 우리는 다르게 말하는 법—다른 버전의 나로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는 가장 익숙한 습관을 상당수 버린다는 뜻이다. 여자들이 흔히 그러듯 특정 유형의 감정 노동에 능숙했던 나는 한동안 호감 가는 태도로 어찌저찌 헤쳐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부탁해야 할 일의 규모가 커지자 벽에 부딪혔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한 사람들은 기꺼이 30초를 내어 자신이 보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안에 대한 청원서에 서명해 줬다. 하지만 그저 나와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사를 열받게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무언가를 배워야 했다. 제인 매캘비에 따르면 “조직가들이 새겨야 할 공리 하나는 좋은 조직화 대화는 모두를 적어도 조금씩은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어색할 때는 매캘비가 “길고 불편한 침묵”이라고 칭한 순간—내가 뭔가를 부탁한 누군가가 대답하기를 기다리는 순간—이 지속될 때다. 오랫동안 내 가장 큰 약점은 사람들에게 ‘당신이 원한다고 말하는 걸 쟁취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 자신이에요’라고 똑부러지게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자주 불편함이라는 감정을 가만두는 대신 얼버무리려 애썼다. 내가 조직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노조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려면 당신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하기보다는 우리의 계획이 얼마나 찬란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지지가 쏟아지고 있는지 늘어놓는 게 훨씬 쉬웠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나를 지식을 전달하고 계획을 제시하고 최신 정보를 공유하는 노조 사람으로 봤지만,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기가 원한다고 말한 것을 쟁취하려면 자기도 힘을 보태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매캘비라면 이런 방식을 꼼수라고 불렀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그걸 ‘사람들을 보호하며 조직화하기’라고 불렀다. 부드럽게 부탁하면 다정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여느 보호책처럼 상대를 낮추는 행태에 불과하며, 여느 꼼수처럼 장기적으로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사람들이 내게 호감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깨달음은 계시적이었다. 적대와 의견 충돌을 조금 더 마음 편히 대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즉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를 미소로 무마하고 모든 걸 혼자 처리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선택지를 제시하고 직접 결정할 여지를 남겨 둘 수 있어야 했다. 남들에게 더 많은 걸 요구할 줄 알아야 했다. 심하게 걱정스러운 대화가 예정되어 있을 때면 다른 조직가들과 역할극을 하며 연습했고 그런 다음 머릿속에서 계속 재연했다. 나는 달라지려고 전력을 다했다. 내가 되고 싶었던 버전의 나는 사람들을 움직여 적어도 우주의 작은 모서리 정도는 구부릴 수 있는 누군가였다.
나 자신을 헤게모니를 둘러싼 전투의 현장으로 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환희로 가득한 휘트먼식의 “내 안에는 여럿이 있다”가 아니라, 서로 경합하는 자아들이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종종 고통스러운 투쟁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은 하나뿐이고 하루는 스물네 시간밖에 안 된다. 조직가는 당신에게 그 몸과 시간을 가지고 지금,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건지 물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답변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 안의 대처리즘적 의지가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이 목소리를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다. 애초 생각한 것보다 당신 안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십중팔구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조직화는 우리의 실천적 의식에 난 틈새로 파고들어서는 상식이 아닌 무언가를 원하는 당신 안의 부분을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우리를 동요시킨다. 스스로에게서 소외되는 기분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난 내가 애써 분리해 두려 했던 나 자신의 부분들—내가 생각했던 것, 말했던 것, 행했던 것—을 마침내 화해시켰다고 느끼곤 했다. 조직하거나 조직되려면 다음과 같은 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참된 의식이나 허위 의식 따위는 없으며, 조직화가 발견하거나 무효화하는 참된 자아도 없다. 나 또한 내가 바꾸길 바라는 이 세계에 의해 빚어졌음을 홀은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세계가 현재 세계와 다른 모습일수록 이 괴리〔상식을 따르며 살고 싶은 마음과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사이의 괴리〕도 더 뼈저리게 다가올 것이다. 조직화를 위해 분투하면서 사람들은 “난 이 일에 소질이 없는 것 같아”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 일에 타고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도 조직가로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조직가가 될 뿐이다.
⁂ ⁂ ⁂
조직화의 단조롭고 차분하며 섹시하지 않은 면모는 자주 ‘진짜 작업’으로 재낭만화된다. 조직화를 옹호하는 이들은 거의 틀림없이 조직화가 지루하다고 투덜거릴 것이다. 변덕스럽고 자신에게만 몰두한다고 비방받는 세대에게 일상성과 따분함은 정치 차원의 놈코어[5]처럼 진정성을 의미한다. 조직화는 짧은 유행을 좇는 딜레탕티슴보다는 영웅적인 헌신을, 페이스북 그룹에서 밈이나 주고받거나 트위터에서 적수들을 발라 버리는 것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뭐라도 하기 위해 고결한 결의를 다지는 것을 암시한다. 조직화가 매일매일 일궈 나가는 정치적 작업인 건 사실이다—극적인 행동의 기반을 다지는 고된 노동이라는 뜻으로 엘라 베이커는 이를 ‘밑 작업’spadework[6]이라 불렀다. 하지만 단조롭다는 혐의는 정말로 납득하기 어렵다. 한가한 날에 서명 받으러 다니는 게 지루했던 적은 있지만 조직화의 다른 부분을 따분하게 느낀 적은 없다. 정반대였다. 이보다 더 짜릿하고 가슴을 쥐어짜는 건 없었다. 이보다 더 힘들고 머릿속에서 떨쳐 내기 어려운 것도 없었다.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에서 비비언 고닉이 들려준 이야기를 자주 떠올린다. 해당 부분에서 고닉은 젊은 시절에 공산당 소식지 «데일리 워커»의 판매를 담당하던 여성의 회상을 전해 준다. “맙소사, «데일리 워커» 파는 게 얼마나 싫었던지! 토요일 밤마다 두렵고 구역질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동네 극장 앞에 서서 신문을 내밀면 사람들은 절 외면하거나 밀치고 심하면 얼굴에 침까지 뱉었어요. 그게 너무 무서웠어요. 몇 년 동안 토요일 밤이 돌아오는 게 두려웠어요. 〔…〕 존재가 짓뭉개지는 기분이었죠. 그래도 그 일을 했어요, 했다고요. 안 하면 다음 날 동지들 얼굴을 못 볼 테니까요. 우리는 전부 똑같은 이유로 그걸 했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이유로요.”
얼굴에 침을 맞은 적은 없지만 그것 빼고는 전부 무슨 말인지 나도 안다. 조직화 활동이 항상 두려웠던 건 아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그날 걸어야 할 전화들과 수업이 끝나고 복도에서 붙잡아야 할 사람들이 떠올라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굳이 따지자면 내 쪽이 더 최악이었다. 내가 말 걸어야 했던 사람들은 모르는 행인이 아니라 친구와 동료였다. 그들이 더는 전화를 받지 않거나 복도에서 눈길을 피하면 상처를 받았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했던 걸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계속했던 걸까? 정치적 신념 때문에? 처음엔 그랬을 수도 있다. 나도 탁상 혁명가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순전한 이데올로기적 확신이 꾸준한 조직화 활동을 보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 중요한 요인은 따로 있다. 아버지의 노조 활동 이력이나—이쪽일 가능성이 더 높은데—노조가 필요했던 어머니의 노동 경험, 또는 친구에게 절실한 육아 지원이나 내게 필요한 심리 치료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 수준을 뛰어넘게 된다. 내가 정말로 치아 보험이 필요해서 일주일에 마흔 시간씩 조직화 활동을 한 걸까? 이런 속도라면 어차피 나는 혜택을 보지 못할 텐데.
내 일상적 투쟁의 상당 부분이 대학원 생활 자체에 맞서는 것이었다면, 나는 또한 오랫동안 노조와 같은 무언가를 찾아 왔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휩쓸고 지나갔을 때 그곳에서 한 무정부주의 단체를 도와 몇 달간 자원 봉사자로 활동했다. 그때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 앞에서 상호 부조의 한계를 절감한 뒤 지역 사회를 조직하는 비영리 단체에 합류했고, 그 이래로 쭉 변혁적인 동시에 실용적인 종류의 정치적 행동을 모색해 왔다. 그 변증법이 조직화의 핵심이었다. 노조는 우리의 요구—현실적이긴 하나 꼭 세계사적이지는 않았던—를 노동 투쟁의 장구한 역사, 노동자 권력을 재건하려는 동시대적인 노력, 지금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우리도 그 실현에 조력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비전과 연결 지었다.
우리는 생계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요구했지만 위의 논리에 입각해 보면 궁극적으로는 눈에 띄게 무너지고 있던 학술 생활의 미래를 위해, 혹은 이미 대부분 무너져 버린 노동 운동의 부활을 위해, 아니면 뉴헤이븐처럼 내부 격차가 심한 도시에 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순 없다는 이유로 조직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 노조가 30년간 조직화에 힘써 왔다는 사실은 사기를 북돋는 동시에 부담을 안겼다. 우리는 과거의 승리와 실패를 알았고, 애착과 상처를 알았다. 우리는 희망과 멜랑콜리를 모두 물려받았다. 그 점에서는 다른 좌파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투쟁이—때로는 너무 많이—있었다. 우리는 노조 덕분에 등록금 면제와 생활비 보조금과 의료 보장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여지껏 누구도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만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그렇게 많은 이가 실패했는데 우리라고 성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 깨달음은 위안을 주기도 했다. 우리 이전에 대학원 피고용자 및 학생 조직이 있었듯 우리 이후에도 대학원 피고용자 및 학생 조직이 있을 테니 말이다. US 스틸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하는 데는 50년 가까이 걸렸고, 더 최근 사례인 스미스필드 푸드 노동자들은 24년이 걸렸다.
가끔은 내가 하는 조직화 활동이 세계 전체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느꼈다. 일련의 연역 추론을 거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자본주의는 행성을 송두리째 파괴할 것이다. 그에 맞서려면 강한 노조—곧 새로운 조직화—가 필요한데 교육과 같은 저탄소 분야에서 특히 그렇다. 이는 학술 노동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나는 예일 대학 정치학과에서 노조를 조직해야 한다. 터무니없는 논리였다. 어쩜 그렇게 돈키호테적이고 거창하고 자기 중심적이었던지. 우리는 강도 높게, 많은 경우 각자의 전부를 바쳐 가며 조직화에 힘썼고 나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그 점이 매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나는 근사한 삶, 편한 삶, 학자라면 응당 누려야 한다고 전제되는 정신적 삶을 자주 갈망했다. 전처럼 주말이면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시위에 참여한 뒤 귀갓길에 마트에 들르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삶은 효과가 없었다. 내가 현실적으로 할 수 있던 모든 것의 보잘것없음과 일어나길 바라던 모든 것의 거대함 사이의 간극이 어마어마했다. 지적인 차원에서 나는 깊이 비관적이었다. 수많은 죽음과 파괴를 막기 위해 세계 경제를 변혁할 시간이 날마다 줄고 있었고 반동 세력은 그만큼 더 세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 야심 차고 고된 일을 하고 싶었다. 세계의 괴물성, 잡히지 않는 유토피아, 눈앞에 닥쳐온 재앙에 걸맞은 일을 말이다. 나는 바꾸고 싶은 것도 많았고 움직이고 싶은 사람도 많았다. 노조를 만들고 상사를 비롯해 온갖 역경을 물리치는 일상적인 투쟁 과정에서 나는 간절히 배우고 싶었던 무언가를 보았다.
⁂ ⁂ ⁂
직접 경험해 보기 전이라면 조직화의 관계성이라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관계성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이—종종 그러긴 해도—이성보다 감정에 좌우되기 때문이 아니라, 단독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을 때 집단 행동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집단 행동의 원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더해 가며 집단을 구축한다.
관계를 조직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일 수 있다. 최선의 경우 그 관계들은 페미니즘적 꿈인 연애나 가족 관계 바깥의 친밀성을 선사한다. 노조에서 나는 아주 잘 알지는 못하던 사람들을 깊이 좋아하게 되었다. 회의 자리에 함께한 이들의 용기와 지혜를 보고 경외감과 애정에 휩싸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면서 여러 동료를 가장 각별한 친구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친구들에게 전화 걸 수 있었고, 친구들은 기꺼이 내 전화를 받아 주었으며, 우리는 무슨 얘기든 나눌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나누었다. 돌봄과 지지가 희귀한 세상에서 이런 관계는 내게 그것들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이 관계들은 단순한 우정도, 단순한 정서적 구심점도 아니었다. 내가 힘을 얻고자 기댔던 사람들은 필요할 때면 나를 부추겼고 나 또한 그들에게 그랬다. 그게 우리의 약속임을 나는 알았다.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향한 실천적 헌신을 빚었고 이런 헌신이 노조를 단결시켰다. 관계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관계는 까다롭고 다면적이며 자주 불만족스럽고 극히 취약했지만 동시에 변혁적일 가능성도 품고 있었다. 반면 여느 관계 못지않게 소홀해지거나 상처를 안기거나 배신으로 얼룩질 수 있었고 언제나 정성을 쏟아야 했다. 우리는 거듭 관계를 구축하고 그 한계를 시험했으며, 가까워질수록 서로를 더욱 채근했다. 그러다 보니 부담도 상당했다. 참담한 순간들에는 이 관계가 도구적인 것 이상이기는 할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궁금했던 건 유용성이 얼마나 유해하길래 다른 모든 걸 오염시킬 듯이 여겨지냐는 것이었다.
조디 딘은 동지라는 단어가 개인적 관계가 아닌 정치적 관계를 명명한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의 동지인 것은 그 사람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투쟁에서 그와 같은 편에 서 있어서다. 동지는 이웃이나 시민이나 친구가 아니며—서로를 형제나 자매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가족도 아니다. 동지에게는 인종도 젠더도 국적도 없다(이러한 밈도 있지 않은가. “내 최애 젠더 중립 대명사가 뭐냐면 바로 동지야”). 동지는 저마다 고유한 개별자조차 아니다. 그들은 “대체와 교환이 가능한 복수의” 존재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앞으로도 만날 일 없을 수백만 명과 동지가 될 수 있다. 우리 관계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정치적 기획과 결부되어 있다. 딘도 기꺼이 인정하듯 다수의 비공산주의자는 이런 도구적 성격에 ‘몸서리칠’ 것이다. 그것이 공산주의란 결국 보그Borg[7]에 굴복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지들 간의 동일성은 일종의 진정한 평등이기도 하다.
조직가 되기는 동지 되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내 동료 조직가는 아마 내 동지일 것이다. 반면 내가 조직하는 사람이 꼭 내 동지는 아니다. 무엇보다 조직화의 핵심은 이제까지는 우리 편 바깥에 있던 사람을 되도록 많이 견인해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직하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한다고 상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보통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야 한다. 동지와 달리 조직가는 대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조직〔유기적〕 지도자에 대한 매캘비의 이론에 따르면, 조직화를 이끌어야 하는 건 올바른 견해를 지녔다고 자부하는 낯선 이가 아니라 사람들이 알고 신뢰하는 누군가다.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는 “강인한 사람들”—전통적인 의미의 지도자상에 꼭 부합할 필요는 없지만 동료들 사이에서 존경과 신뢰의 대상인 이들—을 찾았다. 사람들이 신뢰하는 이와 함께할 때만 위험이 따르는 정치적 행동을 감행하리라는 논리에서였다. 조직가들이 자신이 조직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면 결과는 승리로 이어진다. 케이트 브론펜브레너와 도리언 워런의 2007년 논문은 유색인 여성들이 유색인 여성들을 조직했을 때 〔노조 설립을 위한〕 선거에서 90퍼센트에 가까운 승률을 거두었음을 보여 준다. 이건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정치학과에서 여성과 유색인 들이 조직화를 주도했을 때 우리는 백인 남자들이 우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조직화의 동지적인 요소는 그 경계 바깥에 있는 사람과 관계 맺을 여지를 열어 주기도 한다. 대의를 통해 계급, 인종, 젠더가 초월되고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다. 서로가 공유하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협력할 필요가 최소한의 공동성—차이를 가로지르는 관계 맺기를 가능케 하며 그 방법을 찾아내는 데 필수적인—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다른 누군가와 일대일로 만나 공통의 고민거리를 이야기하고, 동료일 뿐인 사람에게 마음을 열거나 친구들에게 밝히기 곤란한 의견을 낯선 사람과 공유하는 건 이 때문이다. 내가 힘겹게 몸부림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한테도 인정할 수 없었던 시기, 대학원 서열 문화가 굴욕적이라며 담당 조직가 앞에서 눈물을 쏟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일대일 만남은 대항 문화적이다. 일대일로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관계 맺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의 폭을 넓히고, 우리 삶의 대부분을 질서화하는 인구학적 범주와 그에 맞춰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기 위해 학습한 대본 바깥으로 우리를 끌어내니 말이다. 서로 공유하는 기획을 향한 헌신, 보그를 향한 충성을 긍정하면서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이 기획에 이끌렸는지도 이해하면서 우리는 처음엔 신뢰할 이유가 없던 사람들과 신뢰 관계를 쌓아 간다.
⁂ ⁂ ⁂
2016년 8월 연방 노동 관계 위원회National Labor Relations Board, NLRB는 학술 노동 운동 세력이 오바마 대통령 임기 내내 기다린 결정을 발표했다. 대학원 노동자들이 노동 보호의 대상이라고 공표한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전국 대학원생의 줄기찬 주장에 정부도 동의한 셈이었고, 우리의 노력을 근거로 언급하기도 했다. 우리 노조는 익주에 열 개 학과를 대상으로 선거 신청서를 제출했다.[8] 노조가 갑자기 모두에게 매우 실제적인 사안이 되었다.
선거 신청서를 제출한 후 우리 학과에서 열린 첫 회의는 예상보다 두 시간 넘도록 진행되었다. 서류상으로는 정치학과의 거의 전 구성원이 노조 조합원이었지만 모두가 확고한 찬성파는 아니었다. 회비는 얼마일까? 단체 협약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될까? 노조에서 파업을 조직할까? 아니면 예일의 다른 노조 지부나 우리가 소속된 국제 노조가?[9] 어떤 의사 결정 규칙을 따르게 될까? 지금은 어떤 규칙에 따르고 있는 거고? 규약이 있나? 학교가 보복할까? 지금도 괜찮은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지? 그나저나 누가 우리를 조직가로 임명한 거지? 많은 이가 조직화 자체를 미심쩍어했다. 우리는 대학원생들이 노조를 원하는지 아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막상 그 상황에서는 그들이 노조를 원한다는 확신을 갖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아주 민주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냥 바로 투표하는 게 낫지 않을까? 투표는 온라인으로도 할 수 있잖아—요즘은 쓸 만한 소프트웨어가 많던데.
나는 노조가 아주 강하게 민주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했다—어쨌거나 우리는 일터에서 일정 수준의 자치를 추구했고 더 많은 이에게 동참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민주주의는 우리의 개별 선호를 종합하거나 절차를 고수하는 것 이상이었다. 오히려 일반 의지를 찾아내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의 인민이라고 선언하는 중이었는데, 이는 우리 자신을 합리적인 행위자들의 표본이 아니라 집단의 일부로 보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비지배nondomination라고 다른 정치 이론 전공생이 말했다. 현 상황은 나쁘지 않지만 언제든 자의적 권력이 우리를 휘두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 논리는 경험주의자들에게 의외의 호응을 얻었다.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학술 토론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어찌 됐든 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이들을 설득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노조가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들이 노조에 표를 던지길 바랐다. 하지만 표만 원했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들이 노조를 원하기를 원했다. 그들 없이는 노조도 없으니까.
가을 내내 내 삶이 걸리기라도 한 듯이 조직화에 매진했다. 야행성임에도 아침 회의에 가려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그날 할 일에 관한 메시지들—청원 진행 현황이 어떤지, 서명해 달라고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는지, 또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려면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는지, 언제까지 내 진척을 보고해야 하는지—이 쌓여 있어 샤워하면서 불안을 떨쳐 내려 애쓰곤 했다. 아침이면 모든 게 두려웠다. 그래도 일단 집을 나선 뒤에는 대체로 그날그날을 사랑하게 되었다.
길고 지치는 나날이었다. 매사에 얼마나 많은 품이 드는지, 하루에도 자잘한 위기가 얼마나 많이 발생할 수 있는지, 한참 전부터 계획한 행사가 얼마나 막판 조치에 의존하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가 조직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담당 조직가를 만나고, 여러 조직가 집단을—학과 차원에서, 노조 차원에서, 시 차원에서—만났다. 통화가 끊이질 않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회의에 참석하느라 이동 중에 허겁지겁 프로틴 바를 삼켰고, 노조의 비공식 아지트였던 피자 집에서 기름 범벅 피자를 먹었다. 마지막 회의는 밤 여덟 시에야 끝났다. 그러면 헬스장으로 향해 러닝 머신 위에서 문자로 진행 상황을 공유하거나, CNN 대선 토론을 보며 욕설을 내뱉거나, 최근 페이스북에서 정치 얘기로 열변을 토했지만 내 연락에 답하진 않은 사람을 떠올리며 속을 끓이곤 했다. 나는 다른 대학원생 두 명과 한 아파트에서 지냈고, 오래전 뉴헤이븐을 떠났다 조직화 활동을 위해 돌아온 친구들이 번갈아 우리 집에 머물며 커다란 옷장이나 다름없는 방에 에어 매트리스를 깔고 잠을 잤다. 나는 밤늦게 귀가해 지친 상태로 만들 수 있던 유일한 먹을거리인 계란 토스트를 해 먹었고 이메일—아주 많은 이메일—을 썼다.
자주 울분이 치밀었다. 어쩌다 내 삶이 이렇게 됐지? 가끔 진행되는 청원을 위해 몇몇 사람에게 서명을 부탁하는 것에서 시작해 필요할 때마다 힘을 보탰을 뿐인데 어느새 정치학과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다. 때로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내가 자주 바랐던 대로 이 일을 그만둔다면 동료 조직가들, 우리 학과, 노조 전체, 예일의 다른 노조 조합원들, 뉴헤이븐의 동맹들, 조합비로 우리 캠페인 재원을 충당해 준 전국의 호텔 청소 노동자들,[10] 지난 30년간 예일 대학원생 노조 조직화에 참여한 모든 대학원생을 실망시킬 것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순간이면 처음 나를 이 활동에 끌어들인 이들을 원망했다. 그들은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조직화가 내 삶 전체를 집어삼킬 거라고 말해 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왜 이 일을 시작하길 꺼리는지 이해했다. 일이 어떻게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분노를 느끼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어떻게 뭔가가 성사될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거지? 이 모든 일을 누가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평정심을 잃은 생각이었다. 사실 여러 사람이 많은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선거가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집회에 자주 참석하고 새로운 소식도 활발히 나누었다. 이들은 연일 이어진 연방 노동 관계 위원회의 청문회—교수들은 우리가 학교에 기여한 바가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에서 자리를 지켰고 자신들의 노조 설립 의사를 담은 청원서를 전달하러 함께 대학 관계자들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들은 노조를 지지한다는 증거로 얼굴을 드러낸 사진을 찍고, 노조 배지를 단 채로 수학하거나 강의했으며, 고충을 신고하고, 원하는 단체 협약 방향을 주제로 기고문을 썼다. 이들은 회의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이기고 싶어 했다.
2016년 대통령 선거 날에는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노조 회의에 가려고 트럼프 취임 연설 몇 시간 뒤 일어났는데, 숙취도 있고 기진맥진했지만 할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우리의 선거는 아직 남아 있었고 꼭 이기자고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다잡았다. 그 후로 여섯 달 동안 매일 하나 이상의 회의에 출석했고 거의 모든 회의에 감사함을 느꼈다. 나와 다른 지역에 있던 가족과 친구들은 〔트럼프의 당선에〕 절망과 우울과 두려움을 표출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비통해하지 않았다—조직화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의로움이라는 짜릿한 파도에 몸을 싣고 있었다. 미국에서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전부 나와 같은 일을 했다면 상황이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트럼프라는 존재를 물리치고 좌파가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줬을 터였다.
하지만 용솟음치던 역사의 파도가 우리를 승리로 실어 나르기보다는 삼키고 말 가능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우리는 2016년 말에 〔노조 설립을 위한〕 선거가 치러지길 기대했고, 또한 클린턴이 당선되기를 기대했다. 트럼프는 노동자들을 이용해 당선됐지만 노동계는 여전히 주된 표적이었다. 우리는 트럼프의 취임식 며칠 뒤인 1월 말 마침내 선거 실시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몇 주 후 선거를 치렀다.
선거 전날 밤 나는 살면서 무언가를 이토록 원한 적이 없었고, 궁극적으로 내가 거의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토록 사무치게 원한 적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직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사람들은 결국 각자의 선택을 내릴 터였다. 그 전까지 개인적 성취를 좇아 오다가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원해야만 이룰 수 있는 무언가를 원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조직화 활동은 우리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할 수 있음을—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함께 싸울 수 있음을—배우는 연습이었지만, 동시에 한계를 배우는 경험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 수는 없는 법이니까.
우리는 정치학과에서 승리를 거뒀다. 딱 예상한 만큼 찬성 표가 나왔다. 또 선거를 신청한 학과 중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겼고 대부분 압승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선거를 치른 건물에서 서로 끌어안으며 「영원한 연대」를 불렀고, 가게가 문을 닫을 때까지 술을 마시다 다 같이 우리 집을 향해 걷던 길에도 불렀다. 나머지 부분은 웅얼대도 후렴구만큼은 힘차게 따라 불렀다.
⁂ ⁂ ⁂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리가 필요로 했던 단체 협약을 맺으려면 학교 당국이 우리와 교섭하도록 만들어야 했는데 명백히 예일은 그럴 의향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트럼프가 임명한 공화당 성향의 위원들이 연방 노동 관계 위원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 전에 선거 결과를 승인받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 예일은 더 이상 법적으로 취할 수단이 없어 노조를 와해시키려면 법을 어겨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항소하면서 몇 달간 시간을 끌 수도 있었다(그때쯤 우린 연방 노동법의 허점에 관해서라면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학교 당국이 원치 않더라도 움직이게 만들어야 했는데 학기는 몇 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른 명 남짓한 학과별 노조 대표단—명목상으로는 각 학과에서 선출됐지만 사실 어마어마한 양의 조직화 활동을 기꺼이 감당하고자 했기에 이 직책을 맡게 된 이들—은 주어진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예일이 물러설 때까지 수치심 안기기를 목표로 한 달간 집중 행동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조합원 일부가 교대로 단식 투쟁을 이어 가는 게 캠페인의 핵심이었다. 단식은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틀간 회의에서 치열한 토론거리가 되었다. 단식을 강행하면 우리의 비교적 편안한 처지와 학교와 전면전을 벌일 태세 사이에 도사리던 긴장이 심화될 것 같았다. 단식 투쟁은 몸 말고는 사용할 것이 없는 수감자나 약자의 위치에 선 이들이 택하는 전술 아닌가? 우리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모험이 아닐까? 처음에 난 회의적이었다. 의욕이 과한 소규모 학부생 조직이 벌일 법한 일처럼 보여 부적절하기보다는 난처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막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참인, 조합원이 수백 명 있는 잘 조직된 노조였으니 당연히 더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달 안에 파업을 조직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또 세자르 차베스가 전미 농장 노동자 조합을 위해 벌였던 단식 투쟁의 전례를 따라 유나이트 히어도 단식을 전술로 활용한 역사가 있었다. 결국 이게 최선의 수라는 생각에 다다른 나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룻밤 새 우리는 준게릴라 작전을 개시한 반란 세력이 되었다. 정상적인 학교 운영을 방해하고 예일이 우리를 못 본 체할 수 없게끔 한 달간 매일 갖은 수를 썼다. 학교 경찰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려 가짜 상황을 연출했고, 바이네케 플라자의 총장실 앞에 커다란 구조물을 세운 뒤 그 안을 야영장처럼 꾸려—구조물이 철거되면 우리도 연행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24시간 내내 지켰다. 첫날 수십 명의 노조 조합원, 교수, 학생, 친구, 지지자가 구조물에 머물며 읽고 이야기하고 채점하고 게임하면서 밤을 지샜고, 나는 학문적 유토피아를 예시豫示하는 광경을 보며 이걸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다. 예일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그냥 내버려둔 것이다. 우리는 예일의 노조 파괴 공작을 부각하며 경영 대학원 도서관에 “트럼프 대학교”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었고, «뉴욕 타임스»에 단식 투쟁에 관한 글을 기고해 달라고 교수 한 명을 설득했다. 1,700만 달러를 들여 리모델링한 총장실 앞에서, 그리고 일요일 아침에는—동네 주민들이 말 그대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동안—예일 대학교 이사들이 사는 그리니치의 저택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난 우리가 이길 거라고 믿었다. 내 지성과 의지가 완벽하게 일치하던 시기였다. 아흐레간 단식하기로 했을 때도 고민하지 않았다. 조직화보다 단식이 여러모로 쉬웠다. 안 먹기만 하면 되니까. 엿새째 되던 날 친구에게 조증 증세를 보이며 쓴 메일에서 “이상하게 평온하다”고 표현했다. 엄마는 걱정했지만 힘도 보탰다. 지나 레이먼도—로드아일랜드의 최초 여성 주지사라는 이유로 엄마가 좋아했던 예일 대학교 이사—를 찾아가 내 딸이 몸을 버리며 저러고 있는데 당신은 왜 노조를 보호하지 않느냐며 공개적으로 따졌다.
학교는 부정적인 언론 보도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학기가 끝난 후, 동문 초청 행사 날 새벽에 캠퍼스가 조용한 틈을 타 구조물을 철거했다. 늦여름 내 담당 조직가들은 가을에 단체 협약 캠페인을 이어 갈 수 있도록 휴학하고 풀타임으로 조직화 활동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곧—정말로 곧!—연방 노동 관계 위원회가 〔선거 결과를〕 최종 승인할 것이었다. 가을에 새 학기가 시작되면 우리는 유리한 입지에 서서 다시 투쟁 수위를 높일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투쟁 수위를 높여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내가 도울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더는 원하지 않았다. 집중 행동을 강행한 한 달 동안의 희열이 잦아들자 나는 산산조각 났다. 진이 빠졌다. 의지도 약해졌다. 극적이었던 지난 단식 투쟁에 단단히 화가 난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고, 솔직한 심정을 들려 달라 부탁하고, 아직 이기지 못했지만 당신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고 설득하는 데 내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저강도 전투를 치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의 나쁜 기분을 받아 주고 다시 싸울 에너지를 짜내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다음 단계가 있었고, 나는 언제나 그러리라는 사실을 마침내 깨닫는 중이었다. 뉴욕으로 이사해 학위 논문을 마치고 주말에는 쉬거나 적어도 남들처럼 내 작업을 하고 싶었다. 나는 뉴헤이븐에 있던 아파트를 정리하고 이사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 ⁂ ⁂
하지만 난 떠나지 않았다. 누구 눈에는 세뇌당한 듯 보였을 것이다.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으니까. 하지만 난 거기에 있었다. 노조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던 걸까.
누구도 나를 붙잡지 않았고 사실 그럴 수도 없었다. 남아야 하는 이유를 다른 조직가들이 내게 말해 줄 수야 있었으나 내가 정말 떠나기로 마음먹는다면 아쉬움은 뒤로할 수 있을 터였다. 지난번에는 조직화를 위해 휴학하지는 않기로 결정했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봄 학기를 휩쓸었던 열기가 걷잡을 수 없이 정반대로 기울어 어딜 바라봐도 두려움과 죄책감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하리라는 확신이 밀려들었다.
나는 왜 머물렀을까. 궁극적으로 내가 그때까지 해 온 모든 일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다른 사람들과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의 내가 좋았다. 그럴 때면 평소보다 담대하고 친절하며 관대해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내가 살고 싶은 세계는 내 목소리가 중요하게 대우받는 곳, 주변 사람을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여길 수 있는 곳이었다. 노조가 여러모로 불완전하다는 건 나도 잘 알았지만 나는 노조 활동을 할 때 바라던 세계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당시 몇 달간은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그 세계를 실현하려 애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다. 여름 내내 연방 노동 관계 위원회는 침묵했다. 가을에는 트럼프가 임명한 위원들이 인준되었다. 노조 내부는 산산이 부서졌다. 우리는 몇 달이나 소위 결승선 직전에 있었다. 목표한 집회 참석률과 청원 달성률을 채우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부탁하고 서로를 채근했다. 지극히 헌신적인 조직가들로 구성된 우리 그룹은 예일을 교섭 테이블에 앉히고자 나머지 조합원들보다 계속 앞서 나갔다. 우리 대부분은 승리하고 나면 다들 따라오리라 기대하며 학과 내 인간 관계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우리는 이런 곤란함들을 승리의 대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언제나 승리까지 고비가 한 차례 더 남은 것처럼 보였다. 이번이라고 다르리란 법이 있을까? 승리할 가능성이 희미해지면서 노조 지도부를 향한 신뢰—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우리가 뭘 하는지 안다는 생각에 입각해 있었던—도 약해졌다. 승리라는 명목 아래 억눌려 왔던 온갖 좌절과 비판과 원한이 되살아났다. 노조는 비민주적이고 망상적이며 사람을 도구로 대하고 조종하는 조직이었다. 살면서 최악이었던 몇 달 동안 나는 주변 상황이 무너지지 않게 무던히 애썼고, 그해 겨울 당초 계획보다 살짝 늦게 뉴욕으로 이사했다.
⁂ ⁂ ⁂
조직화를 그만두자 내 삶도 정상 궤도로, 적어도 대학원 입학 전의 정상적인 생활—정치에 관해 읽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썼지만 실제로 정치를 하지는 않았던—로 복귀했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자고 더 잘 챙겨 먹었다. 텔레비전도 더 많이 봤다. 여러모로 더 윤택한 삶이었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나도 기꺼이 현명해지고 싶다.[11] 하지만 우리는 시대를 선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암울한 시대에 나는 그 어떤 중요한 일도 하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 날 회의에 초대해 주길 기다렸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연일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덜 울고 덜 웃었다. 구직을 걱정했고 모르는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생각하며 마음 졸였다. 이렇게 불안해하고 나 자신에게만 몰두하는 내가 그간 애써 벼려 온 것보다 더 진정한 나일까? 아니길 바랐다.
여전히 끊임없이 조직화에 대해 생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뭐가 잘못됐던 건지 이해하려 읽고 또 읽었다. 상황과 조직화 방식과 쟁점은 제각기 달랐지만 갈등과 긴장과 와해의 양상은 비슷했다. «미국 공산주의라는 로맨스»는 비극을 언급하며 끝맺는다. 자신이 몸담았던 페미니즘 운동이 반목으로 와해되는 걸 지켜보던 고닉은 자라면서 봐 왔던 공산주의자들의 비통한 심경을 마침내 이해한다. 고닉은 그들의 운명이 “급진주의의 핵심에 놓인 극심한 고통”을, 자기 창조의 “장엄한 슬픔”을 드러낸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하지만 정치적인 삶이 비극적이리만치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이 글을 끝내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하면 다시 정치적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아내려 하면서 맺고 싶다.
레이버 노트[12]가 편찬한 매뉴얼 «성공적인 조직가가 되는 비결»은 실패한 조직가를 위한 비밀 하나를 알려 주며 마무리된다. “조직화의 냉혹한 현실: 당신은 숱하게 실패할 것이다.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을 것이다.” 승리를 위한 비결이 실은 비결이랄 것도 없는 무언가—온갖 손실과 차질을 동반하며 승리가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할 때까지 조직하고 조직하고 또 조직하기—라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느냐는 질문은 곧 어떻게 해야 이기고 난 뒤, 또한 지고 난 뒤에도 그것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일 것이다.
노조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나는 그런 활동을 다시는 하게 되지 않을까 봐 걱정되고, 동시에 다시 하게 될까 봐 걱정된다.
[1] 화합과 유희를 추구하는 평화적인 집회. 연좌 농성sit-in에 대한 언어유희로 파생된 표현이다.
[2] 검은 복장을 입고 스카프, 마스크, 모자, 선글라스 등으로 얼굴을 가린 시위 참가자들.
[3] 지은이가 활동했던 GESO는 1987년 조교 연대체TA Solidarity로 처음 결성되어 1990년 공식화된 예일 대학원생 노조 조직화 단체다.
[4] 1950~1960년대 시민권 운동 현장에서 널리 불린 <내가 가진 이 작은 빛>을 패니 루 헤이머가 개사한 노래의 한 구절.
[5] 일부러 소박하고 평범한 것을 택함으로써 스타일리시함을 드러내는 2010년대의 패션 경향에서 유래한 표현.
[6] 이 소책자 제목으로 사용된 ‘스페이드워크’는 삽spade으로 땅을 일구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넓은 의미에서는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기초를 다지는 고되고 반복적인 노동을 뜻한다. 이 표현을 사용한 엘라 베이커는 미국 시민권 운동 조직가이자 SNCC의 핵심 인물이었다.
[7] 텔레비전 시리즈 <스타 트렉>Star Trek에 등장하는 가상의 종족으로 개별 자아 없이 하나의 집단 의식으로서 작동한다. 냉전기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공산주의 체제가 개인성을 말살하고 개인을 집단에 종속시킨다고 풍자하는 비유로 종종 동원되었다.
[8] 미국의 민간 부문에서 노동조합이 교섭 대표가 되려면 둘 중 하나의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하나는 사용자가 노조를 자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NLRB에 선거를 신청한 뒤 NLRB의 감독 아래 선거를 실시하는 것이다. NLRB에 선거를 신청하려면 해당 교섭 단위 구성원의 30퍼센트 이상이 선거를 원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는 증거를 제출해야 하며, 선거에서 투표자의 과반이 노조를 선택하면 NLRB는 선거 결과를 승인, 즉 해당 노조를 교섭 대표로 인증한다.
[9] 2016년 GESO는 대학원생 조교 및 연구자를 대표하는 로컬 33으로 개편되었다. 예일 대학에는 이 외에도 사무 및 기술직 노동자를 대표하는 로컬 34, 서비스 및 유지 보수직 노동자를 대표하는 로컬 35가 있으며, 이 세 노조는 모두 북미 전역에서 서비스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의 노동자를 조직하는 국제 노조인 유나이트 히어UNITE HERE의 산하 조직이다.
[10] 유나이트 히어의 조합원들을 뜻한다.
[11] 시대가 암울해 옛 현인들이 말하던 현명한 삶을 실천하기가 어려움을 토로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후손들에게」 구절.
[12] 미국의 노동 전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