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화하는 사회» 디자인 후기

«감정화하는 사회»는 책 넘김이 아주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차적으로는 분량 문제가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질감이 지은이의 속도감 있는 문체와 어울린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표지와 본문 용지를 기존에 사용하던 것보다 한 단계 가벼운 종이로 정하고 대신 커버를 추가했다.

나는 커버 씌우는 방식을 좋아한다(리시올/플레이타임의 책 중에서는 «알고 싶지 않은 것들»과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커버를 만들었다). 얇은 종이로 한 겹 감싸게 되면 어딘지 선물을 포장한 것 같기도 하고, 또 표지 자체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파악할 수 있고 검색하면 단번에 찾아볼 수 있는 커버 표지에 비해 속표지는 숨겨져 있어 접힌 날개를 펴 커버를 벗겨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커버를 씌운 책들의 매력이 아닐까. 그런 수고로움을 거쳐 속표지를 확인하고 커버 디자인과 대조해 보거나 연결 고리를 상상해 보는 일이 늘 재밌기도 하고. 뒤에서 말하겠지만 특히 이 책은 모든 걸 ‘평면화’하는 감정화를 다룬 책이기 때문에 표지 디자인에 약간의 ‘입체감’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리고 커버로 감싼 책은 특유의 책 넘김이 있는데 그 감각이 좋다. «감정화하는 사회» 디자인 후기

오쓰카 에이지를 소개합니다

오늘은 «감정화하는 사회»의 지은이 오쓰카 에이지를 간단히 소개해 보려 합니다. «감정화하는 사회»가 한국에 처음 번역되는 지은이의 책이 아니고, 또 일본 현대 사상서나 서브컬처 비평서 독자들은 인용이나 참조의 형태로 그의 이름을 종종 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지은이의 작업 중 비평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책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동안 지은이가 벌인 활동 전반을 아우르며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에 부족하게나마 오쓰카 에이지라는 인물을 개괄적으로 소개하면 좋겠다 판단했습니다. «감정화하는 사회» 옮긴이 선정우 선생님께 도움을 받아 아래 그의 이력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쓰카 에이지를 소개합니다

이야기 노동론(발췌)

«감정화하는 사회»의 2장 ‹이야기 노동론› 일부를 공유합니다. 이 책의 기본 문제 의식과 사회의 감정화를 초래한 동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지은이는 인터넷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무상 노동 문제를 다룹니다. 플랫폼이 내세우는 소위 ‘공유 경제’ 노동자들의 처우가 얼마 전부터 사회 문제로 대두해 왔습니다. 그런데 지은이는 이 문제도 중요하지만 이를 포함하면서도 구분되는 ‘새로운 노동 문제론’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인터넷 플랫폼은 흔히 개방된 ‘자기 표현’의 장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콘텐츠 게시라는 우리의 무상 노동을 통해 수익을 얻는 비즈니스 모델로 운영됩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소비 행위 및 우리의 감정 표현 자체가 자본에 의해 무상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의 자기 표현은 자유와 기회뿐 아니라 억압으로도 작용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말할 거리가 없을 때도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고, 그렇기에 인터넷상의 ‘자기 표출’은 “지극히 직접적인 감정의 토로”로 귀결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윤으로 회수하는 것은 인터넷 플랫폼 자본입니다.

1989년 지은이는 일본 서브컬처 비평의 토대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이야기 소비론»을 발표해 ‘창작하는 소비자’의 등장이라는 사회 현상을 선구적으로 짚어 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소비자들의 ‘창작’이 일종의 무상 노동 콘텐츠가 되는 사회적 체제가 성립하리라는 것은 예감하지 못했습니다. «감정화하는 사회»는 변화된 사회에 대한 진단인 동시에 자신의 과거 입장을 반성하고 극복하려는 시도입니다. 아래 발췌한 <이야기 노동론>을 읽으면 현재를 설명하고 비판할 언어를 모색하는 지은이의 절박함을 뚜렷이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야기 노동론(발췌)

«감정화하는 사회» 출간 기념 증정 이벤트

달력이벤트

<감정화하는 사회> 출간을 기념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리시올/플레이타임에서 출간한 책을 구입하신 독자 분들께 기존 출간작들과 2020년 상반기 출간 예정작들의 페이지를 담은 달력을 드립니다(인터넷 서점에서 구입 시 마일리지 차감). 한정 수량이니 서둘러 주세요! ❤️

달력 입고 서점
온라인 서점  |  알라딘, 교보문고
오프라인 서점 | 고요서사(서울), 동아서점(속초), 땡스북스(서울), 번역가의 서재(서울), 별책부록(서울), 북스피리언스(서울), 손목서가(부산), 스토리지북앤필름/초판서점(서울), 아스트로북스(부산), 아침달북스토어(서울), 책방이층(대구), 책방FEMM(안산)

«감정화하는 사회»

«감정화하는 사회»
오쓰카 에이지 지음 | 선정우 옮김 | 312쪽 | 18,000원

오늘날 우리는 자발적으로 자기 삶을 인터넷 플랫폼에 업로드하고 플랫폼 자본은 이렇게 집적된 데이터베이스를 콘텐츠로 활용해 이윤을 거둔다. 이렇게 무상 노동이 일상화되는 한편 우리는 점점 더 플랫폼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쾌적함에 젖어 이 향유를 방해하는 불편을 배척한다. SNS에서 가볍게 훑어보며 ‘좋아요’를 누를 수 있는 콘텐츠만을 선호하고 그럼으로써 서로에게 그런 콘텐츠를 생산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이 ‘감정화’라는 개념으로 분석하는 상황이다.

사회 전체가 감정화에 잠식된 상황에서 이 책이 특히 주목하는 영역은 문학이다. ‘감정화한 사회’의 귀결로 즉각적인 감정만을 촉발하는 ‘기능성 문학’이 순문학과 서브컬처 문학을 막론하고 대세가 되었다. 인터넷은 ‘근대와 민주주의의 재실행’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신자유주의, 플랫폼, 감정화가 이를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면 비평은 어떻게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감할 것인가, 비평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

지은이 오쓰카 에이지는 국내에 주로 만화 원작과 작법서를 통해 알려졌지만 일본에서는 사회, 정치, 문학을 가로지르는 전방위 비평가로 묵직한 질문들을 던져 왔다. 2000년대 들어 민속학과 이야기론에 몰두했던 그는 이 책으로 첨예한 현실 문제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자로 돌아왔다. ‘감정화’, ‘기능성 문학’, ‘패자의 문학의 죽음’, ‘문체의 소멸’, ‘소설 쓰는 AI’ 등의 발상으로 이제껏 본격적으로 소개된 적 없는 비평적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이 책에서 그는 지금 우리가 처한 감정화의 현실 바깥으로 나가게 해 줄 비평 언어의 창안을 촉구한다. «감정화하는 사회»

«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 디자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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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커버)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영국의 문화 비평가 마크 피셔의 첫 책으로 자본주의의 실패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책이다. 읽기 전엔 자본주의나 대안 어쩌구 하는 딱딱한 표현들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니 뛰어난 문화 비평가로 소문난 지은이의 글답게 논의를 영화나 음악 등 대중적인 소재들과 잘 엮어놓아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른 학술서들에 비해 내용이 어렵지 않고 또 문장력도 더없이 훌륭하게 느껴졌는데, 지은이가 분명 마음 따뜻한 사람일 거라 확신하게 되는 부분이 여럿 있었고 곳곳에서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표현을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나는 이 책을 아주 감정적으로 읽고 받아들인 것 같기도 하다. 피셔가 심한 우울증을 앓았고 재작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이 책은 떠올리면 가슴 한 켠이 저린, 아픈 손가락 같은 텍스트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표지 디자인 후기

«알고 싶지 않은 것들» 표지 디자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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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지 않은 것들» 표지(커버)

이 책은 아주 시각적인 책이다. 데버라 리비가 젠더와 인종 문제로 뒤얽힌 자신의 과거를 회고하는 자전적 에세이지만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야기의 흐름이 극적이고 시간과 장소, 분위기를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비가 경력을 연극으로 시작했고 영화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덕분이 아닐까 싶다. 원고를 읽으면서 아주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몇몇 있어 그 장면들을 시각화해 표지에 드러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장면들을 드러내지 않고 색감만으로 시각적인 강렬함을 주는 표지를 상상하기도 했다. 두 가지 방향을 오가며 시안 작업을 병행하다 옮긴이 선생님과 상의해 두 번째 방향으로 결정했다. «알고 싶지 않은 것들» 표지 디자인 후기

비장소의 인류학자, 노년을 말하다

«나이 없는 시간» 옮긴이 후기
비장소의 인류학자, 노년을 말하다

<꽃보다 할배> 시리즈는 2013년 첫 방송 이래 지난 2018년까지도 시즌을 이어 가며 방송 중인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다. 평균 연령이 70대인 ‘할배’들의 해외 배낭여행이라는 독특한 포맷과 더불어, 인생의 정점을 한참 지난 노년의 배우들이 보여 준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많은 시청자의 호응을 얻었다. 이를테면 첫 여행지였던 프랑스에서 배우 신구는 혼자 유럽을 여행 중인 젊은 학생을 만나 “존경스럽습니다”라는 인사로 진심을 전했고, 팔순을 훌쩍 넘긴 배우 이순재는 방문하는 여행지마다 학구열을 불태우며 하나라도 더 보고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행지의 문화와 사람을 존중하고 여행 도중 만난 젊은이를 친근하게 반기는 이들의 모습에 동년배인 노년층뿐 아니라 젊은 시청자 역시 호평을 보냈다. 이처럼 세대를 아우르는 좋은 반응에는, 젊은 세대와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로까지 여겨지기에 이른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노인과 상반되는 면모를 텔레비전 속 등장인물들이 보여 주었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많은 면에서 이들의 행동은 우리가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이 든 꼰대’가 아닌, ‘나도 저렇게 나이가 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긍정적으로 본 건, 시간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을 거스르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나이에 순응하며 여행지에서 보고 듣는 것들을 통해 자신의 지나간 인생을 반추하는 그들의 태도였을 것이다. 비장소의 인류학자, 노년을 말하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살아오면서 여러 고양이—대부분 암컷이었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처음이자 유일했던 경우를 제외하면 고양이들은 모두 중성화 수술을 받았고, 그 탓에 짝짓기의 즐거움과 새끼를 키우며 가지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각각의 고양이가 보여 주었던 삶은 반복되는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장난기 넘치는 처음 몇 달, 의기양양한 성숙기, 점진적인 근력 감소, 그리고 항상 똑같이 찾아드는 말년의 평온함까지. 살다 보면 시간이 점점 더 빨리 흘러간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반려동물의 미덕 중 하나는 아마도 그들이 대체 가능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곧바로 다른 반려동물을 찾아 함께하면 이전에 키우던 동물과의 사별이 안긴 슬픔을 줄일 수 있기는 하다.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을 대체하지 않기로 결심한다면, 그때부터는 인간과 동물의 운명이 나란히 놓이게 되리라는 걸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나이 없는 시간»

«나이 없는 시간: 나이 듦과 자기의 민족지»
마르크 오제 지음 | 정헌목 옮김 | 144쪽 | 12,000원

우리는 나이 듦이 자연스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전통과 위계를 중시하던 과거에는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레 권위와 존경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른바 고령화와 진행되고 사회의 변화가 가속화된 오늘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낡고 뒤처졌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래서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노년의 삶을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는 사람도 점점 늘고 있다. 프랑스의 원로 인류학자이자 ‘비장소’라는 개념으로 잘 알려진 마르크 오제의 «나이 없는 시간»은 이처럼 나이 든다는 사실의 의미를 사유하는 책이다. 원서가 출간된 2014년에 일흔아홉 살이었던 지은이는 켜켜이 쌓인 세월에서 체득한 성찰과 인류학자 특유의 관찰을 결합한다.

이 책의 제목이 역설하듯 나이 듦에 대한 성찰이란 자기의 민족지, 즉 자기에 대한 탐구에 다름 아니며, 이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나이 없는 시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사실 노년이란 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가 나이 들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노쇠해 가는 와중에도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나이 듦과는 다르게 시간과 관계 맺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성찰 과정에서 지은이는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넘나들며 나이 듦과 시간, 기억, 자아, 글쓰기, 향수 등의 관계를 사색한다.

«나이 없는 시간»

마크 피셔의 K-punk 블로그는 한 세대 동안 읽혀야 한다

마크 피셔와 «자본주의 리얼리즘»에 관한 마지막 블로그 글을 올립니다. 피셔가 사망한 후 음악 비평가 사이먼 레이놀즈가 «가디언»에 기고한 추도문입니다(https://goo.gl/4QXjZ5). 이 글에서 레이놀즈는 피셔의 블로그 K-punk가 2000년대에 영국 비평계에서 차지했던 위상과 역할, 피셔가 매혹되었던 문화적 대상들, 지칠 줄 몰랐던 열정을 동료이자 독자의 입장에서 회고하고 있습니다. 피셔를 잃은 슬픔과 더불어 그의 작업을 이어받은 정신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마크 피셔의 K-punk 블로그는 한 세대 동안 읽혀야 한다

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

오늘은 마크 피셔가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을 잘 보여 주는 글을 한 편 올립니다. 2013년 말에 블로그에 올린 이 글에서 피셔는 금융 위기 이후 영국의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와 잘 어울리며 때마침 개봉된 영화 <헝거 게임: 캣칭 파이어>를 읽습니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대규모 자본이 투자된 상품이지만, 가끔 우리는 스스로와 모순을 일으키며 상품 논리의 한계 영역까지 밀고 나아가는 작품을 보게 됩니다. <헝거 게임> 시리즈가 그 사례로, 이 시리즈는 자본주의가 우리를 철저히 포획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혁명의 필연성과 이를 위한 새로운 집단성의 필요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화가 암울한 현재를 절대화할 위험이 있다면, 피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영화를 빌려 그 출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야 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기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