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k-펑크» 1권을 내면서 오랜만에 국내 필자의 서평을 받았습니다. 대중 음악 비평가이자 블로거로 맹활약 중인 나원영 선생님께 서평을 부탁드렸고,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이라는 아름다운 글을 보내 주셨습니다.

마크 피셔는 오랫동안 ‘제집 같지 않음’unheimlich이라는 기분에 골몰했어요. 이 기분은 자신이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초래하지만, 거꾸로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다는 욕망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 나원영 선생님은 채 완공되지 못한 k-펑크라는 집을 둘러보면서 제집 같지 않음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냅니다. 나아가 피셔와 마찬가지로 제집이 없는 듯이 느껴졌던 자신의 경험을 토로하고, 허구에 불과할지라도 자신만의 집을 지으려는 시도를 긍정합니다.

서평은 “혼자서는 집을 지을 수 없으니까요”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이 말은 «k-펑크»를 지침서 중 하나로 추가하라는 권유인 동시에 함께 각자의 공간을 지어 나가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불안정하고 불균등할지언정 그렇게 개개의 집이 모여야만 공동체도 꿈꿀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린 무언가 새로운 걸 짓고 있어, 나를 위해 아름다운 무언가를

유령론이란 무엇인가

사이먼 해먼드의 <k-펑크 전반>에 이어 이번에는 «k-펑크»에 수록되지 않은 피셔 자신의 글 한 편을 번역해 올립니다. «필름 쿼털리» 66권 1호(2012년 가을)에 발표한 <유령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이에요. «필름 쿼털리»의 허락을 받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Copyright © 2012 by the Regent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원문 링크: https://online.ucpress.edu/fq/article-abstract/66/1/16/29155/What-Is-Hauntology?redirectedFrom=fulltext

2000년대 중반부터 피셔는 정치와 문화 영역에서 점점 더 미래가 사라져 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20세기가 불러일으켰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잦아들고 그 자리를 향수가 점유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그는 자크 데리다에게서 유령론이라는 개념을 빌려 옵니다.

피셔에게 유령론이란 구체적으로 사회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해졌을 뿐 아니라 이를 극복하고자 한 ‘대중 모더니즘’의 약속을 되살리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흔적을 표면화해 리얼리티를 교란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애초에 유령론 논의를 개시한 분야가 대중 음악(특히 전자 음악)이었다면, 여기서 피셔는 문학을 경유해 영화와 텔레비전 영역으로 범위를 확장합니다. 그런 다음 후반부에서는 60~70년대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유령론적 형식을 갖춘 동시대의 작업들도 일별하고 있어요.

«k-펑크»에는 피셔의 블로그 게시물과 각종 매체 기고문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글을 싣고 있지는 않아요. 안타깝게도 «필름 쿼털리»에 기고한 글들은 «k-펑크»에 수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중 하나라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 글을 번역하기로 한 첫째 계기입니다.

피셔는 유령론 개념이 “제2의 (비)생명”을 얻었다고 평가하는데, 그럴 수 있었던 데는 피셔의 공이 상당히 크지 않을까 싶어요. 이 글은 그런 피셔의 유령론 이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고 있고,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주된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글을 소개하고자 한 둘째 계기입니다.

마지막으로 피셔는 무엇이 현실로 간주되느냐 자체가 첨예한 정치적인 문제라 생각했고, 현실 감각을 뒤흔드는 작품을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구상 한편에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반대편에는 대중 모더니즘과 유령론이 자리해 있었어요.

«k-펑크» 1권과 이 글은 피셔가 유령론적 작품들을 (재)발굴하고 개념들을 정교화한 과정을 기록합니다. 특히 영화와 텔레비전을 다루고 있는 이 글은 «k-펑크» 1권에 실린 몇몇 글의 후속작처럼 읽히기도 해요. 또 유령론 개념은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이라는 말년의 기획으로 이어지고요.

그의 첫 책인 «자본주의 리얼리즘»과 마지막 책인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만 소개된 한국에서는 그간 두 책이 이질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피셔의 일관된 관심이 두 권 모두에 담겨 있기도 해요. «k-펑크» 1권과 <유령론이란 무엇인가>가 둘을 잇는 가교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유령론이란 무엇인가

k-펑크 전반

오늘은 마크 피셔의 생애과 생각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사이먼 해먼드(Simon Hammond)의 <k-펑크 전반>(k-punk At Large)이라는 글을 번역해 공유합니다. «뉴 레프트 리뷰» 118호(2019년 7/8월)에 게재된 글로, 지은이와 «뉴 레프트 리뷰»는 무료로 번역을 허락해 주었어요. 이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Copyright © 2019 New Left Review, Simon Hammond)
원문 링크: https://newleftreview.org/issues/ii118/articles/k-punk-at-large

피셔가 사망한 후 그를 기리는 글이 여러 편 발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밟아 온 지적, 개인적 궤적을 사회문화적 변동과 연결한 작업은 아직 드문 편인데요. 해먼드의 이 글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어요.

해먼드는 한 편의 글이라는 한계 안에서 피셔의 삶과 작업을 돌아봅니다. 특히 앞선 세대의 주요 문화 이론가였던 스튜어트 홀과 피셔를 비교하면서 대처리즘하에 청소년기를 보내고 신노동당 집권기에 지적 경력을 시작한 피셔가 이전 세대와 얼마나 상이한 조건에서 활동했는지 드러냅니다.

피셔는 사적인 경험과 기억을 역사적 이행과 연결하는 감각이 비상한 비평가였습니다. 또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 및 문화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때로는 뚜렷이 낙관적이고 또 때로는 비애감이 두드러집니다), 역으로 그의 글 상당수는 사회 변화나 사건에 개입하려는 시도였어요.

그래서 그가 쓴 글들의 맥락을 밝혀 주는 문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 글이 마크 피셔의 사고가 어떻게 빚어지고 변화해 왔는지 궁금했던 분들에게 유용한 동행이 되지 않을까 해요. 열심히 작업했고 여러분과 나눌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k-펑크»와 함께 즐겁게 읽어 주세요!

k-펑크 전반

책 밈

«k-펑크» 1권을 여는 글 중 하나인 <책 밈>을 공유합니다. 이 글에서 피셔는 책과 관련된 몇 가지 질문에 답하며 자신에게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 책들을 소개합니다.

그는 카프카를 가장 내밀하고 지속적인 동반자로 꼽은 뒤 10대의 우정에 담긴 잔인함을 분석한 애트우드의 차가운 합리주의를 언급하고, 스피노자의 탁월함을 ‘비디오드롬’에 빗대는가 하면 밸러드, 그레일 마커스와의 계시에 가까운 마주침을 들려줍니다.

«k-펑크» 작업을 시작할 때는 피셔가 이 책들을 자신의 만신전에 올려놓은 것이 조금은 (어떤 책은 매우) 의외였습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 책들의 두터운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어요. 주제의 측면만이 아니라 피셔의 시선과 정신을 육성했다는 측면에서도요.

지난한 작업 끝에 «k-펑크» 1권을 출간하면서 먼저 이 글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었습니다. «k-펑크» 전체의 입구라 할 만하거든요. 수치심, 부적합하다는 감각, 주체성에 대한 관심, 계급 이동 경험, 모더니즘에 대한 애정과 펑크에 대한 충실성 등 거의 모든 실마리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책 밈

신용도의 정치적 우위

미셸 페어가 2019년에 «퍼블릭 북스»Public Books에 기고한 짧은 글 <신용도의 정치적 우위>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미셸 페어와 «퍼블릭 북스»의 허락을 얻어 번역문을 블로그에 게재합니다.
원문 링크: The Political Ascendancy of Creditworthiness

이 글은 기업 영역뿐 아니라 선거 정치 영역에서도 ‘신용도’를 둘러싼 싸움이 결정적인 내기물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일견 앞뒤가 맞아 보이지 않는 포퓰리즘 우파의 급부상이에요.

포퓰리스트들은 글로벌 엘리트에 대한 인민의 분노를 이용한 덕분에 정권을 잡았다고 이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사실 포퓰리스트들은 이 엘리트들의 든든한 우군이에요. 그럼에도 지지자들은 이들에 대한 충성을 거두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페어는 ‘신용도’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포퓰리스트들이 지지층의 ‘포트폴리오’(피부색, 젠더 규범, 문화 전통 등) 가치를 상승시키겠다고 약속하며 집권에 성공했다고 강조합니다.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보호하면서도 러스트 벨트의 원한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는 거예요.

이런 포퓰리즘에 대항하려면 “자산 평가에 대한 이들의 독점과 경합하고자 분투”해야 한다는 것이 페어의 논지입니다. 그러면서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미투’,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 같은 운동들을 “자신만의 등급 평가 체계를 생산하고 유통”하고자 한 시도로 보자고 제안해요.

“이들의 목적은 제도적 특권, 구조적 인종주의, 젠더 규범, 강력한 로비가 비호해 온 프로젝트나 관행의 신용도를 떨어뜨릴 뿐 아니라 이런 기획과 관행이 평가 절하하는 생명들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다.” 바로 정치 영역에서 벌어지는 대항 투기인 것이죠.

신용도의 정치적 우위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

미셸 페어가 2021년 초 벌어진 ‘게임스탑 사태’를 다룬 글인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이 글은 인류학자이자 «피투자자의 시간» 출간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신 이승철 선생님께서 옮겨 주셨어요. 이 글은 시드니 대학에 기반을 둔 ‘정치 경제학의 진보'(Progress in Political Economy, PPE)에 게재되었고, 미셸 페어와 PPE의 허락을 얻어 번역문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원문 링크: Another Speculation is Possible: The Political Lesson of r/WallStreetBets

게임스탑 사태(본문에 세부 정황이 나와 있어요)는 레딧에 모인 아마추어 투자자들이 대형 헤지 펀드와 플랫폼을 한 방 먹인 통쾌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카지노 자본주의의 위험과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사례 이상으로 해석되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반면 미셸 페어는 투기의 동학을 이제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이 사태가 증언하고 있다 말합니다. 그러곤 물어요. “콘솔 비디오 게임과 구식 휴대 전화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행해진 이 같은 실천들을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

«피투자자의 시간»에서도 강조하듯 페어는 약탈적인 기업과 금융 기관에 불리한 방향으로 대항 투기를 벌이려면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도박 공동체들’과 대안적인 ‘평가 기관들’[신용 평가사]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플랫폼의 발달 덕분에 힘 없는 이들이 금융의 “자기 실현적 예언” 게임에 참가해 영향력을 발휘하기 수월해졌다고 말하면서 “이제 또 다른 투기가 가능해졌다”고 주장해요.

게임스탑 사태는 금융 자본주의에 의식적으로 도전한 사례는 아닐지라도 이런 전략들의 활용 가능성을 드러내 준 사건이라 할 만해요. 이런 가능성에 주목하다 보면 우리의 관심사도 어떤 액티비즘이 ‘정치적으로 순수하냐’에서 ‘다른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느냐’로 옮겨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게임스탑 사태에서 일반 투자자들이 “금융시장의 자기참조적 구조”를 간파해 활용했고, 이 ‘운동’이 포퓰리즘적 요소를 포함했음을 분석하는 이승철 선생님의 논문 <금융의 프랑스 혁명?: 게임스탑 사태와 투자자 포퓰리즘의 등장>(«문화연구» 10.1, 2022)도 함께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오픈 액세스라 무료로 다운받아 볼 수 있어요).

또 다른 투기는 가능하다

소득의 분배와 자본의 가치 상승: 새로운 사회 문제의 밑그림

어제에 이어 오늘은 «피투자자의 시간» 본문 일부를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들어가며>의 한 부분으로 신자유주의와 금융화를 구분해야 한다는 결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요.

신자유주의 이론과 정책은 주주 가치를 기업의 핵심 과제로 격상했고, 각종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미셸 페어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의제들의 시행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의도하지도 예견하지도 못했던 결과를, 즉 경제의 금융화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와 금융화는 사이가 매우 좋습니다. 때로는 동의어로 여겨지기도 하죠.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둘이 빚어내는 ‘주체성’이 다르다는 것이 그 차이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론가와 정치가들은 ‘자립적인 기업가적 주체’를 생산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금융화된 결과 대부분의 경제적 행위자가 ‘(상호) 의존적인 피투자자’가 되었어요. 금융화된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 ‘가치 상승’을 꾀하는 피투자자로 살아가도록 강제됩니다.

이처럼 «피투자자의 시간»은 금융이 헤게모니를 쥐면서 사회적 불만, 적수, 저항 방식, 투쟁 목표 등이 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금융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피투자자들이 반격을 개시할 수 있다는 발상을 고수하고요. 그렇다면 어떤 방법들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소득의 분배와 자본의 가치 상승: 새로운 사회 문제의 밑그림

좌파의 우울, 신자유주의, 피투자자라는 조건

오늘은 «피투자자의 시간»에 진입하기에 앞서 읽어 볼 만한 인터뷰 하나를 번역해 공유합니다. «피투자자의 시간» 출간 후에 미셸 페어가 웹진 «퍼블릭 세미나»Public Seminar와 나눈 짧은 인터뷰로 이 책을 집필한 동기를 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지은이 미셸 페어와 «퍼블릭 세미나»의 허락을 얻어 번역문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원문 링크: Left Melancholy, Neoliberalism, and the Investee Condition

이 인터뷰에서 페어가 말하는 동기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처음에 좌파는 신자유주의를 자유 방임으로의 귀환으로 여겼지만 신자유주의는 국가에 시장 관계를 활성화하고 기업가적 주체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그 귀결을 분석하는 것이 하나의 동기라 할 수 있어요.

둘째, 일부 좌파는 신자유주의 이전의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로 돌아가려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향수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날 금융화된 자본주의가 빚은 주체성을 전유해야 한다는 것이 페어의 중요한 주장입니다.

셋째, 위의 둘 모두 미셸 푸코 덕분에 가능해진 논변이지만, 페어는 또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의를 진행한 1979년의 푸코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웠던 어긋남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자유주의 이론/정책의 의도와 결과, 즉 신자유주의와 금융화 사이에 무거운 차이가 있다는 거예요.

이 세 가지 논점 모두 앞으로 더 상세히 소개할 예정이에요. 이 짤막한 인터뷰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금융화의 차이가 뭔지,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고 조건들을 전유하는 전략이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온전히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걱정은 금물. «피투자자의 시간»과 말미에 수록한 <피셸 페어와의 인터뷰>는 풍부하고 명료한 언어로 페어의 동기와 이론적 논점, 실천적 함의를 설명하고 있어요. 이 매력적인 인터뷰에 흥미와 궁금증이 일었다면 이제 «피투자자의 시간»을 집어들 시간입니다!

좌파의 우울, 신자유주의, 피투자자라는 조건

행성적 유토피아들

지난번 스피박 인터뷰에 이어 이번에는 2018년에 니키타 다완의 사회로 스피박과 앤절라 데이비스가 나눈 대담을 공유합니다. 베를린에서 열린 어느 심포지엄을 마무리하는 토론의 일부로, «래디컬 필로소피» 2.05호(2019년 가을)에 <행성적 유토피아들>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어요. «래디컬 필로소피»의 허락을 받아 번역문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두 사람의 강연 및 대담 전체 영상을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저희를 비롯해 데이비스와 스피박의 만남이 뜻밖이라고 느낄 독자분들도 있을 텐데요. 그런 만큼 이 대담은 두 사람의 동지애를 확인시켜 주는 한편 그들 사이에 난 좁힐 수 없는 거리도 극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데이비스가 미국의 상황을 중심으로 (특히 인종 문제를 둘러싼) 사회 운동과 정당 정치의 현실 및 새로운 가능성을 논한다면 스피박은 글로벌 남부 혹은 트리컨티넨트의 견지에서 데이비스의 논의에 집요하게 개입하고 있어요.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대담이라 흥미진진하면서도 주목을 요하는 내용이 정말 많아요. 스피박과 데이비스뿐 아니라 오늘날 정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진 모든 분이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행성적 유토피아들

저는 행복한 늙은 소녀예요

스피박은 개인사를 자신의 논의에 종종 포함하는 비평가입니다. 이는 자신이 어디서 왔고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를, 즉 자신의 주체 위치를 표시하는 시도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스피박의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그가 살아온 여정에도 호기심을 품게 됩니다. 그렇지 않나요?

이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인터뷰가 있어 번역해 블로그에 올립니다. 안줌 카티알Anjum Katyal이 스피박의 여든 번째 생일을 기념해 기획한 인터뷰로, 올해 2월 인도의 ‘Scroll.in’ 지면에 게재되었습니다. Scroll.in의 허락을 받아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이 인터뷰는 스피박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해 학창 시절과 미국 유학생 시절을 돌아보고,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번역과 그의 학문적 여정을 짤막하게 회고합니다. 그뿐 아니라 페미니즘과 서발턴 계급, 마하스웨타 데비에 대한 그의 생각, 그가 인도 농촌에 세운 학교들의 의의도 확인할 수 있어요.

이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그는 지적으로만이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끊임없이 이동해 온 사상가예요. 이제 여든이 되었고 그래서 죽음을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인터뷰 속 그는 여전히 힘이 넘칩니다.

홍콩에서 한국 여성 노동자들을 만난 일화나 그의 인도 학교에 얽힌 이야기들은 무척 감동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목을 읽고 나면 커다란 벨트로 운전자와 자신을 결속하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농촌 마을로 향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기가 어려울 거예요.

이 인터뷰가 스스로 “탈조직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르게 결정되어” 있다고 평하는 스피박과의 비평적 내밀함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길, 그리하여 «읽기»를 비롯한 그의 저작에 들어서는 데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저는 행복한 늙은 소녀예요

«읽기» 디자인 후기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이름은 익숙하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서발턴에 관한 글을 썼다는 것과(이렇게 말하지만 서발턴에 대해선 내가 또 뭘 알겠나..) 아주 박식한 사람들마저 진저리를 칠 만큼 어려워한다는 것 정도? 그렇지만 그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사진에서 풍기는 카리스마로도 예감할 수 있듯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도. 그래서 벵골 출신의 이 노장 여성 학자의 책을 우리가 출간하기로 결정했을 때, 근거 없는 자부심이 나를 감쌌다. 스피박이라니! 하지만 스피박을 오랫동안 좋아한 옮긴이 선생님이 번역 원고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 스피박을 오랫동안 흠모한 편집자가 1교, 2교를 거치며 교정지에 얼굴을 파묻고는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머리칼을 쥐어뜯는 걸 지켜보면서, 자부심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불안이 나를 휩쌌다.

«읽기» 디자인 후기

비평적 내밀함

«읽기»는 강연을 엮은 책이어서 장 말미나 중간에 학생들의 질문과 스피박의 답변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인 <교직과 자서전>의 질문 제목은 ‘비평적 내밀함’이에요. 이에 대한 스피박의 대답을 발췌해 여러분과 공유합니다.

철학적 읽기와 문학적 읽기의 구분에 대한 질문이 나왔던 같아요. 이에 그는 그런 차이는 부수적이라고,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냥 읽기가 있을 뿐이라고 답합니다. 이는 비평적 거리가 아니라 비평적 내밀함을 확보하는 읽기예요. 그가 애용하는 표현으로는 “텍스트의 프로토콜”에 들어가는 읽기고요.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 파업»을 예로 들어 이것을 간명하게 설명합니다. 읽기란 요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텍스트’의 사적인 문법을 살피는 것이라고요. 그리고 그러한 읽기로 훈련받아야만 어떤 텍스트를 진정으로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고 스피박은 말해요.

그의 글이 종종 그렇듯 무심해 보이면서도 에너지 가득한 부분입니다. 읽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부분이라 생각하고요. 그리고 이 부분을 읽었다면 이제 강연의 처음으로 돌아가 스피박의 읽기에 들어서는 일만 남았어요!

비평적 내밀함